예조 판서 윤개와 참판 홍섬이 종묘 제도에 대하여 아뢰다
예조 판서 윤개(尹漑)와 참판 홍섬(洪暹)이 묘제(廟制)에 대해 서계(書啓)하기를,
"우리 나라 종묘(宗廟) 제도를 상고해 보니, 《오례도설(五禮圖說)》에는 비록 태조(太祖) 1위(位)에, 소(昭)와 목(穆)이 각각 2위씩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현재 세워져 있는 태실(太室)이 7간(間)에 동서로 각각 2간의 협실(夾室)이 있는데, 태조를 모신 제1간이 1실(室), 태종(太宗)을 모신 제2간이 2실, 세종(世宗)을 모신 제3간이 3실, 문종(文宗)을 모신 서쪽 협실이 4실, 세조(世祖)를 모신 제4간이 5실, 덕종(德宗)을 모신 제5간이 6실, 예종(睿宗)을 모신 제6 간이 7실, 성종(成宗)을 모신 제7간이 8실이 됩니다. 세(世)의 수로는 이미 5세가 지났으나 태종과 세종은 공(功)과 덕(德)으로 백세 불천지주(百世不遷之主)로 되어 있습니다. 문종은 세조와 1세가 되어 있으나 세조 역시 백세 불천지주이며, 또 덕종이 예종과 더불어 1세가 되고, 성종이 또 1세가 됩니다. 이제 중종 대왕을 부묘(祔廟)하게 되면 4세를 합하여 4친(親)의 사당이 되는데, 4세·6왕(王)이 바로 2소(昭)·2목(穆)의 자리로 모셔져서 위로는 조천(祧遷)할 신주가 없고 아래로도 새로 부묘할 신실(神室)이 없습니다. 그러니 중축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실정입니다.
삼가 《성종대왕부묘의궤(成宗大王祔廟儀軌)》를 상고하니, 그때 이미 종묘를 증축하여 신실을 늘리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마침내 문종의 신주를 협실로 옮기고는 세종 이하에 차서(次序)대로 성종 대왕을 태실 제7간에 승부(陞祔)하여 모셨는데, 당시에 이를 논하는 사람들 가운데 미안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었습니다. 지금 중종을 새로 부묘하고 나면 인종을 또 부묘해야 할 것이므로 반드시 3간은 증축해야만 되겠습니다. 그리고 문소전(文昭殿)에는 세종을 옮겨야만 세조·예종·성종이 차례로 올려질 것이고 중종이 부묘될 것입니다. 인종의 부묘는 따로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종묘에 3간을 증축하는 일에 대해서는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2품 이상이 함께 논의하여 이미 확정을 보았습니다. 다만 이는 국가의 대사(大事)인데 당초 논의에 참여했던 자는 본래 부득이한 일임을 알지만 참여하지 못한 자로서는 비록 조정에 있는 관원이라 해도 필연코 그 뜻을 모를 것이므로 지금 이 묘제(廟制)를 서계(書啓)합니다. 이를 의궤(儀軌)에 기록해 둔다면 지금은 물론 후세까지도 모두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성종을 부묘할 때도 종묘 제도에 관하여 널리 논의하여 확정한 바이므로 이제 다시 의논드리지 않겠습니다. 문소전에 있어서는 태조를 제외하고는 차례대로 옮겨 모셔야 할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당(堂)은 같이하고 실(室)만 달리하는 제도를 후한(後漢) 이후부터 그대로 써왔으니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의 세대 수가 갈수록 많아지고 사당의 간가(間架)가 장옥(長屋)을 이루어서 사시(四時)의 대제(大祭)도 한 사당 안에서 합향(合享)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구차한 묘제는 없을 것이다. 또 문소전으로 말하더라도 비록 위차(位次)에 있어 소목(昭穆)의 서차는 잃지 않고 있으나 이미 종묘가 있으므로 중첩되게 하는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니, 이른바 제사를 예(禮)로 받든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또 생시(生時)처럼 받든다 하여 하루 4∼5차에 걸쳐 음식을 푸짐히 차리느라고 국가 경비의 태반이 소모되고 있고, 또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이 항시 도마나 솥 곁에 서 있어서 깨끗이 다루기도 어렵거니와 훔쳐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오히려 신명(神明)을 더럽히고 있으니 유해 무익(有害無益)한 일이다. 의리로 재단(裁斷)하여 쓸데없는 폐단을 일체 개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선후(先后)의 시호(諡號)에 있어서는 여섯 자를 쓰는 것이 관례인데 장경 왕후(章敬王后)께서 중종보다 먼저 훙서(薨逝)하셨기 때문에 하상(下喪)이라 하여 두 글자만을 썼던 것입니다. 이제 부묘할 때를 당하였으니 반드시 네 글자를 먼저 정한 연후에 옥책(玉冊) 등의 일을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도 장순 왕후(章順王后)와 공혜 왕후(恭惠王后)께서 모두 대왕보다 먼저 훙서하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두 글자만 썼다가 뒤에 네 글자를 추가하였으니 전례 또한 그러합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407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禮曹判書尹漑、參判洪暹, 以廟制書啓曰: "竊考我朝宗廟之制, 《五禮圖說》雖云太祖一位, 昭、穆各二位, 而見立大室七間, 東西各有夾室二間, 太祖居第一間爲一室, 太宗居第二間爲二室, 世宗居第三間爲三室, 文宗居西夾室爲四室, 世祖居第四間爲五室, 德宗居第五間爲六室, 睿宗居第六間爲七室, 成宗居第七間爲八室。 世數已過於五, 而太宗與世宗, 以功以德, 爲百世不遷之主。 文宗與世祖爲一世, 而世祖亦爲百世不遷之主, 德宗與睿宗爲一世, 成宗爲一世。 今祔中宗大王合四世爲四親之廟, 四世六王, 乃爲二昭、二穆之位, 上無祧遷之主, 而下無新祔之室。 增建之擧, 在所不已者也。 謹按成宗大王祔廟儀軌, 其時已有修廣增室之議, 而竟遷文宗神主於夾室, 世宗以下, 以次陞祔, 成宗大王於太室第七間, 當持議者多, 以爲未安。 中宗新祔, 仁宗又將祔焉, 必增建三間乃可。 且文昭殿則世宗當遷, 世祖、睿宗、成宗, 以次而陞, 中宗祔焉。 仁宗之祔, 當別議處之。" 仍啓曰: "宗廟三間加造事, 議政府、六曹二品已上, 同議已定矣。 但此國之大事, 當初參議者, 固知其不得已也, 如其未參者, 則雖在朝之士, 必不知其意, 故今以廟制書啓。 若以此書諸儀軌, 則當時與後世, 皆得以洞知矣。 且成宗祔廟時, 亦已廣議廟制旣定, 今不更議。 文昭殿則太祖外, 以次當遷也。
【史臣曰: "同堂異室之制, 自後漢以來, 循而行之, 莫之能革。 國家世數浸多, 架成長屋, 雖四時大祭, 亦不得合享於一堂, 廟制之苟且, 莫甚於此。 且文昭殿, 則位次雖不失昭穆之序, 然旣有宗廟, 重疊不經, 非所謂祭之以禮者。 又其象生時盛設膳具, 日至四五, 國之經費, 耗竭太半, 烹夫飪隷, 長立俎鼎, 勢難齋潔, 偸竊成習, 褻瀆神明, 有害無益。 以義裁之, 一革冗弊可也。"】
且先后諡號, 例用六字, 而章敬王后, 先中宗薨逝, 以下喪, 只用二字。 今當祔廟時, 則必加四字, 爲六字之諡, 加上四字, 先定然後, 玉冊等事, 可以措置矣。 前者章順王后、恭惠王后, 亦皆先大王薨逝, 故始用二字, 而後加四字, 前例亦如此矣。" 傳曰: "皆如啓。"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407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