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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9일 병인 2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성균관 생원 신백령이 조광조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상소하기를,

"천리(天理)는 소소(昭昭)하여 일찍이 없어진 적이 없고, 인심(人心)은 울울(鬱鬱)하면 불만을 터뜨리게 되는 법입니다. 맑은 것을 선양(宣揚)하고 흐린 것을 제거하던 선(善)과 악(惡)이 자연히 구별되고, 말을 하기도 하고 글로 쓰기도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가 엄정(嚴正)하니, 공론이 터져 나온 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도 죽고 일도 지나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오히려 그의 원통함을 이제라도 호소하려 하여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더 불쌍한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은, 반드시 그러할 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무릇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한 천성으로 누구나 본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군자가 억울하게도 소인에게 모함 받는 것을 보고 그 불행함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대개 그의 이목(耳目)이 접하는 것에 있어서 그의 마음이 반드시 발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홍공(弘恭)281) ·석현(石顯)282) 이 참소하여 소망지(蕭望之)283) 가 자살한 일에 있어서는 선유(先儒)들이 당시의 임금을 기롱하였고, 양기(梁冀)284) 가 옥사를 조작하여 이고(李固)285) ·두교(杜喬)286) 가 나란히 죽음에 나아간 일에 있어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시대를 한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효원(孝元)은 유약하여 겁이 많았고, 환제(桓帝)는 어둡고 나약했기에, 소망지두교이고의 화는 역시 그 당시에만 당하고 그쳤습니다.

오늘날에는 또한 이보다도 심한 일이 있습니다. 【기묘년 사람들의 일을 가리킨다.】 주상께서 총명하시고 신하들이 선량하므로 모든 정사가 조금 편안해져 경사스러운 풍운(風雲)의 모임287) 이 천년(千年)에나 한 번 있는 때이니, 이런 참에는 비록 더러 군자(君子)의 행사(行事)를 끊어버리는 참소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밉게 여겨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믿고 들어주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들에게 해독을 가하였고 죽은 뒤에도 또한 용서하지 않았으니, 악(惡)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도 앞으로의 일은 오히려 잘 해갈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분명하게 여탈(與奪)288) 을 보이어 옳고 그름을 확정하여 오늘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구분이 되고 후세에 있어서도 의심이 없게 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인후(仁厚)하고 강명(剛明)하신 자품으로 끊임없이 날로 새로워지는 공력을 겸하시어, 곧은 사람은 들어 쓰고 바르지 못한 사람은 버려두며 남의 장점은 따르고 자신의 단점은 버리시기를 40년이나 하는 동안에 하는 일을 잘못한 것이 없어, 중흥한 왕업이 옛적에 비해서 광채가 있게 되었으니, 대개 또한 극진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한 가지 일이 잘못됨으로 해서 【기묘년 사람으로 복직되지 않은 사람이 있음을 가리킨다.】 그 사이에 누가 되는 일이 없지 못하여, 전대에 없던 전하의 치적이 장차 극진하게 선(善)하지 못한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신들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한 경제(漢景帝)289) 는 형명(刑名)을 좋아한 임금이요, 조조(鼂錯)290) 는 또한 순수한 신하는 아니었으니, 진실로 참소하여 이간하는 말이 들어가기만 하면 제대로 죽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논자(論者)들이 더러는 군신의 의리가 결여된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와 같은 성명으로도 오히려 하나의 현명한 신하 【조광조를 가리킨다.】 를 보호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죄도 없는 선비를 죽인 것도 이미 융성한 시대의 일이 못되거니와, 10년이 지나면 인사(人事)가 반드시 변하는 법인데, 오랜 시일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죄없는 사람을 죽인 것을 뉘우치는 일이 있지 않으시니, 전하의 마음쓰심은 너무도 잔인하고 지켜야 할 바를 잃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아, 유림(儒林)의 화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러야만 하는 것입니까? 옛적에도 우리 조정처럼 극도하게 된 일이 없었는데, 기묘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전하의 시대에 다시 무오년·갑자년291) 과 같은 사화(士禍)가 있어 난세(亂世)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줄 알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인재를 교육하여 성취시키려고 하시는 생각은 세종·성종께서 배양하던 방법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시지만 사기(士氣)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게 된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기묘년의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터무니없는 죄에 빠져 끝내 변백(辨白)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두서너 신하가 있는데, 【조광조·김정(金淨)·기준(奇遵)이 복직되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신들이 감히 가장 우수한 신하 하나의 이름을 말한다면 조광조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조광조는 평소에 뜻과 행신에 있어 숭상하는 바가 있었고 학업이 크게 이루어졌었는데, 신들은 진실로 흘러온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군자(君子)인 사람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그처럼 되었겠습니까. 우리 도[吾道]가 동방으로 온 지 오래인데 또한 전승(傳承)이 있었습니다. 대개 조광조김굉필(金宏弼)에게서 받고, 【김굉필은 연산조 때의 사람이고 벼슬은 좌랑에 이르렀는데 살해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겨 성리학에 정밀하였고 또한 실천하는 공부가 많았었다. 금상(今上) 기묘년에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와 동시에 문묘(文廟)에 배향하려고 했었는데, 대신 정광필(鄭光弼)이 ‘비록 실천하여 자신을 닦은 착실한 공부가 있기는 하지만, 사문(斯文)에 도움을 준 공로가 없다.’고 하여 실현하지 못했었다.】 김굉필김종직에게서 받고, 김종직은 전조(前朝)의 신하 길재(吉再)에게서 받고, 길재정몽주에게서 받았습니다. 염(濂)·락(洛)292) 의 흐름을 거슬러 보고 수(洙)·사(泗)293) 의 근원을 탐구해 보고서, 그윽이 안(顔)·민(閔)294) 이 배우던 바와 이윤(伊尹)의 뜻하던 바295) 를 자기 자신이 하기로 한 사람이니 어떻다 하겠습니까? 진실로 정몽주 이후에 이 사람 하나뿐입니다. 재질은 본시 왕좌(王佐)296) 인 사람이고 도학(道學)은 족히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나머지 강비(糠秕)297) 만 가지고도 오히려 당(唐)·우(虞) 시대와 같은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는데, 하물며 지극히 성명(聖明)하신 전하를 친히 만났으므로, 기필코 ·과 같은 임금, · 시대와 같은 백성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해간 것이겠습니까.

장년(壯年)에는 반드시 배운 것을 실행하기를 힘써야 하고, 현달하면 온 천하가 착해지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성현들의 글을 읽을 적에 배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명한 제왕들의 시대가 비록 멀어지기는 했어도 좋은 법들이 오히려 남아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이 힘쓰기만 한다면 지금 세상도 옛적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대체로 이런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짧은 세월 동안에 성주(成周)298) 백년 동안처럼 크게 교화를 일으켜 보려고 했으니, 그의 오늘날을 애닯게 여겨 옛적을 사모한 것과 나라 일을 근심하고 인금을 친애한 소심(素心)이 진실로 아름다왔던 것인데, 그런데 어찌하여 미처 공을 이루기도 전에 쌓인 훼방이 여기저기서 마구 일어나, 죄도 없고 허물도 없이 화란이 그처럼 크게 되고, 마침내는 전하로 하여금 현명한 신하를 죽였다는 말을 면할 수 없게 하였습니까. 얼음과 숯불을 함께 담을 수 없고 사(邪)와 정(正)은 같이 갈 수 없는 법이어서,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못하는 것은 사리와 사세가 본디 그렇게 되어 있어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변(變)이 생긴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일찍 구별해 보지 못하신 때문입니다. 닭을 기르면서 일찍이 고양이를 없애버리지 않는 것은 그 주인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바라건대 먼저 그 당시에 화란을 빛어낸 사당(邪黨)들을 토죄(討罪)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말을 가지고 전하께 올려야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누가 화단(禍端)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도록 근심 거리가 되게 하였습니까. 《춘추(春秋)》의 죄악의 우두머리를 필주(筆誅)한 법으로 조율한다면, 남곤(南袞)심정(沈貞)은 이른바 죄악의 괴수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본시 탐심이 한없는 소인이고 벼슬을 잃을 것만 근심하는 비루한 자들로서 청의(淸議)299) 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항시 꺼리는 마음을 품고 원한을 골수에 쌓으며 기필코 화란을 만들려고 한 것이 이미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이 아니었었습니다. 다만 그럴 틈이 없어서, 연분(緣分)을 찾고 반연을 찾아 궁중(宮中)에 길을 터, 【홍경주(洪景舟)의 딸 홍빈(洪嬪)을 통하여 길을 튼 것을 말한다.】 전하께서 현명한 사대부를 접견하는 마음이 조금 태만해진 것을 알고서, 교묘하게 근거가 없는 말을 꾸미고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참언(讖言)을 가차(假借)하여, 심지어 귀로는 들을망정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기까지 하여, 그 사이에 차츰 젖어들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다음에는 또한 억눌림을 받고 있는 두서너 재상 【홍경주와 성운(成雲).】 을 부추겨 함께 모의하여, 한밤중에 미복(微服) 차림을 하고서 북문(北門)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마치 도둑들이 몰래 도둑질하는 것과 같은 짓을 하고 여우 따위가 간교하게 호리는 것과 같은 작태를 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하고 사류(士類)들을 함정에 밀어 넣어 그들의 사사 원한을 갚았던 것입니다. 대략이 이러하고, 나머지는 다 들어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아아, 토포(吐哺)하고 악발(握髮)300) 한 일은 주공(周公)이 어찌 우리들을 속이려 하여 한 것이겠습니까마는, 겸손하고 공손한 체하여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는 짓을 한 것은 반드시 왕망(王莽)301) 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닙니다. 중유(仲由)염구(冉求)는 구신(具臣)302) 이었지만, 공자의 말이 오히려 ‘의리 아닌 일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조광조가 의리 아닌 짓을 했었습니까. 저 창천(蒼天)이 굽어보고 있고 밝은 해가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임금이 있는 것만 알았지 딴 사심(邪心)은 없었습니다.

옛말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신하를 알아보기는 임금만한 이가 없는 법이다.’ 했습니다. 전하의 성명으로 적신(賊臣)들의 무망(誣罔)한 정상을 알았어야 할 것인데도 전하께서 그들의 참소하는 말을 존숭하고 믿어 억울하게도 올바른 사람들을 죽이고, 연루(連累)된 사람들을 더러는 귀양보내기도 하여 하나라도 선비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은 모두 당파로 몰아붙여 버리고, 일찍이 뒷날의 국가 명맥은 염두에 두지 않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므로써 황하(黃河) 불류(不流)303) 와 같은 참혹한 한탄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진실로 전하께서 덕 지키기를 굳게 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다가도 끝을 맺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을 임용할 적에도 이랬다 저랬다 하여 더러는 성의를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조광조를 의심하지 않으시어, 하는 말을 들어주고 계책을 따라 주기를 한결같이 지난날처럼 하셨다면 비록 백명의 심정남곤이 있었던들 이간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광조를 죄준 것이 비록 본심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금 한 마음의 천심(淺深)을 간사한 사람들이 엿보게 됨을 면하지 못했으니, 전하께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죽고 나자, 권세있는 간신들이 나라 일을 멋대로 하게 되어, 따라서 그 사람들에게 죄를 주고 다시 그 사람들의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이에 그 사람들이 법 만들어 놓은 것을 죄줄 적에는 ‘일 벌이기 좋아하여 만든 것이다.’ 하여, 마치 신법(新法)304) 을 그르게 여기듯이 하고, 그 사람들의 학문을 죄줄 적에는 ‘곡학이다.’ 하여 위학(僞學)305) 을 금하듯이 하며, 그 사람들이 한 일을 헐뜯어 일체를 권간들이 지도해 가는 쪽으로 돌려버리므로 세속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된 뒤부터는 전하의 국사가 날로 더욱 글러가게 되어 다잡아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지금에 와서는, 서로들 투미(偸靡)만 숭상하고 기절(氣節)은 쓸쓸해졌으며 염치를 지키는 도리는 없어지고 분경(奔競)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습니다. 의리에 관한 말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앞세워야 하는 것인데도 더러는 생도(生徒)들이 오히려 듣기를 싫어하고, 어른에게 겸손하고 온순한 행신은 인륜에 관계가 있는 일인데도 더러는 사우(師友)들이 드러나게 금하고 있습니다. 의관(衣冠)을 갖춘 사류(士類)들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항간의 무지한 백성들이겠습니까.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종이 상전을 죽이며, 이서(吏胥)가 관장(官長)을 도모하고 처첩(妻妾)이 지아비를 모해하는 짓을 하여, 교화와 풍속의 폐해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러, 국가의 사세가 마치 낡은 배[舟] 에 앉아 있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그 연유를 따진다면 또한 반드시 조광조가 죽어 버리고 《소학(小學)》의 교육이 다시 세상에 밝아지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앞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 조광조가 하던 일을 가지고 오늘날에 헤아려본다면, 전하께서는 어느 것이 나았다고 여겨지십니까? 그 권간인 무리들이 사리가 아닌 맞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조광조를 참소하고 전하를 무망(誣罔)한 행적을, 비록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셨을지라도 뒷날에는 반드시 이미 깨닫게 되시어, 전하께서 오히려 조광조를 풀어 주시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도 죄주고 계시니 신들의 의혹이 더욱 심해집니다. 전하께서 ‘과격했다.’ 하여 죄주고 ‘시끄럽게 고쳤다.’ 하여 죄주고 ‘조정을 요란하게 했다.’ 하여 죄주고 ‘원로들을 배척했다.’ 하여 죄주고 ‘마침내는 반란(叛亂)을 초래할 것이다.’ 하여 죄주셨는데, 조광조가 실지로 이런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권간의 당들이 그런 죄를 만들어 부회(附會)했던 것입니다.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는데 할 말이 없겠습니까.

만일에 성인들의 중용(中庸)의 도리를 가지고 조광조에게 구비하기를 책하기로 한다면, 더러는 중도에 맞게 하지 못한 실수를 면치 못할 것 같지만 그 당시의 그의 본심을 찾아본다면 조금도 사특한 생각이 없이, 오직 전하께서 선(善)을 좋아하시는 성심(誠心)만 믿고서, 명량(明良)306) 한 사업을 하여 전하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이 맞는 연분(緣分)이 이러했는데도, 도리어 그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헌신하려 한 마음을 믿어 주지 않는 쪽으로 돌려버리고 밝혀 주지 못한다면, 조광조가 전하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조광조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처비(萋斐)로 마침내 패금(貝錦)을 만들 듯하고,307) 암담(黯黮)308) 한 것을 도리어 나직(羅織)하여, 총명하신 우리 주상으로 하여금 기필코 좌복(左腹)309) 에 받아 들이시게 하였으니, 남을 참소하는 그들로서는 또한 완벽하게 해놓았던 것입니다마는, 오히려 나쁜 사람에게 화를 내리는 천도(天道)는 조금도 틀림이 없기 때문에 심정(沈貞)이항(李沆)이 이미 복주(伏誅)된 것입니다. 이는 비록 딴 일 때문이기는 하지만 또한 족히 전일에 죄 지은 것을 반증(反證)할 수 있는 일이니, 죄인을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죄악을 분명하게 아셨다면 진실로 마땅히 천도(天道)를 본받아 행하는 임금의 거조를 내려,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모함하여 죽인 죄를 가하고, 남곤(南袞)과 그의 무리 몇도 뒤따라 죄를 준다면, 이미 뼈가 되어 버린 간신들도 또한 반드시 지하에서나마 죄가 돌아갈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전하께서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조광조에게 돌리십니까.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일찍이 ‘송(宋)나라 조정은 3백 년 동안에 조사(朝士)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되뇌이고 있습니다. 이는 사책(史策) 속에 있는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일이기에 신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송나라 조정만 홀로 이런 명성(名聲)을 받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그만이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단지 전하께서 조금 천위(天威)를 거두시고 특별히 성상의 은덕에 내리어, 온 나라 사람의 이목(耳目)이 새로워지고 후세에 시비가 정해지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의(賈誼)310)장사(長沙)에 들어박혀 있게 한 것은 성주(聖主)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 또한 어찌 한 문제(漢文帝)의 부득이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후세에 가의를 조위(弔慰)하는 사람이 문제를 도(道)가 있던 임금으로 여기면서도 은덕(恩德)은 오히려 박했다고 여겼던 것은, 문제로서 가의를 만났으면서도 그의 재주대로 써주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조광조를 죽이고 죽은 뒤에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는 것을 이것에 비교한다면 이미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후세의 군자 중에 조광조를 조위하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은 비록 위징(魏徵)311) 에게 의심을 가져, 그가 이미 죽은 뒤에는 시기하는 비방을 할 수 있게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뒷날에 요동을 정벌했다가 후회하면서 위징의 공로를 새긴 돌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당 태종도 또한 그러했는데, 하물며 당 태종만 못한 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영제(靈帝)는 한(漢)나라의 용렬한 임금이었습니다마는, 오히려 여강(呂强)312) ·황보숭(皇甫崇)313) 의 말을 써주어, 천하의 당고(黨錮)314) 를 해소(解消)했었습니다. 전하께서 한나라의 영제만도 못하실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신하 소식(蘇軾)의 시(詩)에 ‘조고(弔古)315) 하다 고사(古史)에 울게 되노라.’ 했습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만기(萬機)의 여가에 전대의 역사를 보시다가 간신이 임금을 기망하고 선량한 신하를 모함한 것을 보게 되었을 적에는 오히려 반드시 책을 덮어버리고 차마 보지 못하셨을 것인데, 하물며 친히 전하의 세상에 보시게 된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조광조를 당초에는 한 가지도 후대하지 않는 일이 없으시다가 나중에 가서는 지나치도록 박한 대우를 하고 말았는데, 당초에 후대한 것도 전하이고 나중에 박대한 것도 역시 전하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디까지나 전하이면서도 마음은 더러 변함이 없지 않으셨으니, 그렇다면 전하로 하여금 조광조를 죽이지 않을 수 없게 한 자는 비록 권간들이었지만, 조광조가 필경에는 권간들의 모함과 참소에 빠기게 되도록 한 것은 전하가 아니겠습니까. 믿기만 하다가 의심 받게 되고 곧게만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의 죽음은 애석하기만 하고 그의 정상은 용서할 만한데,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하겠습니까. 가령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악(惡)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이것은 안 될 것이거니와, 가령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조광조는 본디 악을 하지 않은 사람이니, 신들은 그윽이 후세의 군자들이 조광조로 경계를 삼아 선을 하는 일이 태만해질까 싶습니다. 선을 함이 태만해져 정기(正氣)가 신장(伸張)되지 않으면 모든 사특한 것이 꼬리를 물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법입니다. 전감(前鑑)이 멀지 않으니 저 삼흉(三兇)들이 【김안로(金安老)·채무택(蔡無擇)·허항(許沆).】 있습니다. 혹시 성감(聖鑑)을 만에 하나라도 열으시고서 그의 황천(黃泉)에서의 억울한 마음을 살피시어, 옳은 것은 옳다 하시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겨 격양(激揚)하고 권징(勸懲)하는 특전(特典)을 보이신다면 오직 구원(九原)에 있는 충혼(忠魂)만 알고서 감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사기(士氣)가 격려되고 권면될 것이며, 백세(百世) 이후까지 공론이 귀착하는 데가 있게 될 것입니다.

대저 천하에는 둘 다 옳은 일도 없고 또한 둘 다 그른 일도 없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권간(權奸)들이 권간인 것을 아셨다면 어찌하여 권간이 아닌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조광조를 논하여 사람들이 당시에 이미 딴 말이 없었다면 후세에 어찌 딴 의논이 있겠습니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누가 옳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가한 사람을 불가하게 여기는 것은 유독 전하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그윽이 전하께서 불가하게 여기는 그것을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조광조를 죄인이라 여기고 그의 마음은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더러 알기는 하지만 의아스러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왕위(王位)에 계신 날이 오래이므로 권간들이 일을 꾸며 사림의 변이 잇달아 일어남을 보셨기에, 지난날의 일을 징계 삼아 우선 그대로 전정시키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의심이란 일을 해치기만 하는 것이요 결단이란 지혜의 임금인 것이니, 전하께서도 신속하게 결단하소서.

지금 대신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고 대간·시종은 말을 하면서도 다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신하인 사람은 의리상 드러나게 간하지 않아야 하고 간할 적에는 교만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감히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하여 뇌정(雷霆)을 만나게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이 없게 되는 것이나 비록 더러 말을 하기는 하면서도 말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또한 반드시 전하께서 조광조 죄 주기를 이처럼 심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마침내 한 쪽 말만 듣는 잘못을 고집하여 사(邪)와 정(正)이 분별되지 않도록 하신다면, 사림에게 있어서 어떻게 되고 조종에게 있어서 어떻게 되며 사직에 있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자(仁者)와 현자(賢者)를 신임하지 않고도 나라가 공허하게 되지 않는 는 없는 법입니다. 임금의 거동은 반드시 써놓게 되는 법인데 훌륭한 사관이 있어 반드시 바른대로 쓰게 된다면 뒷세상의 책에서 전하의 어지심은 알지 못하고 오직 소인만 가까이 하고 현명한 신하는 멀리했다고 알게 될 것입니다. 백대 후에 이것을 본다면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동방(東方)한 지역이 장차 만고(萬古)토록 긴 밤중처럼 어둡게 될 것입니다.

썩은 뼈는 이미 흙이 되었을 것이고, 유명(幽明)이 영구히 막혀 버렸습니다. 신들이 구구하게 이처럼 하는 것이 어찌 사정이 있어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일찍이 《예경(禮經)》을 읽어보건대 ‘선을 좋아하기는 치의(緇衣)316) 처럼 하고 악을 미워 하기는 항백(巷伯)317) 처럼 하라.’고 했는데, 해석한 사람은 말하기를 ‘누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좋아함과 미워함이 올바르게 되는 사람은 대개 적은 법이니, 치의는 좋아하기를 올바르게 하고 항백은 미워하기를 올바르게 한 것이다.’ 했습니다. 신들이 반드시 이를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은, 전하께서도 ‘그 교인(驕人)을 보고 이 노인(勞人)을 가엾이 여기듯이’318) 하시어, 오늘날에 있어서의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올바르게 하시기를 바라서입니다.

이른바 권간들이 선량한 신하들을 적해(賊害)한 죄악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소급해서 주삭(誅削)을 가해야 한다는 뜻을 일찍이 이상에서와 같이 논했기에 많은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조광조의 죄가 없음을 들어, 전하를 위해 반복해서 해명(解明)하는 것은, 대개는 역시 오악(惡惡)은 짧게 하고 선선(善善)은 길게319) 하는 뜻입니다. 진실로 그의 선을 착한 것으로 여기신다면, 포록(褒錄)해야 하고 정려(旌閭)해야 할 것이요, 단지 벼슬만 추증(追贈)하여 그의 영혼을 위로나 하고 말아서는 안 될 일인데, 전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계시고 또한 따라서 변명만 하고 계십니까? 상(商)나라는 오히려 딴 시대였는데도, 상용(商容)320)식려(式閭)321) 해 주고 비간(比干)322)봉묘(封墓)323) 하는 일을, 무왕(武王)이 해줌으로 해서 만백성의 열복(悅服)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충신을 드러내고 어진이를 존숭하는 것은 백성들의 심복을 얻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비도(非道)로 조광조를 죽이시고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으려고 하시니, 무왕과 비교한다면 누가 참덕(慙德)324) 이 있게 되겠습니까?

또 신들이 앞에 말한 정몽주는 곧 고려 말년의 충신입니다. 우리로 본다면, 당시의 난신(亂臣)이요 선왕(先王)들의 대대(大憝)325) 라 할 수 있는데, 세종(世宗)께서 그의 후손들을 등용하여 그의 충절을 장려하고 또한 고금 충신들의 대열에 끼워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정몽주에게는 후히 하고 선조들에게는 박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충절을 드러내고 사기를 진작시키려면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데, 전하 때에 와서는 따라서 문묘에 배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조광조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일을 세종께 질정하기로 한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하의 가법(家法)을 저버림이 없지 않는 일이요, 조종을 본받는 마음이 또한 지난날보다는 조금 게을러지신 것입니다. 조광조의 죽음이 진실로 비간(比干)이나 정몽주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평소의 기절은 서로 상하를 겨룰 만하니, 신들이, 주무왕(周武王)이나 우리 세종께서 포정(褒旌)하시는 법을 전하께서 하시기 바라는 것이 또한 그럴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인들 또한 어찌 은전 베푸는 것이 사실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감히 수다스럽게 말을 하는 것은, 대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론을 붙잡아 세우고 사풍(士風)을 고무시켜 옳은 것은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기를 올바르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천(中天)에 뜬 태양은 지극히 공정하여 가 없는 법인데, 오직 이 한 가지 일은 성명의 누가 되겠기에, 신들이 그윽이 전하를 위해 몹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까닭을 따져보면 전하께서 진실로 잘못이 전혀 없을 수 없는데, 오히려 알지 못하고 계십니까. ·같은 사람이 아니고선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잘못했다가도 능히 고치게 되면 그보다 더 큰 선(善)이 없는 법입니다. ‘허물 고치기 꺼리지 말라.’는 것은 공자가 한 말이요, 허물을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은 성탕(成湯)의 일입니다. 태갑(太甲)326)자예(自艾)327) 하여 마침내 덕을 잘 닦아 가게 되었고, 성왕(成王)은 이미 깨닫고 나서는 글을 쥐고 울었고,328) 후대로 내려와서 위무공(衛武公)329) 에 이르러서는 나이가 96세에 ‘억(抑)’ 시를 지어 경계했기 때문에 마침내 예성(睿聖)이 되었고, 거백옥(蘧伯王)330) 은 나이 50세에 49세까지의 잘못을 알았었기 때문에 마침내 군자가 되었다.

대개 뉘우침[悔]은 길(吉)해질 시초인 것이요, 본래로 되돌아옴[復]은 현인들의 할 일인 것이니, 모름지기 자기 갱신[自新]을 용맹스럽게 하고 개과 천선을 마땅히 신속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개연(慨然)히 살펴보고 번연(飜然)히 깨달으시어, 처음의 마음을 다시 찾으시고 지난 일을 깊이 자책하시면서 사정(邪正)을 가려 내고 시비를 밝혀 내어, 호오를 잘 살펴서 취함과 버리기를 맞게 해 가신다면, 공론이 시행되고 인심이 안정되어 선비들의 풍습이 자연히 바로잡아지지 않을 수 없고 온 나라의 풍속이 자연히 아름다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세에 굴(屈)했던 것이 펴이게 되어 만세토록 바로잡아지게 되면, 지하의 조광조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조광조만 다행한 것이 아니라 사림도 다행하게 되고, 사림만 다행한 것이 아니라 조종들께서도 다행하게 되고, 조종들만 다행한 것이 아니라 국가도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가 다행하게 된다면 전하의 몸은 마땅히 다행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조광조의 일에 있어서 이미 그의 본심을 모두 드러내어 말했으니, 김정(金淨)·기준(奇遵)의 일에 있어서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정기준의 사람됨이 비록 조광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뜻한 바나 행신한 바가 대개는 또한 같았습니다. 군신 사이의 대의(大義)를 진실로 이미 익숙하게 강명(講明)해 왔었기에, 반드시 망명(亡命)이란 의리가 아닌 이름에 자신을 빠트리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당시의 그 고을 원들이 교묘한 말로 몰래 권간을 도와 【김정이 금산(錦山)으로 귀양갔었는데 그의 어미가 보은(報恩)에 있으므로 김정이 근친(覲親)하러 가려고 하자, 군수 정웅(鄭熊)이 처음에는 허락해 놓고, 이미 간 뒤에 망명(亡命)했다고 무고(誣告)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다. 기준은 아산(牙山)으로 귀양가 있다가 한 번은 술이 취하여 어머니를 사모하는 지극한 정을 견디지 못하여 말을 타고 절반쯤 가다가 돌아왔는데, 현감(縣監) 배철중(裵哲中)이 역시 망명했다고 무고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다.】 권간들이 그대로 죄를 구성하게 되었었으니, 어찌 지하에서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생(死生)이 결판나는 마당에 임하여 차마 서로 놓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모자간의 지극한 인정인 것인데, 이를 어찌 빼앗아 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유독 충성과 효도는 똑같은 것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신들이 지위도 없고 책임도 없는 몸으로 계책을 아뢰고 일을 말하고 하여 분수에 넘치는 짓을 했기에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마는, 그러나 마침 전하께서 구언하시는 때를 만난데다 마음 속에 간절한 충정(沖情)을 그만둘 수 없기에, 감히 평소에 초야에서 듣던 공론을 이제 한 마디 말하여 성상께서 깨우치시는 자료가 되게 하려고 거리낌없이 다 말씀드리느라고 말이 지루하게 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대개 하늘이 내리는 재변이나 상서는 모두가 임금의 정신과 마음씨의 운용(運用)에 연유하는 것이어서, 길(吉)하게 되거나 흉하게 되는 반응이 그림자가 나타나고 메아리가 울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적실하게 아무 재앙은 아무 정사의 잘못 때문이고 아무 변은 아무 일을 잘못해서라고 지적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윽이 신들의 나름대로의 근심이나 지나친 생각으로나마 미루어본다면, 혹 전하께서 호오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심(人心)과 천리(天理)가 펴이지 못하고 답답하여, 온 나라의 공론이 오래될수록 더욱 격동하게 되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신들이 당면한 지금의 인사(人事)를 보건대 이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들의 말을 턱없고 외람한 것이라 여기지 않으시고 다소라도 들어주려 하신다면 그 요점은 다만 전하께서 생각 하나를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진실로 성정(誠正)의 공부를 더해 가고 정일(精一)331) 의 학문을 극진하게 하며, 한편에 치우치는 사심을 끊어버리고 밝은 마음의 본체(本體)를 확충하시고서, 대중의 심정에 따르기를 힘쓰고 천리에 맞게 일을 해 가신다면, 밝은 천지 사이에 사정(邪正)이 제대로 드러나게 되고 맑은 성감(聖鑑) 앞에 호오가 가리움이 없게 되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도리가 이에 이르러서는 극진해지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여 이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한갓 국학(國學)에 있으며 그저 막대한 국고로 먹여줌을 받으면서 명교(名敎) 속에서 죄 얻는 길을 가고 있겠습니까." 【진사 한지원(韓智源)이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답하였다.

"조광조의 일은 전에도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조광조를 어찌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전에 말한 사람에게 답했었는데 너희들이 반드시 들었을 것이므로, 지금 하나하나 들어 답하지 않는다. 조광조의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김정기준의 일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상소가 입계된 지 오래지 않아 곧 계하(啓下)되므로, 혹 살피지 않았는가 의심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성균관 생원 신백령 등이 조광조는 죄가 없다는 뜻으로 상소하였는데, 조정의 의논도 그와 같았기 때문에 사림들의 뜻 역시 그와 같았던 것이니, 조광조가 사심(邪心)이 없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요, 또한 시운이 돌아왔음을 점칠 수 있는 일이었다.

또 논한다. 김안로를 베인 뒤부터 기묘년에 물리침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거두어 쓰여지게 되고, 그때의 선정(善政)을 조금 강구(講求)하여 시행하려 하므로, 후진 사람들이 자못 본받음이 있어서 개연(慨然)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도, 조광조 등이 그때의 영수(領袖)로서 아직도 복직되지 못하였다. 온 조정이 사실을 들어 논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태학생(太學生)들이 또한 글을 올려 호소하며 여러 날을 복합했는 데도 마침내 윤허받지 못했다. 이때 상의 의혹이 풀리지 않았고, 대신들도 기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사림들은 모두 들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03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9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역사(歷史) / 왕실-비빈(妃嬪)

  • [註 281]
    홍공(弘恭) : 전한 시대 사람. 젊어서 법에 걸려 궁형(宮刑)을 받았다. 뒤에 내시(內侍)가 되었는데, 원제(元帝)의 신임을 받아 권세를 부렸다. 《한서(漢書)》 권93.
  • [註 282]
    석현(石顯) : 자는 군방(君房). 법에 걸려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되었다. 원제 때에 대소의 정책을 자신이 결정하여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한서(漢書)》 권93.
  • [註 283]
    소망지(蕭望之) : 자는 장천(長倩). 태자 태부(太子太傅)로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임금 원제를 보필(輔弼)했고, 뒤에 석현 등이 모함하자 음독 자살했다. 《한서(漢書)》 권78.
  • [註 284]
    양기(梁冀) : 자는 백거(伯車). 후한(後漢) 순제(順帝) 양 황후(梁皇后)의 오라비. 대장군이 되었는데, 질제(質帝)가 흉포하고 방자함을 미워하여 발호 장군(跋扈將軍)이라 하였다. 끝내 질제를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웠었는데, 뒤에 베임받았다. 《후한서(後漢書)》 권64.
  • [註 285]
    이고(李固) : 자는 자견(子堅). 질제(質帝)가 시해되자, 두교와 함께 청하왕 산(淸河王蒜)을 세우려고 했었는데, 양기가 환제(桓帝)를 세우고 이고를 모함하여 하옥(下獄)하여 살해했다. 《후한서(後漢書)》 권63.
  • [註 286]
    두교(杜喬) : 자는 숙영(叔榮). 양기의 자제들이 공도 없이 봉작(封爵)받는 것을 간하다가 참소를 당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3.
  • [註 287]
    풍운(風雲)의 모임 : 용이 구름을 만나고 범이 바람을 만나 기세를 펴는 것처럼 총명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서로 만나게 됨을 말한다.
  • [註 288]
    여탈(與奪) : 생살 여탈(生殺與奪)의 약어. 죽이거나 살리는 것과 주거나 빼앗는 것. 여기서는 신원(伸冤) 여부를 뜻한다.
  • [註 289]
    한 경제(漢景帝) : 전한(前漢) 제6대 임금 유계(劉啓).
  • [註 290]
    조조(鼂錯) : 성격이 성급하고 심각하여 남을 용납하지 못했고, 신·상(申·商: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형명학(刑名學)을 추구했다. 경제의 총애로 어사 대부(御史大夫)가 되어 제후(諸侯)들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영지(領地)의 삭감을 주장하다가 이들의 반발로 참형(斬刑)되었다. 《한서(漢書)》 권49.
  • [註 291]
    무오년·갑자년 : 무오년은 연산군 4년(1498)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위시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해. 갑자년은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復位) 문제로 대비(大妃)·후궁(後宮) 및 많은 전직 또는 현직 관원들이 살해되고 귀양가고 부관 참시(剖棺斬屍)되었다.
  • [註 292]
    염(濂)·락(洛) :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고향인 염계(濂溪)와, 정호(程顥) 형제가 살던 낙양(洛陽). 여기서는 그들의 학문을 가리킨다.
  • [註 293]
    수(洙)·사(泗) :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공자가 이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서는 공자의 학문을 뜻한다.
  • [註 294]
    안(顔)·민(閔) : 안은 안연(顔淵), 자는 자연(子淵). 민은 민손(閔損), 자는 자건(子鶱). 공자의 고제(高弟)들이다.
  • [註 295]
    이윤(伊尹)의 뜻하던 바 : 이윤은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어진 정승. 성탕(成湯)의 여러 차례의 초빙으로 은나라 창건에 공헌했다.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이윤은 대현(大賢)이다. 그는 자기가 섬기는 임금을 요(堯)순(舜)처럼 만들지 못하고 백성 하나라도 제 곳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게 되면 마치 저자에서 매 맞은 것처럼 여겼다.’고 했다.
  • [註 296]
    왕좌(王佐) : 제왕(帝王)을 보필(輔弼)하여 태평한 세상, 즉 지치(至治)의 시절을 구현(具顯)할 수 있는 인재.
  • [註 297]
    강비(糠秕) : 겨와 쭉정이. 찌꺼기란 뜻으로 피면(皮面)의 일부분을 의미한다.
  • [註 298]
    성주(成周) : 서주(西周) 때의 도읍명. 곧 주나라를 말함.
  • [註 299]
    청의(淸議) : 대간(臺諫)·시종(侍從) 등 젊은 조사(朝士)들의 분명하고 정당한 여론.
  • [註 300]
    토포(吐哺)하고 악발(握髮) : 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다가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을 뱉고 감던 머리를 쥐고 나가 마중하였던 주공의 고사. 민심을 수습하고 정무를 보기에 잠시도 편안한 때가 없는 것을 말함.
  • [註 301]
    겸손하고 공손한 체하여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는 짓을 한 것은 반드시 왕망(王莽) : 전한(前漢) 제13대 임금 평제(平帝)를 시해(弑害)하고 잠시동안 한 나라를 차지했던 왕망이, 당초에는 거짓으로 겸손하고 공손한 짓을 하여 한때 인망(人望)을 얻었음을 말한다.
  • [註 302]
    중유(仲由)와 염구(冉求)는 구신(具臣) : 중유는 공자 제자 자로(子路). 염구도 역시 공자 제자인 염유(冉有). 구신은 수만 갖추어 놓은 쓸모없는 신하라는 말. 누가 공자에게 묻기를 ‘중유와 염구는 대신이라 할만합니까?’ 하니, 공자가 ‘이른바 대신이란 것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되지 않으면 그만두는 법이니, 지금 중유나 염구는 구신이라 할 수 있다.’ 한 고사. 《논어(論語)》 선진(先進).
  • [註 303]
    황하(黃河) 불류(不流) : 당(唐)나라 소선제(昭宣帝) 2년 6월에 주전충(朱全忠)이 조사(朝士) 30 여 명을 백마역(白馬驛)에 모았다가 하루 저녁에 모두 죽여 황하에 던져버렸다. 당초에 이진(李振)이 진신(搢紳)인 조사들을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들이 평소에 저희들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했으니 마땅히 황하에 던져 탁류(濁流)가 되게 해야 한다.’고 하여, 주전충이 그대로 한 고사.《통감절요(通鑑節要)》 당기(唐紀).
  • [註 304]
    신법(新法) : 송 신종(宋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이 주창한 정치·재정·사회·병제 등 각 분야에 관한 새 법. 개혁의 과격과 시행상의 번잡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 [註 305]
    위학(僞學) : 송 영종(宋寧宗) 때 한탁주(韓侂胄)가 권세를 부리므로 주희(朱熹)가 그의 간사함을 상주(上奏)하자 한탁주가 앙심을 품고, 주희가 그때 도학(道學)의 영수였으므로 도학을 위학이라고 배척하면서 ‘탐심 부리고 방자한 짓 하는 것은 곧 사람들의 진정(眞情)이고, 청렴 결백하게 몸 닦기를 좋아하는 것은 모두 허위다.’고 하고, 위학의 당이라고 임용(任用)을 금지하므로 조정에 정직한 선비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송사(宋史)》 영종기(寧宗紀).
  • [註 306]
    명량(明良) : 임금은 현명하고 신하는 선량한 것.
  • [註 307]
    처비(萋斐)로 마침내 패금(貝錦)을 만들 듯하고, :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 주(注)에 ‘처비는 작은 문채(文彩)가 나는 모양이고, 패(貝)는 물 속에 사는 갑충(甲蟲)인데 문채가 있어 비단과 같다. 처비한 형태가 있는 것을 문식(文飾)하여 패금을 만드는 것이, 마치 사람들의 조그만 과오(過誤)를 문식하여 큰 죄를 만드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註 308]
    암담(黯黮) : ‘암’은 ‘담(黮)’의 오자인 듯함. ‘암담’이나 ‘담담’이나 똑같이 분명하지 못함을 뜻하는 말인데, 《춘추번로(春秋繁露)》 침제명호(沈察名號)에 ‘갖가지 기롱을 담담한 것일지라도 그 진상(眞相)을 뒤집어 놓으면 담담하던 것이 도리어 뚜렷해지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 [註 309]
    좌복(左腹) : 마음 속.
  • [註 310]
    가의(賈誼) : 전한(前漢) 시대의 문신. 태중 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정삭(正朔) 개정, 복색(服色) 변경, 제도(制度) 창정(創定), 예악(禮樂) 부흥을 주청(奏請)하므로 임금이 공경(公卿)을 삼으려고 했다가, 훼방하는 신하가 있으므로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내보냈고 이어 양회왕 태부(梁懷王太傅)로 전임했는데, 얼마 안 되어 나이 33세로 죽었다. 《한서(漢書)》 권48.
  • [註 311]
    위징(魏徵) : 당대(唐代)의 명신. 자는 현성(玄成), 시호는 문정(文貞), 봉작(封爵)은 정국공(鄭國公).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있다 죽었는데, 임금이 한탄하기를 ‘동(銅)으로 거울을 만들면 모습을 바로잡을 수 있고 옛 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興亡)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得失)을 알 수 있는 법인데, 내가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했다. 《당서(唐書)》 권97.
  • [註 312]
    여강(呂强) : 자는 한성(漢成). 환관(宦官)이었는데 준례로 받는 봉작(封爵)을 굳이 사양했고, 황건적(黃巾賊)의 변란 때에 좌우의 탐오(貪汚)한 자들을 벨 것과 당인(黨人)들을 대사(大赦)할 것을 주청(奏請)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후한서(後漢書)》 권108.
  • [註 313]
    황보숭(皇甫崇) : 자는 의진(義眞).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었다. 북쪽 지방을 지키다가 황건적을 격파한 공으로 기주목(冀州牧)이 되었고, 자신을 굽히어 선비를 대우하였으므로 호걸들이 다투어 따랐었다. 《후한서(後漢書)》 권101.
  • [註 314]
    당고(黨錮) : 후한 말엽에 환관(宦官)들의 권세와 횡포가 심하므로 기개 있는 선비들이 비방 공격하다가 도리어 몰려 당인으로 지목되어 많은 선비들이 금고(禁錮)의 화를 당했었고, 뒤에 선비들이 다시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다수의 당인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黨錮傅).
  • [註 315]
    조고(弔古) : 옛일을 생각하며 애도함.
  • [註 316]
    치의(緇衣) : 《시경(詩經)》 정풍(鄭風)치의(緇衣)에 ‘치의(緇衣:경대부의 옷)를 입음이 알맞으니 해지면 내가 다시 만들리라. 우리 님의 관청에 와 수고함을 보았으니 돌아오시면 특별히 음식 대접 하리라.’ 하고, 그 주에 ‘환공(桓公)과 무공(武功)이 서로 이어 주(周)나라의 사도(司徒)가 되어 직책을 잘 보았기에 주나라 사람들이 친애(親愛)하여 지은 시이다.’ 하였다.
  • [註 317]
    항백(巷伯) : 이 시의 한 장에 ‘저 남을 참소하는 자여 누구와 주로 일을 해내는고. 저 참소하는 자를 가져다가 승냥이나 범에게 던지리라. 승냥이나 범도 먹지 않으면 북방에 던지리라. 북방도 받지 않는다면 하늘에 던지리라.’ 하고, 이 대문의 주에 ‘이는 모두 가설한 말이지만, 죽어버렸으면 하기를 매우 심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
  • [註 318]
    그 교인(驕人)을 보고 이 노인(勞人)을 가엾이 여기듯이’ : 이 대문의 말도 윗 대문에 말한 항백(巷伯) 장에 나와있는 말. 교인은 참소가 먹혀지므로 뜻을 얻은 사람이고, 노인은 참소를 만나 어찌할 줄 모르게 된 사람이다.
  • [註 319]
    오악(惡惡)은 짧게 하고 선선(善善)은 길게 : 오악은 남의 악한 짓을 미워하는 것. 선선은 착한 짓을 착하게 여기는 것. ‘군자는 오악은 그 자신에 그치고 선선은 자손에까지 미친다.’고 하였다. 《공양전(公羊傳)》 소공(昭公) 20년.
  • [註 320]
    상용(商容) : 중국 고대 상나라 주(紂) 때의 대부(大夫). 직간(直諫)하다가 귀양갔는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나라를 세운 뒤에 그를 정문(旌門)을 세워 포양(褒揚)했다. 《서경(書經)》 무성(武成).
  • [註 321]
    식려(式閭) : 정려.
  • [註 322]
    비간(比干) : 상나라 주의 숙부. 주가 음란한 짓을 끊임없이 하므로 ‘신하인 사람으로서 죽도록 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3일이 되도록 가지 않고 간하자, 주가 성을 내어 ‘내가 듣건대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했다.’ 하고, 드디어 그의 심장을 해부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 [註 323]
    봉묘(封墓) : 무덤을 만듦.
  • [註 324]
    참덕(慙德) : 덕이 옛 사람과 같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것. 상(商)나라 성탕(成湯)이 걸(桀)을 쳐서 내쫓고 나서는 참덕이 있게 되었다 여기며 말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로 구실(口實)을 삼게 될까 염려된다.’ 한 고사.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
  • [註 325]
    대대(大憝) : 큰 악인.
  • [註 326]
    태갑(太甲) : 상(商)나라 제2대 임금 태종(太宗). 성탕의 손자. 방탕하여 법도가 없자 신하 이윤(伊尹)이 동(桐) 땅에 추방했었다가, 3년 만에 과오를 뉘우치고 착해졌으므로 다시 맞아 왔다. 《서경(書經)》 태갑(太甲).
  • [註 327]
    자예(自艾) : 지난날의 악을 고치고 선을 닦아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려가는 것.
  • [註 328]
    성왕(成王)은 이미 깨닫고 나서는 글을 쥐고 울었고, : 주(周)나라 제2대 임금 성왕이 어리므로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는데 성왕에게 불리한 짓을 하리라는 유언(流言)이 나돌므로 주공이 피해 있으며 치호시(鴟鴞詩)를 지어 왕에게 보냈었다.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자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므로 왕이 금등(金縢)을 열어 보다가, 왕의 아버지 무왕(武王)이 병났을 적에 ‘내 몸으로 대신하기 바란다.’고 한 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왕이 운 고사. 《서경(書經)》 금등(金縢).
  • [註 329]
    위무공(衛武公) : 춘추 시대 위나라 임금. 강숙(康叔)의 8대 손자. 이름은 화(和). 강숙이 하던 정사를 그대로 닦아 백성을 화합하여 모이게 했고, 주나라를 도와 공이 있었다. ‘억(抑)’시는 《시경》 대아에 실려있다. 《국어(國語)》 범어 상(楚語上), 사기《(史記)》 권37.
  • [註 330]
    거백옥(蘧伯王) :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이름은 원(瑗).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적에 그의 집에 머무르기도 했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14·26.
  • [註 331]
    정일(精一) :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약어.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謀)에 ‘인심(人心)은 위태하고도 도심(道心)은 미묘한 것이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중(中)을 집(執)하게 되리라.’ 하고, 그 주에 ‘인심은 사심(私心)이 되기는 쉽지만 공심(公心)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위태하고, 도심은 밝히기는 어렵고 어두워지기는 쉽기 때문에 미묘한 법이니, 오직 정밀하게 살펴야 사심이 끼이지 않게 되고, 오직 전일하게 지켜야 순수한 의리의 올바른 길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成均館生員辛百齡等上疏曰:

天理昭昭, 未嘗泯滅, 人心鬱鬱, 不平則鳴。 揚焉激焉, 淸濁自別, 口之筆之, 《春秋》有嚴, 公論所發, 焉可誣也? 人亡事去, 歲月旣遠, 而尙欲追訟其冤, 傷切懇到, 久而愈甚, 其必有所以矣。 夫好其善, 惡其惡, 一段眞性, 人所固有也。 見君子枉陷於小人, 而無不哀其不幸者, 蓋爲其耳目所接, 其心必動焉矣。 故弘恭石顯之有譖, 而蕭望之自殺, 則先儒刺其君; 梁冀之構獄, 而李固杜喬駢首就戮, 則後人傷其時。 然而孝元柔懦, 桓帝暗弱, 望之, 亦被禍於當年而止耳。 今又有甚焉者。 【指己卯人事。】 主明臣良, 庶事稍康, 風雲慶會, 千載一時, 於是焉, 雖或有殄行之讒說, 固當堲而去之。 方且信而聽之, 反加荼毒於忠良之臣, 死且不赦, 則其於懲惡勸善之道, 何如耶? 已往不可諫, 來者猶可追, 所當明示與奪, 以定是非, 使之有辨於今日, 而無疑於後世也。 恭惟殿下, 有仁厚剛明之資, 兼日新不已之功, 擧直錯枉, 從人舍己, 四十年中, 動無過擧, 中興之業, 視古有光, 則蓋亦盡美矣。 而顧有一事之失, 【指己卯未復職之事。】 不能無累於其間, 使殿下無前之治, 將歸於未盡善之域焉, 臣等竊惑之。 , 刑名之主, 鼂錯, 亦非純乎臣者也, 苟有讒間, 於是乎入焉, 則無怪於不得其死, 而論者或以爲君臣之義缺。 以殿下之聖, 而猶不保其一賢臣乎? 【指趙光祖】 無罪而殺士, 已非盛世事也。 過十年, 人事必變, 而至于今日之久, 曾不能有所悔於殺無罪, 則殿下之心, 可謂太於忍而失所執矣。 嗟乎! 儒林之禍, 一至於此極耶? 古未有極於我朝者, 而至于己卯爲尤酷。 安知其殿下之世, 還有戊午、甲子之禍, 而與亂同事云乎? 殿下敎育作成之心, 可以無愧於世宗成宗培養之道, 而士氣至於掃地蕩盡者, 實由殿下未快悟於己卯之時事也。 其間陷於非辜, 而終未之白焉者, 有若二三臣焉, 【指趙光祖、金淨、奇遵未復職事。】 而臣等敢以一介臣, 爲最優而名言之, 則趙光祖其人也。 光祖平生, 志行之所尙, 學業之大成, 臣等固知其有淵源之漸矣。 國無君子, 斯焉取斯? 吾道久東, 亦必有傳。 蓋光祖得之於金宏弼, 【宏弼, 燕山朝人, 官至佐郞, 被殺。 師事金宗直, 精於性理之學, 且多踐履之功。 今上己卯, 嘗欲與鄭夢周配享文廟, 大臣鄭光弼以爲, 雖有踐履自修之實, 無羽翼斯文之功, 未果。】 宏弼得之於金宗直, 宗直得之於前朝臣吉再, 吉再得之於鄭夢周。 其泝流, 窮源, 竊以之所學, 伊尹之所志, 自許其身者, 爲如何哉? 而實夢周後一人而已。 才本爲王佐, 道足爲人師, 雖糠(稗)〔秕〕 緖餘, 猶足以陶鑄之治矣, 而況親逢殿下之至聖, 必以其君民爲己任, 盡心力而求之也耶? 壯必有行, 達可兼善。 讀聖賢書, 所學何事? 帝王雖遠, 良法猶存, 我苟勉之, 今猶古矣。 率是計也, 欲以期月之間, 大興成周百年之化, 其傷今慕古憂國憂君之素心, 誠可嘉也。 奈何成功未半, 積毁橫生, 無罪無辜, 亂如此憮, 竟使殿下不免有殺賢臣之名乎? 氷炭不同器, 邪正不同道, 道不同, 不相爲謀, 理勢之所固然, 則是變之作, 實由殿下辨之不早(辨)也。

養雞而不曾誅猫, 非其主人之過歟? 臣等請先討其當年釀禍之邪黨, 而以格君心之說, 次及殿下, 可乎? 誰生厲階, 至今爲梗? 以《春秋》誅首惡之法律之, 則南袞沈貞, 其所謂罪之魁者也。 二人本以無厭之小人, 患失之鄙夫, 不爲淸議所容, 常懷忌憚, 積怨於骨, 期欲作亂者, 已非一朝夕矣。 而第無其隙, 因緣攀附, 通路宮掖, 【謂因洪景舟之女洪嬪而通路事。】 知殿下有少怠於接賢士大夫之心, 而巧構無根之言, 敢假不經之讖, 至加以耳可得聞, 口不可道之說, 使浸潤之譖, 得行於其間。 然後又嗾其被屈數三宰相 【洪景舟、成雲。】 而合謀之, 中夜微服, 北門啓鑰, 行盜賊陰竊之事, 逞狐狸邪媚之態, 恐動天聽, 擠陷士類, 以酬其私怨。 大槪如此, 餘難悉擧。 嗚呼! 吐哺握髮, 周公豈欺我哉! 謙恭下士, 未必王莾爲然也。 仲由(再求)〔冉求〕 之具臣, 夫子猶以爲不從不義, 曾謂光祖爲之乎? 彼蒼俯臨, 白日耿耿。 只知有君, 無他邪心。 古不云乎, 知臣莫如君? 則以殿下之聖明, 有可以知賊臣誣罔之情狀, 而殿下崇信讒言, 枉殺正人, 辭所連及, 或可竄黜, 使士有一名者, 悉陷於黨籍, 曾不念後日邦家之命脈, 而致有一(綱)〔網〕 打盡, 黃河不流之慘恨。 此其故何也? 良以殿下執德不固, 爲義不終, 任賢之際, 不得不貳, 而或有所未盡其誠也。 殿下若不以光祖爲疑, 而言聽計從, 一如前日, 則雖百, 可得而間哉? 殿下之罪光祖, 雖非本心, 而使其人君一心之淺深, 不免爲奸邪之所窺, 則殿下有不得辭其責者矣。 人之云亡, 權奸擅國, 因罪其人, 更聲其罪。 罪其法, 則以爲喜事, 有如新法之非; 罪其學, 則以爲曲學, 有如僞學之禁。 乃敢詆其所爲, 一切反之, 權奸所導, 而流俗不得不從之; 自是厥後, 殿下之國事, 日益非矣, 悠悠泛泛, 式至于今, 偸靡相尙, 氣節蕭索。 廉恥道喪, 奔競成風。 至於義理之說, 則學問所先, 而生徒尙或厭聞之, 遜弟之行, 彝倫所關, 而師友尙或顯禁之。 衣冠士類之尙爾, 況閭巷無知之氓乎? 子而戕父, 奴而殺主, 吏胥而圖其官, 妻妾而謀其夫, 敎化風俗之弊, 一至於此, 而國家之勢, 如坐於弊船之中, 寧不寒心? 究厥所由, 則恐亦未必不由於光祖之死, 而《小學》之敎, 不復明於世也。 瞻前而顧後, 以光祖之事, 揆之於今日, 則殿下以爲孰勝? 彼權奸之徒, 以非理不中之說, 譖光祖而罔殿下之迹, 雖不能有悟於當年, 而想必已悟於後日, 則殿下猶可以釋光祖, 而至今罪之, 臣等之惑滋甚焉。 殿下以矯激爲罪, 紛更爲罪, 搖亂朝廷爲罪, 排斥耆舊爲罪, 以其有終致叛亂者爲罪, 非光祖實有此罪, 實皆權奸之黨, 有以目其罪而附會之也。 欲加之罪, 其無辭乎? 如以聖人中庸之道, 責備於光祖, 則似未免或有過中之失, 而求其當時之本心, 則無一毫邪思, 只信殿下好善之誠, 而欲以明良之事業, 報知遇於殿下也。 其君臣相得之分, 有如此者, 而反使忠君循國之心, 終歸於不諒之域而未白焉, 則非光祖負殿下, 殿下負光祖也。 萋斐終成貝錦, 黯黮還爲羅織, 使我明主, 必入于左腹, 彼譖人者, 亦已太甚。 尙賴天道禍淫, 無毫髮爽, 沈貞李沆, 旣已伏辜。 此雖由他事, 亦足以證反於前日, 可謂罪人斯得。 殿下若已明知其惡, 則固當行人君法天之道, 加陷害忠良之罪, 與南袞數輩而追誅之, 則旣骨之奸諛, 亦未必無知於地下, 而罪有所歸矣。 殿下旣不能然, 而猶以其罪, 歸之於光祖耶?

臣等嘗誦朝三百年, 未嘗殺一朝士, 此史策中盛美。 臣等愚心, 不願使朝, 獨受此名。 而然而死者已矣, 不可復生, 只欲使殿下少霽天威, 特垂聖慈, 以新一國之耳目, 而定後世之是非也。 屈賈誼長沙, 非無聖主, 亦豈文帝之不得已也? 而後世弔之者, 猶以文帝爲有道, 恩猶薄者, 爲其以文帝而遇賈生, 用之不盡其才耳。 其以殿下戮光祖, 死猶不釋者而比之, 則不旣太甚哉? 而安知後世之君子, 不有弔光祖者乎? 太宗, 雖其致疑於魏徵, 旣沒之後, 使猜讒得行。 然而有他日征之悔, 旌勳片石, 蹶而復立。 太宗且然, 而況不爲太宗者乎? 靈帝, 之庸主也, 猶能用呂强皇甫嵩之說, 而解天下之黨錮。 可以殿下, 不如 乎? 蘇軾有詩曰: "弔古泣古史。" 殿下嘗於萬機之暇, 目擊前史, 見有奸臣之欺罔人主, 誣陷良善者, 則猶必掩卷而不忍, 況親於殿下之世見之乎? 殿下之於光祖, 當其初, 則待之未始不厚, 而及其終, 則待之失於太薄。 始之厚之者, 殿下也, 終之薄之者, 亦殿下也, 則殿下自殿下, 而其心或不能無變。 然則使殿下不得不殺光祖者, 雖是權奸, 而使光祖必至於陷權奸之謀譖者, 非殿下耶? 信而見疑, 貞而爲戮, 其死可惜, 其情可恕, 非夫人之爲慟而誰爲? 如使後人爲惡, 則惡不可爲; 如使後人爲善, 則光祖本不爲惡, 臣等, 竊恐後之君子, 以光祖爲戒, 而爲善者怠矣。 爲善者怠, 而正氣不張, 則衆邪接迹, 邦其杌隉。 厥鑑不遠, 在彼三兇。 【金安老、蔡無擇、許沆。】 倘能開聖鑑於萬一, 察此心之幽抑, 可乎, 不可乎? (不)〔今〕 可以示激揚勸徵之典, 則不惟九原之忠魂, 有所知感, 抑亦一時之士氣, 有所激勸, 而百世之下, 公論終有所歸宿矣。 大抵天下無兩是, 亦無兩非。 殿下旣知權奸之爲權奸, 則何不以不爲權奸者而可之? 論光祖者, 當時旣無異辭, 後世寧有他論? 一國臣民, 孰不曰可, 而不可其可者, 獨殿下耳。 然臣等竊以殿下之不可爲疑焉。 殿下誠以光祖爲罪, 而不知其心耶? 抑或知之, 而疑未果決耶? 無乃殿下在位日久, 目覩權奸用事, 士林之變, 相繼而出, 有所懲創於前, 姑且欲以鎭靜而然耶? 疑者事之賊, 決者智之君, 願殿下速決之。 今者大臣知而不言, 臺諫、侍從言而不盡, 則豈不以人臣義不顯諫, 諫而無(驕)〔矯〕 , 故不敢徒觸忌諱, 以當雷霆也耶? 使之無言, 與雖或有言而不得盡其言者, 亦未必不由於殿下之罪光祖斯甚也。 若殿下終執偏聽之失, 而使邪正無辨, 則奈於士林何, 奈於祖宗何, 奈於社稷何? 不信仁賢, 而國不空虛者, 未之有也。 君擧必書, 使有良史, 必以直書, 則天下後書, 不知殿下之聖, 而惟親小人、遠賢臣是聞。 百代之下, 謂殿下何如主也? 而東方一域, 將至於萬古如長夜也。 朽骨旣土, 幽明永隔。 臣等區區, 是豈有私而然耶? 臣等嘗讀《禮經》曰: "好善如《緇衣》, 惡惡如《巷伯》。" 釋之者曰: "人莫不有好惡, 好惡得其正者蓋寡, 《緇衣》好得其正。" 《巷伯》惡得其正。’

臣等必以此爲言者, 冀使殿下視彼驕人, 矜此勞人, 以正今日之好惡耳。 所謂權奸賊良臣之罪惡, 已極貫盈矣。 其追加誅削之意, 曾論如(左)〔右〕 , 無足多言, 而惟以光祖之無罪, 爲殿下反覆解之者, 蓋亦惡惡短, 善善長之義也。 苟以其善善之, 則褒錄之可也, 旌異之可也, 不當但以追錫爵命, 慰悅其魂而止耳, 而殿下尙未之悟, 又從而爲辭耶? 猶異代也, 而式閭商容, 封墓比干, 武王有能行之, 而致萬姓之悅服, 則其顯忠尙賢之道, 有以得民之心服也。 殿下旣自以非道殺光祖, 而猶敢不悔, 則其視武王, 孰爲慙德? 且臣等前所云鄭夢周, 乃季之忠臣。 以私觀之, 可謂當時之亂臣, 後王之大憝也, 而世宗錄用其後, 以奬其節, 而又列於古今忠臣之後。 斯豈厚夢周而薄先祖哉? 表忠節, 振士氣, 誠不得不爾, 而至于殿下, 因使之配享文廟。 然則以殿下不貸光祖之事, 而質諸世宗, 則殿下未必無負於殿下之家法, 而法祖宗之心, 又少懈於前日也。 光祖之死, 固異於比干夢周, 其平生氣節, 有足以相上下, 則臣等欲以周武王、我世宗褒旌之典, 有望於殿下, 不亦似哉? 臣等亦豈不知恩典之施, 固亦無關於已死之人, 而敢喋喋者, 蓋不如是, 無以扶植公論, 鼓舞士風, 而使是是非非, 得其正也。 大陽中天, 至公無私, 而惟此一事, 足累聖明, 臣等竊爲殿下多惜之。 原其致此之由, 則殿下固未必無過, 而尙不知之乎? 人非, 孰能無過? 過而能改, 善莫大焉。 過勿憚改, 夫子所言; 改過不吝, 成湯所行。 太甲自艾, 而克終允德; 成王旣悟, 而執書以泣。 推而至於衛武公, 年數九十五, 而有戒之作, 故卒爲睿聖; (籧伯玉)〔蘧伯玉〕 , 行年五十, 而知四十九年之非, 故終成君子人。 蓋悔者, 吉之先; 復者, 賢人之事; 自新須勇, 遷善當速。 伏願殿下慨然省, 飜然悟, 反求初心, 深咎旣往, 辨邪正, 明是非, 克審好惡, 以中取舍, 則公論行而人心定, 士習自不得不正, 國俗自不得不美。 伸屈當年, 取正萬世, 地下光祖, 庶亦多幸。 非獨光祖有幸, 士林有幸也; 非獨士林有幸, 祖宗有幸也; 非獨祖宗有幸, 國家有幸也。 國家有幸, 則殿下之身, 宜無所不幸矣。 臣等於光祖事, 已盡表白其本心, 而至於金淨奇遵之事, 亦不能無辭。 爲人, 雖云不及於光祖, 而其所志所行, 則蓋亦同也。 君臣大義, 固已講之熟矣, 必不以亡命非義之名, 自陷其身, 而當時邑宰, 有以巧說, 陰助於權奸, 【淨謫錦山, 其母在報恩, 淨欲往覲, 郡守鄭熊初許之, 旣去, 誣以亡命, 以至於死。 遵謫居牙山, 嘗乘醉, 不勝戀母至情, 乘馬馳半程而還, 縣監裵哲中, 亦誣以亡命, 以至於死。】 權奸仍得以構成其罪, 則豈不抱冤於冥冥之中乎? 臨決死生, 不忍相捨, 母子至情, 安可奪哉? 而殿下獨不聞忠孝一般之說乎? 臣等無位無責, 乃謀乃言, 極知僭越, 無所逃罪。 然而適當殿下求言之秋, 情切于中, 不能已已, 敢以平居草野之公論, 爲今日一言悟主之資, 而盡言不諱, 故不覺言之支離也。 夫天之降災祥, 皆原於人主精神心術之運, 而迪吉逆凶之應, 猶影響焉。 雖不敢指的某災爲某政之失, 某變爲某事之謬, 而竊以臣等之私憂過計推之, 亦恐或由於殿下之好惡不明, 邪正無辨, 而人心天理鬱不得伸, 一國公論久而愈激之所致也。 臣等見當今之人事, 未有急於此者矣。 殿下如不以臣等之言爲狂僭而少恕之, 則其要只在殿下一念之如何耳。 苟能加誠正之功, 盡精一之學, 絶偏係之私, 充本體之明, 務循輿情, 動合天理, 則日月之下, 邪正莫遁, 淸鑑之中, 姸蚩無隱, 而知人之道, 至是盡矣。 伏願殿下念之念之, 無輕於此。 不然, 臣等豈敢徒處國學, 虛受大烹之養, 而得罪於名敎中哉? 【進士韓智源所製。】

答曰: "趙光祖事, 前亦有言者多矣。 但光祖豈可謂無其失乎? 不可輕易改之之意, 已答於前日言者, 爾等必聞之, 故今不枚擧以答也。 光祖尙然, 而況金淨奇遵, 何足言乎?" 【疏入, 未久卽下, 或疑其不省也。】

【史臣曰: "成均生員辛百齡等, 以趙光祖無罪之意上疏, 朝廷之議如此, 故士林之志亦如此, 光祖之無邪可知, 而時運之來往, 亦可占也。"】

【又曰: "自誅金安老後, 己卯退斥之士, 盡收見用, 而其時善政, 稍欲講行, 後進之士, 頗有慕効, 慨然爲善者多, 而光祖等以其領袖, 尙未復職。 擧朝論列, 不聽, 大學生等, 又上書訟之, 累日伏閤, 竟未蒙允。 是時上惑未解, 而大臣多有不悅者, 士林皆懼其不從也。"】


  • 【태백산사고본】 52책 103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9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역사(歷史)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