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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갑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풍가이의 일과 별시의 제도·성주 사고의 일을 의논하다

조정에 나아갔다. 장령 정희등(鄭希登)이 아뢰기를,

"풍가이(豐加伊)의 종이 본부(本府)에 정소(呈訴)하기를 ‘풍가이의 죄는 상께서 조정의 공론을 채택(採擇)하여 그렇게 죄를 정했던 것인데, 【장 일백 유 삼천리인데, 유 삼천리는 여인(女人)이기 때문에 속을 바치도록 했었다.】 상궁(尙宮)이라는 사람이 타살했으니 종과 상전의 사이에 정의가 민망하다.’고 했습니다. 또 상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하여 의금부에서 때린 데를 때렸다고도 하고, 굶주려 죽게 하였으므로 몸이 말랐었다고도 했습니다. 이는 비록 성상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이겠지만, 민일 조금이라도 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있다면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금내(禁內)에서도 더욱 추찰(推察)하소서."

하니, 상이 재빨리 이르기를,

"내가 물론(物論)을 듣고 이미 그의 죄를 정했었다. 사천(私賤)인 사람은 본디 그의 상전이 있고 궁중(宮中)에 속하지 않는 것인데 금내에서 어떻게 추찰할 수 있겠는가? 법사(法司) 자체가 마땅히 상처를 보고 추찰해야 할 것이고 궁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정희등이 아뢰기를,

"상처는 이미 추찰할 수 없게 되었고, 혹자는 굶주려서 죽었다고 하나, 추찰하기가 어려울 듯하기에 그대로 정지하였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혹시 성상께서 알고 계시는 것으로 여긴다면 성상의 덕에 매우 누가 될 일입니다. 대저 근래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피전 감선(避殿減膳)하고 소의 한식(宵衣旰食)하며 근심하고 수고로우시니 백관들도 허둥지둥하여 천청(天聽)이 더욱 멀기만 했습니다. 농사철이 이미 지났는데도 도무지 비 내릴 기미가 없으니, 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잠깐 비가 내리다가 도로 가물어 여러날토록 이러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하였는데, 정희등이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지극히 먼 것이라 이런 미미한 일이 어찌 위로 하늘에 닿게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동해(東海)의 효부(孝婦)258) 를 살해하매 3년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었습니다. 【풍가이가 앞서 어머니를 위하여 단지(斷指)했었는데, 옥(獄)에 들어갈 때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효부(孝婦)의 일을 끌어다 말을 한 것이다.】 그 상궁이라는 사람이 감히 도리가 아닌 짓으로 살육(殺戮)을 자행했으니, 그의 원통함과 불쌍함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매양 원통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하고 있지만, 이처럼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한 지아비나 한 지어미의 원통함도 오히려 한재(旱災)를 부르는 것인데 하물며 사대부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서로 글을 올려 논계(論啓)했었지만 아직도 통쾌하게 들어주지 않으시어, 형정(刑政)이 매우 중(中)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실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황천(黃泉)에서도 원통한 마음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옛적에도 추연(鄒衍)259) 이 수심(愁心)을 안게 되자 5월인데 서리가 내렸었습니다. 비록 아무 일이 잘못되었기에 아무 구징(咎徵)이 반응하게 되고, 아무 일이 잘 되었기에 아무 휴징(休徵)이 반응하게 된다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것은 곧 이치 속의 일입니다. 요사이 성상께서 괴롭도록 근심하고 두렵게 생각하여 시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제사하지 않은 신(神)이 없어 규벽(珪壁)260) 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가뭄은 더욱 혹독하기만 하여 조금도 천심(天心)을 돌리는 효과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혹 이러한 일들 때문에 그러한 듯합니다."

하였다. 정언 민기문(閔起文)이 아뢰기를,

"한 시대가 일어날 적마다 각각 제도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나라는 비록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모두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유독 사모(紗帽)만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고 합니다. 당초에 대관(臺官) 【장령 백인영(白仁英).】 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고서 아뢴 것은 매우 온편치 못한 일입니다. 대저 의문(儀文)이나 제도에 관한 일은 마땅히 위에서 재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히려 대신들과 의논하여 하셨습니다. 요사이 재상들이 초헌(軺軒) 위에다 모두들 검정 일산[傘]을 장치하는데, 한갓 새로 생긴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서 바라 보면 마치 동궁(東宮)의 청산(靑繖)과 같아 보기에 매우 미안합니다. 중국의 사정으로 말하면 비록 ‘관개(冠蓋)가 서로 잇달았다.’고 하지만, 지역마다 풍속이 다른 법이므로 새 준례를 만들 것이 없습니다. 재상들이 이런 짓을 하면 아래서는 반드시 더 심한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앞서 대관의 뜻을 들어보니 반드시 중국 제도를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한결같게 하려한 것이었고 나도 역시 옛 체제를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 중국 제도를 따르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의상(衣裳) 체제를 중국 체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유독 사모에 있어서만 그렇게 함은 과연 공편하지 못한 일이겠다. 초헌에다 일산을 장치하는 짓에 있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또 옛적에는 늙어서야 초헌을 탔었는데 지금은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이라도 벼슬이 2품만 되면 문득 초헌을 타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사신은 논한다. 요즘은 정령이 한결같지 않아 아침에 고쳤다 저녁에 고쳤다 하고, 대신이 가하다 하면 대간은 불가하다 하여 서로들 옳으니 그르니 하므로 의논이 귀결되지 않아, 백성들이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 포창(褒彰)하는 칙서(勅書)가 내려지자, 처음에는 별시(別試)를 보이라고 명했다가 중간에 고쳐 향시(鄕試)를 보이라고 하였고 나중에는 대관(臺官)의 아룀을 듣고 도로 그만두게 하였는데 이제 또 가을이 되면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사모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백인영의 말에 따라 중국 제도대로 하게 했다가 뒤에는 또 민기문의 말을 듣고 다시 우리 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했는데, 또 대신의 의논을 듣고 다시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 물론이 정해지지 못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영사 윤은보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말을 타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청개(靑蓋)를 세우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고, 지사 성세창이 아뢰었다.

"신이 앞서 사초(史草)를 다시 쓸 적에 보니 무술년261)성주 사고(星州史庫)에 불이났었기 때문에 다시 써서 보관했었다.】 세종조에 초헌 제도를 의논할 때에 한결같이 양(梁)나라 제도대로 하여, 초헌 위에 청개를 세워 해를 가리우게 했었는데, 그때의 의논이 ‘노쇠한 재상들은 혹독한 볕을 쪼이기 어려우므로 부득이 해 가리는 것을 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때에 정부에 신보(申報)하고 시행하여 썼었는데 어느 때부터 다시 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 두 재상이 하고 있지만 삼공(三公)은 지금도 오히려 하지 않으며 그다지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논을 듣게 된다면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사신은 논한다.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한결같이 편리한 대로만 하고 법례(法例)를 따르지 않는다. 옛적에는 나이가 늙은 재상이 아니면 초헌을 타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청년(靑年) 재상이라도 2품만 되면 모두 멋대로 탔고, 왕자(王子)와 부마(駙馬)들도 또한 마음대로 탔다. 이뿐만이 아니라, 권벌(權橃)·유인숙(柳仁淑) 등은 초헌 위에다 또한 양산(涼繖)을 설치하여, 마치 임금의 거둥과 흡사하게 하기를 꺼리지 않으니 물정(物情)이 모두들 미편해 하였다.

민기문이 아뢰기를,

"사학(四學)의 윤차(輪次)262) 법은 비록 유생들을 진작하는 데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역시 옛적부터 해오던 법입니다. 다달이 두 차례씩 시관(試官)을 정하고 유생들을 모아 제술을 시켰었는데 지금은 《후속록》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고 하지 않으므로 유생들이 더욱 학궁(學宮)에 모이지 않습니다. 법사(法司)가 더러 관리를 보내 적간하게 하면, 관원들이 술을 대접하여 보내며 모이는 것으로 신보(申報)하도록 한다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하고, 성세창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학궁에 오지 않는 것은 단지 이때에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매양 보이게 하려고 해 보았지만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못했었습니다. 사학의 윤차를 어찌하여 하지 않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균관의 윤차는 비록 《대전》에 실려 있지 않은데도 시행하고 폐하지 않았는데, 사학에서는 유독 하지 않는다니 사학의 관원들을 추고해야 합니다. 또 듣건대 학궁에 와 있는 유생들은 대부분 외방에서 온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고, 서울에 사는 자제(子弟)들은 전혀 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습이 이미 이러하니 학궁에 나아가도록 할 계책이 없습니다. 앞서는 원점(圓點) 주는 법을 해 보았지만 도리어 매우 소란하기만 했습니다. 사장(師長)을 가려서 임용하여 글을 숭상하는 풍습을 진작한다면 자연히 기꺼이 학궁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아주 흡족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생각해 보아도 그 계책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학교의 황폐가 지금에 와서 더욱 심하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학교에 관한 일은 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만 받들어 거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생들을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부형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권유하여 학궁에 나아가도록 하면 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아, 이런 분부를 받게 되었으니 곧 임금이 학교에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찌 군사(君師)의 소임에 있으면서, 즐거운 벽옹(辟雍)263) 에 다사(多士)들이 제제(濟濟)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반드시 부형들이 권유하기만 기다려야 할 리가 있겠는가. 문형(文衡)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오직 방책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고 임금은 또한 아래에서 받들어 거행하지 않는 것에 허물을 돌리고 있으니, 아, 학교의 황폐는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왜노를 거절하기로 이미 조정 의논이 정해졌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을 계달해 보겠습니다. 왜노들이 오가면 한갓 각 고을들만 폐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해량(渡海糧)264) 및 상품[商物] 무역이 한량 없어 참으로 크게 손해가 되니, 이번의 미미한 사단이 생긴 기회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는 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의 사람 대우하는 도리는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천자는 제후에 대해 한 차례 조회하지 않느면 작위를 낮추고 두 차례 조회하지 않으면 영토를 깎고 세 차례 조회하지 않은 다음에야 육사(六師)265) 를 출동하는 법입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보더라도 초범(初犯)·재범·삼범이 각각 율(律)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본시 교화(敎化) 밖의 사람으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한 차례 변방을 침범했는데 어찌 경솔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번에 엄중한 말로 서계(書啓)를 만들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네가 능히 적왜(賊倭)들을 모조리 베어 죄를 자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하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음에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에 거절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전조(前朝)266) 의 일로 보더라도 왜구들이 교동(喬桐)에까지 들어 왔었고, 강화(江華)운봉(雲峰)에서의 싸움 때는 성무(聖武)하신 태조(太祖)가 계신 데다 또한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기발도(阿只拔都)와 같은 천하의 기이한 무재(武才)로도 패전(敗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위태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전조에 비하여 비록 조금 든든한 듯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흉년 들고 군졸이 고단하여 빈약한 데다가 더욱이 변방 고을들은 성(城)이 없는 데가 또한 많으므로 완전하게 든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절하기는 중난(重難)하다는 뜻을 내가 또한 여러 차례 말했었지만, 마침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기 때문에 부득이 따른 것이다. 이제는 변동하여 고칠 수가 없다. 늘 마음에 끝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있다."

하였는데, 성세창이 아뢰기를,

"왜인들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미편하게 여겨집니다. 의득(議得)할 적에 대신들 앞으로 가서 말을 했었고, 또한 여러 차례 상진과 사사로이 의논해 놓고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혹 할 말이 있겠지만,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은 당초에 거절할 만한 죄도 없고 조종 이래로 접대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만약 이번에 일체 거절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지고 오는 상물(商物)에 있어서도 처분이 우리에게 달린 것인데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국왕의 사신은 조종조로부터 모두를 대등한 상대로 대우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선위사의 말을 어기는 짓을 하지 않았고 또한 상물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요즘은 모두 사납고 오만하며 무역하는 물건도 매우 많아 상하(上下)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타의 왜인들은 우리가 조종하기에 달렸습니다. 대마도를 거절하는 것은 명분이 있겠으나 만일 대내전소이전에서 보낸 제추(諸酋)들의 사송(使送)도 아울러 거절한다면 무리들을 연합하여 침범하게 되어 피해가 매우 클 것입니다. 대마도만 거절한다면 국왕도 반드시 도주(島主)가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당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대내전소이전은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부득이 대중의 의논에 따른 것이다. 처음부터 나의 본 뜻이 아니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10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9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외교-왜(倭)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농업-농작(農作)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과학-천기(天氣) / 신분-천인(賤人)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258]
    동해(東海)의 효부(孝婦) : 전한 시대 사람. 젊어서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으나 시어머니 봉양을 매우 잘했는데, 개가시키려고 해도 듣지 않았다. 그의 시어머니는 나이 늙어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목 매어 죽었는데, 그의 딸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죽였다고 고발하였다. 관원이 잡아갔는데 거짓 자복하자 사형하니, 온 고을이 3년을 가물었다. 다음 태수(太守)가 까닭을 알아내고서, 소를 잡아 그의 무덤에 제사하고 비를 세우니 큰 비가 내렸다. 《설원(說苑)》 귀덕(貴德).
  • [註 259]
    추연(鄒衍)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연 소왕(燕昭王)이 갈석궁(碣石宮)을 지어 살게 하고 스승으로 섬겼었는데, 소왕의 아들 혜왕(惠王)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하옥(下獄)하자 여름철인데 서리가 내렸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 [註 260]
    규벽(珪壁) : 신에게 예물로 바치는 옥.
  • [註 261]
    무술년 : 중종 33년(1538). 이해 11월에 성주 사고가 전소(全燒)되었음.
  • [註 262]
    사학(四學)의 윤차(輪次) : 사학은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 윤차는 유생(儒生)들에게 제술·강서(講書) 등을 과(課)하여 고사하는 것.
  • [註 263]
    벽옹(辟雍) : 학궁.
  • [註 264]
    도해량(渡海糧) : 우리 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일본 사신 및 대마도의 특송 사자(特送使者)에게 바다를 건너는 동안 먹게 하기 위해 지급하는 식량.
  • [註 265]
    육사(六師) : 천자가 통솔한 육군(六軍)으로 1군은 1만 2천 5백 명임.
  • [註 266]
    전조(前朝) : 고려.
  • [註 267]
    납관(納款) :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

○甲子/御朝講。 掌令鄭希登曰: "豐加伊奴子呈訴本府曰: ‘豐加伊之罪, 自上採取, 朝廷公論, 定罪如此, 【杖一百流三千里, 流以女人贖。】 有尙宮稱名人打殺, 奴主之間, 情義悶切。’ 又不欲明著傷處, 加打其禁府所打處云, 或謂使之飢餓而死, 肌肉憔悴云。 此雖上所不知, 若有一毫上亦與知, 則聖德之累, 夫豈偶然? 自內願加推察焉。" 上遽曰: "予聞物論, 已定其罪。 私賤之人, 自有其主, 不屬於宮闈, 自內何能推察? 法司自當因傷處推之, 宮闈則專不干涉矣。" 希登曰: "傷處旣不可推察, 而或謂飢餓而死, 恐難推察也, 故姑停之矣。 外間之人, 恐自上或預知, 則甚累聖德也。 大抵近來連歲凶荒旱暵, 避殿減膳, 宵旰憂勤, 百僚遑遑, 而天聽愈邈。 農月已過, 頓無雨徵, 臣不知何以爲之。" 上曰: "頃者乍雨旋旱, 至於累日如此, 予甚憂之。" 希登曰: "天道至遠, 如此微細之事, 豈足以上干? 然東海殺孝婦, 而三年不雨。 【豐加伊嘗爲母斷指, 及就獄時, 瘡尙未瘢, 人憐之, 故引孝婦以言。】 彼尙宮者, 敢以非道恣行殺戮, 其冤悶可知。 朝廷每審理冤枉, 而如此枉死者, 尙多有之。 一夫一婦之冤, 尙召旱災, 況於士大夫乎? 頃者趙光祖事, 侍從、臺諫交章論啓, 尙不快從, 刑政甚爲失中。 其情則不然, 而抱冤於泉壤之下。 昔鄒衍含愁, 而五月飛霜。 雖不可指爲某事失, 則某咎徵應, 某事得則某休徵應, 冤氣之感傷和氣, 乃理中之事也。 近來自上憂勤惕慮, 無所不爲, 靡神不擧, 珪璧旣卒, 而旱災愈酷, 略無回天之效, 不知何由而然耶? 以臣無所不至之心, 恐或以如此之事而致然也。" 正言閔起文曰: "一代之興, 各有制度。 我國雖曰一遵華制, 而不能皆然, 獨於紗帽, 必從唐樣。 當初臺官 【掌令白仁英。】 不知其非而啓之, 深爲未便。 大抵儀文制度之事, 當自上裁斷也。 然此則猶與大臣議而爲之。 近來宰相等, 於軺軒上, 皆張黑傘, 非徒新創之事, 遠而望之, 正如東宮靑繖, 於瞻視殊爲未安。 中原之事, 雖云冠蓋相望, 方域異俗, 不必創開新例也。 宰相等如此, 則下必有甚焉者矣。" 上曰: "前聞臺官之意, 非欲必從唐樣也, 欲一其異同, 而予意亦欲從古體。 適大臣之議, 皆欲遵唐樣, 故然也。 衣裳之體, 不倣華制, 而獨於紗帽, 如此爲之, 果爲未便。 至於軺軒張傘之事, 尤不可也。 且古則年老然後乘軒, 今則雖年少者, 位若二品, 則便乘軺軒, 甚不當也。"

【史臣曰: "近來政令不一, 朝更夕變, 大臣曰可, 則臺諫曰不可, 互相是非, 議不歸一, 民不取信。 中朝有褒勅, 初命爲別試, 中改爲鄕試, 終以臺官之言, 還止之, 今又命於秋來爲之。 且紗帽, 初以白仁英之言, 從華制造之, 後又以閔起文之言, 復從我國舊制, 又用大臣議, 更從華制, 物論不定, 豈其美事?"】

領事尹殷輔曰: "中朝則雖騎馬者, 皆立靑蓋, 我國則今不見如此之事也。" 知事成世昌曰: "臣前於史草改書時 【戊戌年, 星州史庫火, 改書以藏。】 見之, 在世宗朝議軺軒制度時, 一依制, 軒上立靑蓋以遮日, 其議以爲老病宰相, 難暴酷炎, 不得已爲遮日之具云。 其時報府行用, 不知自何時而復廢也。 今則雖或一二宰相爲之, 三公時尙不爲, 不甚盛行。 聞此議論, 則誰敢爲之?"

【史臣曰: "今時士大夫, 一從任便, 不拘法例。 古則年老宰相外, 無乘軺軒者, 今則靑年宰相, 若陞二品, 則皆乘之不憚, 王子、駙馬, 亦任然乘之。 非徒此也, 權橃柳仁淑等, 軺軒之上, 又設涼繖, 似逼人君擧動而無忌, 物情皆以爲未便。"】

起文曰: "四學輪次之法, 雖不大關於振作, 亦自古通行之法也。 每一月二次定試官, 聚儒生而製述, 今以不載於《後續錄》, 故廢而不爲, 儒生尤不聚學宮。 法司或送吏摘奸, 則官員等饋酒以送, 報以聚會云, 甚爲不當。" 世昌曰: "儒生不到學宮之事, 非但今時爲然。 臣每欲使之聚會, 而儒生不可驅迫, 故不能也。 四學輪次, 不知何以不爲也。 成均館輪次, 雖不載《大典》, 猶通行不廢, 四學獨不爲之, 學官員可以推考也。 且聞儒生之來寓學宮, 率皆外方無依之人, 京居子弟, 絶無往者。 習已如此, 無計可使就學也。 前爲圓點之法, 反甚騷擾。 擇任師長, 振起文風, 則自然樂赴學宮矣。 然安能盡得其洽然者? 常爲思慮, 未得其策。 學校荒廢, 到今尤甚, 深爲未穩。" 上曰: "學校之事, 法非不足, 第不奉行耳。 儒生不可驅迫, 誰無父兄者? 勸之就學則可矣。"

【史臣曰: "嗚呼! 承此敎, 則上之無心於學校, 可知。 豈有在君師之任, 而不能使 ‘於樂辟雍, 多士濟濟’, 而必待父兄之勸哉? 典文衡之責者, 唯以未得其策爲言, 上又歸罪於下不奉行。 噫! 學校之荒廢, 其將無可奈何而已。"】

特進官尙震曰: "拒絶倭奴, 朝議則已定矣, 請以臣所懷啓達可乎? 倭奴來往, 非徒各邑受弊, 渡海糧及商物貿易, 不可紀極, 眞巨害也。 得此微釁, 絶之似可。 但帝王待人之道, 不可太迫, 天子之於諸侯, 一不朝則貶其爵, 再不朝則削其地, 三不朝然後六師移之。 且以治盜事見之, 初犯、再犯、三犯, 各異其律。 本化外之人, (不)不可以治我民之法治之。 今一犯邊, 何可輕絶? 當此曲直有在之時, 嚴辭書契, 以責島主曰: ‘爾能盡斬賊倭, 以見服罪之誠。’ 云, 而彼不能, 然後罪惡貫盈, 絶之未晩。 以前朝事見之, 倭寇至入喬桐江華, 雲峯之戰, 以太祖聖武, 而又有李豆蘭, 故雖以阿只拔都之天下奇才, 亦見敗。 不然, 殆矣。 今則防備比前朝雖似稍固, 連年凶荒, 軍卒單弱, 加以邊邑無城者亦多, 不可謂完固。 且馬島, 土地磽薄, 皆於石上加土, 耕麥而食, 不見接於我國, 則無所資活, 將爲窮寇, 不得已以抄竊爲事矣。 西北邊事, 亦甚虛踈, 恐有被寇之患也。 前朝末, 契丹長驅入楊根忠州原州之間, 至於文班宗親, 皆充軍額深爲可懼。 且以時運見之, 無百年升平之運, 今之拒絶倭奴, 恐爲輕易也。 彼衣食之源在我, 終必乞降。 然一來降, 必不輕許, 必再三來乞, 然後方許納款, 則邊民之受害恐多也。" 上曰: "拒絶重難之意, 予亦屢言之, 適朝議皆然, 故不得已從之。 今不可撓改。 常有一念, 未知厥終何如也。" 世昌曰: "拒絶倭人, 臣意極爲未便。 議得時就大臣前言之, 又屢與尙震私議, 而不敢開口也。 如對馬島則絶之, 猶或有辭, 至於大內小二殿, 則初未有可絶之罪, 自祖宗以來, 接待已久, 今若一樣拒絶, 則何如? 其所齎商物, 則處分在我, 何足患乎? 國王使臣, 自祖宗朝, 皆待以敵體, 然猶不敢違越, 宣慰使之言, 亦不齎商物。 奈何近年以來, 率皆桀驁, 貿易甚多, 以激上下之怒乎? 他餘, 則操縱在我矣。 馬島拒絶, 頗似有名, 若竝絶大內小二殿諸酋使送, 則恐連黨來寇, 爲害甚巨也。 只絶馬島, 則國王之意, 亦必以爲, 島主不能戢下, 故見絶也。" 上曰: "如大內小二殿, 似不當絶, 而不得已從衆議。 初非予本心也。"


  • 【태백산사고본】 52책 10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19책 9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외교-왜(倭)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농업-농작(農作)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과학-천기(天氣) / 신분-천인(賤人)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