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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 10월 2일 임인 8번째기사 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광필 등이 글로써 전위의 마음을 바꾸고자 간곡히 청하니 마지 못하여 청을 따르다

글로 광필 등에게 전교하기를,

"태종께서는 문무(文武)가 영명(英明)한 자품을 갖추시고 50여 세가 되도록 큰 병환이 없으셨는데도 어진 세자 【세종.】 에게 전위하였으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이는 우리 나라의 복이었다. 태종께서 전위하신 해가 무술년187) 이었는데 금년이 또한 무술년이고 내 나이 50여 세가 되었으니 사정이 같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세종태종에게 수선(受禪)하셨는데 또한 세자 【문종.】 에게 전위하신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세종께서 춘추는 50여 세였으나 즉위한 해는 30여년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세종을 본받으려 하나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네 가지 기회가 있으니 지금 바로 그때이다. 간신을 물리치고 조정이 화평하니 이것이 한 가지 기회요, 내 나이 태종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두 가지 기회요, 내가 즉위한 햇수가 세종의 33년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세 가지 기회요, 세자가 어질고 또한 장성했으며 학문이 고명하고 기질이 순수하니 이것이 네 가지 기회이다. 이 네 가지 기회는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고 바로 이 네 가지 기회를 만났으므로 감히 이런 말을 발설하는 것이니 이는 대의(大義)요 대계(大計)인 것이다.

전에 큰 종기가 나서 위험한 즈음에 이르렀을 적에도 이러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조정의 일이 중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였다. 이제는 간사한 무리들이 형을 받았는가 하면 사류(士類)들이 모두 돌아왔고 노성한 훈구(勳舊) 대신들도 또한 조정에 있으니 마치 조종조의 당당하던 시대와 같은 때이다. 내가 물러나 여생을 보내려 하나 오직 권병(權柄)만을 놓았을 뿐이지 나라 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광필 등이 글로 아뢰기를,

"예부터 제왕이 위로 하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 군신(群臣)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 만일 군신의 뜻을 물리치고 하늘의 뜻을 어긴다면 재화와 혼란이 이르게 됨은 날짜를 세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난번 간신들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국세(國勢)가 문란하여 복구가 어려울 듯했는데 요행히 전하의 어지신 통찰력을 힘입어 지체없이 복구되었으니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유신(維新)의 정치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큰 병을 겪은 뒤에 사체(四體)는 비록 완전하나 기맥(氣脈)이 위축된 것과 같아서 약을 달여 바치고 음식을 조절하여 잘 조리하더라도 수복의 연장을 알 수 없는데, 더구나 평상한 성품을 바꾸고 심지(心志)를 어지럽히고 조섭(調攝)의 도를 상실해서 명을 단축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간신을 제거한 뒤에 조정이 화평해졌다고 말씀하시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치란과 안위의 기미가 바로 오늘에 있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정사를 맡으신 이후 백성들의 뜻에 순응하고 안정하게 진압하시면서도 오히려 뜻밖의 환란이 생길까 걱정하셨는데 어찌 까닭없이 대위(大位)를 급급히 물러나 심궁(深宮)에 거처하시면서 유유하게 여생을 편히 요양하려 하십니까. 신들은 놀랍고 황송할 뿐이며 온 나라 백성은 소동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러하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고사(古史)를 두루 살펴보아도 한창 나이에 태평성시를 당하여 전하처럼 급급히 선수(禪授)하신 예는 있지 않습니다.

태종께서는 개운(開運)할 초기에 온갖 고난을 겪으셨으니 과연 정사에 싫증을 느껴 세종에게 내선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정사를 맡은 지 오래되었고 세자인 문종이 어질게 장성하셨건만 오히려 선휘할 마음을 두지 않으셨던 것은 참으로 임금 자리를 가벼이 할 수 없고 인심을 요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니 그 생각이 매우 깊었던 것입니다. 요(堯)·순(舜)은 성군(聖君)이었지만 반드시 노년의 피로함을 기다려 서로 전위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정사에 유의하실 한창 나이신데 하루아침에 싫증과 권태로운 마음이 생겨 모든 조정 신하와 의논하지 않고 환시(宦寺)를 시켜 손수 어보를 전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해 장구한 염려를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종묘 사직의 중한 부탁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을 따라 빨리 생각을 돌이켜 성명을 거두신다면 더 이상 다행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광필 등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아뢴 글을 보니 매우 절실하다. 내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어찌 조정의 일을 잊고 스스로 편하고자 해서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신하가 다 경악하니 내 마음인들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지 못하여 그대들의 청을 따르노라."

하였다.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대신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광필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당초에 아랫사람들이 놀라와 할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임금이 연소할 때 하는 일이 쇠약한 때와 다른 것이다. 의지와 기운이 쇠모해 진다면 계책과 생각이 어긋나기 때문에 어진 세자에게 전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전위하려고 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간절하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니, 광필 등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태종조의 고례를 모방하여 급급히 대계(大計)를 하신 것이나 태종조의 기회는 지금의 사정과는 같지 않습니다. 전조(前朝)188) 의 대란(大亂)의 뒤를 이어서 곧 지치(至治)를 이루어 인심이 순응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종에게 전위하신 것입니다. 세종조에 와서는 즉위하신 후에 이미 어진 세자 【문종.】 가 계셨으나 그래도 선수(禪授)하지 않았으니 어찌 뜻이 없었겠습니까. 대체로 수성(守成)189) 하는 임금이 화평한 세월을 오래 누리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교묘하게 남을 속이게 되어 법도를 제정하여도 그 즉시 없어지고 험악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다스리는 데에 더욱 힘써야 하는데 어찌 선수할 계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물러나실 때가 아니니 세종을 본받으소서."

하였다. 윤은보 이하 신하들의 아룀도 대개는 이와 같았는데, 상이 일렀다.

"조정에서 간신을 물리친 뒤로 화평한 듯하나 화평하다고 할 수 없다. 대신 등이 큰 질병의 뒤로써 비유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옳다. 마땅히 각성하여 생각해야겠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8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21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註 187]
    무술년 : 1418 태종 18년.
  • [註 188]
    전조(前朝) : 고려.
  • [註 189]
    수성(守成) : 창업한 뒤를 이어받아 지킴.

○以書記傳于光弼等曰: "太宗以文武英明之資, 五十餘歲, 尙無大病, 而傳位賢世子, 【世宗。】 豈偶然哉? 此東方之福也。 太宗傳位, 在戊戌年, 則今年亦是戊戌, 而予年亦五十餘歲, 則事非不同。 但世宗則受禪於太宗, 又傳於世子, 【文宗。】 則不亦難乎? 世宗春秋五十餘歲, 而卽位則未過三十年也。 予雖法太宗, 何居焉? 予有四機會, 正合此時。 去奸之後, 朝廷和平, 此一機也。 予年正合太宗, 此二機也。 予之卽位, 亦合於世宗三十三年, 此三機也。 世子賢且長, 學問高明, 氣質純粹, 此四機也。 此四機, 難逢也。 予少無一毫他意, 而正合四機, 故敢發此論, 此大義大計也。 發大瘇幾危之際, 不無此念, 而朝廷之事爲重, 故未果也。 今則奸黨伏罪, 士類皆還, 老成勳舊, 亦在朝廷, 正如祖宗朝堂堂之時矣。 予雖退養餘年, 只解權柄而已, 國事豈可忘哉?" 光弼等書啓曰: "自古帝王, 莫不上順天意, 下〔循〕 群情。 若拂輿情而違天意, 則禍亂之至, 可指日而待。 曩者奸臣亂政, 國勢頹靡, 將不可復救。 幸賴睿鑑洞照, 不遠而復, 群情胥悅, 顒望維新之治, 然如大病之餘, 四體雖存, 氣脈萎薾。 將進藥餌, 節飮食以調護之, 其延長壽福, 未可知也, 而況移易其常性, 拂亂其心志, 失其調攝而促之哉? 殿下雖曰去奸後朝廷和平, 而臣等以爲, 治亂安危之機, 正在今日。 殿下當事之來, 而應之以順, 鎭之以靜, 猶恐意外之患, 生於不虞之中。 奈何無故, 而遽遜大位, 退處深宮, 以爲優游逸養之計乎? 臣等驚惶, 擧國騷動。 人心至此, 天意可知。 臣等歷觀古史, 亦未有中身之年, 當大平盛時, 急於禪受, 如殿下所爲也。 我太宗開運之初, 備歷艱難, 果厭萬機, 內禪世宗世宗享國日久, 又有世子賢長如文宗, 尙未有禪位之心, 誠以天位不可輕, 而人心不可搖, 其爲慮深矣。 以聖相傳, 必待於耄期倦勤。 殿下以中身之年, 當大有爲之時, 一日之內, 遂有厭怠之心, 不謀諸朝廷, 而遽使宦寺, 手傳大寶。 此豈爲國長遠之慮乎? 伏願殿下, 上思宗社付畀之重, 下循臣民激切之情, 亟回聖志, 以收成命, 不勝幸甚。" 傳于光弼等曰: "今觀所啓之辭, 至切。 予雖不穀, 豈忘於朝廷之事, 欲爲自便乎? 然群情大駭, 予亦心豈安乎? 以是勉從群情焉。" 上出御宣政殿, 引見大臣等。 上顧謂光弼等曰: "當初非不知下情之駭愕也。 人君年少時所爲, 與衰年異矣。 若志氣衰耗, 則計慮舛錯, 故欲傳位於賢世子矣。 然雖欲傳位, 廷議甚切, 故不得爲之矣。" 光弼曰: "上欲倣太宗朝古例, 遽爲大計, 但太宗朝機會, 則與今時不同。 乘前朝大亂之後, 而乃見至治, 人心莫不歸順。 以此傳位於世宗矣。 世宗朝則卽位之後, 已有賢世子, 【文宗。】 而猶未禪授, 豈無其意? 大抵守成之君, 昇平日久, 則人心巧詐, 法立而隨毁, 多有險惡之事矣。 固當益勉其爲治之心, 何有禪授之計乎? 今時則不可爲也, 請法世宗。" 殷輔以下諸臣等啓, 大槪皆同。 上曰: "朝廷去奸後, 雖似和平, 然不可謂和平也。 大臣等, 以大病之後喩之, 此言甚切。 當省念也。"


  • 【태백산사고본】 45책 8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21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