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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84권, 중종 32년 4월 30일 무인 4번째기사 1537년 명 가정(嘉靖) 16년

반송사 정사룡이 복명하여 천사들의 행적을 아뢰다

반송사(伴酥使) 정사룡이 와서 복명하니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였다. 정사룡이 아뢰기를,

"천사가 이달 8일 강을 건널 때에 각각 서계(書契) 한 통씩을 지어 신으로 하여금 계달하게 했습니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들이 조서를 받들고 여기에 오자 전하께서 우리들의 접대에 성의와 공경을 다하셨기에 감사함을 견디지 못하겠다.’하고, 또 ‘오랜 동안 이 땅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는 말을 들어오다가 이번에 흠차(欽差)를 받고 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전하께서만 성의와 공경을 다하여 예우가 극진한 것이 아니라, 온갖 집사들에서부터 아래로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까지 성의와 공경을 다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만 위해서겠는가. 지성으로 사대하여 우리 조정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평소에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여기에 와 있어도 우리 고향에 있는 것같아 도무지 딴 지역이란 생각이 안들었다. 우리들이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이런 뜻을 주문하겠다.’ 하였습니다. 작별에 임해서는 간곡하게 이별을 애석해하는 기색을 하며 두 사신이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상사가 더욱 많이 흘려 두 눈이 모두 붉어졌습니다. 작별할 적에 상사가 신에게 ‘취병산기(翠屛山記)는 돌에 새기어 세워 달라.’ 하기에, 신이 ‘대인의 뜻대로 전하께 아뢰겠다.’고 하니, 또 ‘우리들의 글이 옛 사람만은 못하지만 이때를 인연하여 동쪽 땅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만으로도 족하니, 비를 세운 다음에 두어장을 찍어내어 우리에게 보내준다면 이를 보고서 비를 세운 것으로 믿겠다.’ 하고, 또 부벽루(浮碧樓) 앞의 암석에 상사가 쓴 제명기(題名記)도 역시 새기고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신이 돌아오다 평양에 이르러 감사 이귀령(李龜齡)에게 묻자 ‘암석이 떨어져나가 새길 수 없기에 목판에다 모방해서 새기어 부벽루에다 걸었다.’고 하며, 찍어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이 보았는데, 암석에 쓴 글자와 너무도 같지 않아, 천사가 보면 암석에 새기지 않은 것임을 알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비록 암석에는 새기지 못하더라도 딴 돌에다 새기어 암석을 파고서 넣어 놓으면 합당할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딴 돌을 가져다가 새기는 것이 무방하겠다. 취병산의 비는 이미 세웠는가?"

하니, 정사룡이 아뢰기를,

"아직 세우지 못했습니다. 황해도 관찰사 이억손(李億孫)이 신에게 ‘군사들이 없어 아직 돌을 캐지 못했으므로 수군(水軍)을 계청(啓請)하여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상사가 ‘내가 동선생 월(董先生越)《조선부(朝鮮賦)》에 의거하여 요동에서 《속조선부(續朝鮮賦)》를 지어서 경사에 들아가면 즉시 인출하여 보내겠다.’ 하고, 또 ‘《황화집(皇華集)》을 어떻게 우리에게 보내주려는가?’ 하기에, 신이 ‘천사 당고(唐皐)가 여기 왔을 적에 「내가 돌아가고 나면 당신의 나라 사람들이 나를 방문하여 서로 통할 수 없다.」고 하므로 《황화집》을 전해 주기 어려웠었는데, 제독 주사(提督主事)를 통하여 겨우 전해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천사가 ‘황제께서 조선(朝鮮)을 중하게 여기시어 한집처럼 보시는데 어찌 내지와 외지의 차이가 있어 서로 통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우리들의 집으로 전해 주어도 된다.’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한 번 작별한 다음에는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니 사람들의 내왕을 이용하여 서신을 보내 달라.’ 하기에, 신이 ‘외국 사람이 어찌 감히 대인들께 서신을 보낼 수 있겠느냐.’ 하니, 천사가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이번의 천사는 지은 글이 매우 많아서 찬록(纂錄)할 적에 해서(楷書)로 쓰지도 못하였고 3권으로 나누었으나 장수가 많으므로 만일 인출한다면 나누어진 권 수가 많을 것입니다. 신이 천사에게 ‘우리 전하께서 황제의 은덕을 공경스럽게 받으시며 이를 큰 경사로 여기어 장차 별시(別試)를 보여 인재를 뽑고 군신(群臣)들에게 큰 잔치를 내리려고 한다.’ 하니, 천사가 ‘훌륭한 예식이다. 우리가 조정에 돌아가면 마땅히 이런 뜻을 주문하여 천하가 모두 현명하신 왕의 훌륭한 덕을 알게 하겠다.’ 하고, 이어 서계(書契)를 만들어 탄미하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신이 그 서계를 보니, 상사는 포흠(逋欠)을 감해준다는 등의 말까지 언급하였고, 부사는 형벌을 감해준다는 말 등을 언급했습니다. 신은 다만 별시를 보이고 군신들에게 잔치를 내린다는 말만 했는데, 천사들의 서계에는 이 몇 마디 말을 아울러 썼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이는 모두 중국 조정의 반사(頒赦)하는 글에 으레 있는 말로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기 때문에 아울러 언급한 것인 듯싶습니다. 또 천사가 시를 지어 나누어 주는 것을 큰 일을 삼았었는데, 의주(義州)에서 오래 머무르게 된 까닭도 역시 시를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를 다 지어 나누어 줄 때 신에게 일행의 관원들과 아래로 통사들까지 자(字)를 모두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우리 나라의 풍속은 존장의 앞에도 감히 자를 쓰지 않는다.’고 사양하니, 천사가 굳이 청하므로 사양하다가 되지 않아 열명(列名)해서 주었습니다. 천사가 각 사람에게 준 시에 모두 그들의 자를 썼기에, 신도 그 신의 초고를 쓸 적에 그가 쓴 것에 따라 그들의 자도 아울러 썼습니다. 그러나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기에 조정에다 질정하여 고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통사 홍겸(洪謙)에게 준 시에는 어휘(御諱)를 운자(韻字)로 하였으므로 매우 온당치 못하기에 그 운자도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통사 차윤성(車允成)은 통사 송희온(宋希溫)대신 들어간 사람인데, 그에게 준 글에 ‘처음에 압록강 머리에서 맞이했다.[初迎鴨綠江頭]’고 했습니다. 이는 긴요한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중국 조정 사람들이 보고서 천사가 우리 나라에 올 적이면 통사를 많이 배정하여 국경 위에서 맞이하는 것으로 여겨 정해진 예로 삼는다면 부당할 듯하니, 차윤성에게 준 절구는 삭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문 학관(吏文學官) 어숙권(魚叔權)은 일로에서 수행할 적에 ‘학관’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천사들이 학교의 관원으로 잘못 알고 어숙권에게 준 시에, 교회(敎誨)하여 인재를 만드는 일을 많이 말했습니다. 이는 명칭과 실지에 있어서 서로 맞지 않으니, 이 시도 역시 삭제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들이 함부로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품합니다. 이전의 천사들은 지은 글을 모두 자신들이 손수 썼기 때문에 홍문관이 으레 거두어 모아 법첩에 붙히어 간수하였는데, 이번의 천사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상사는 손수 쓴 것이 겨우 두어 장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랫사람을 시켜 썼으며, 부사는 한 장도 손수 쓴 것이 없습니다. 천사가 서울에 있을 적에 벼루를 요구하기에 각자에게 큰 것과 작은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돌아갈 때에도 전하께서 하나씩을 더 주라고 하셨으므로 신이 주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황화집》을 인출할 적에 가감하고 개정하는 일은 대제학에게 【김안로임.】 질정하여 하라. 두 사신에게 큰 벼루와 작은 벼루를 각각 하나씩 주고서 천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벼루는 돌아가면 세 각로(閣老)에게 주려고 한다기에 각각 세 개씩을 준 것이다."

하였다. 정사룡이 아뢰기를,

"천사가 신에게 ‘우리가 이곳에 나올 때에 고관들이 그대 나라의 영롱연(玲瓏硯)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더 구하여 돌아가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한다.’고 하기에, 신이 평안도 관찰사 【이귀령(李龜齡).】 에게 물어보니 ‘도내에 마침 저장해 놓은 벼루가 있다.’하므로 신이 얻어서 주었습니다. 그 뒤에 천사가 또 집에서 쓸 벼루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신이 천사에게 사은사가 갈 적에 부쳐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신이 천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상사가 각로(閣老) 하언(夏言)과 사이가 좋은 듯하였습니다. 상사가 ‘내가 나올 때에 하 각로가 작별하면서 준 시에 조선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라고 더없이 칭찬하면서 「그대들이 조서를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했는데, 그 시를 요동에 두고 와서 보여주지 못한다.’ 하고, 또 ‘하 각로는 예부 상서로 있다가 지난해 윤 12월에 각로로 승진하였는데, 황제가 매우 중히 여겨 은총이 융숭하다. 각로는 글씨를 잘 써 천하에 으뜸이며 장여필(張汝弼)의 필법과 같이 아름답고 명성도 나란하다. 만일 조선에서 그의 글씨를 주청한다면 황제께서 반드시 각로의 이름이 천하에 퍼지는 것을 기뻐하여 윤허할 것이고, 각로는 역시 자기의 필법이 외국에서 중시되는 것이 기뻐서 당신 나라에 특별한 성의를 보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우리 전하께서 유자(儒者)의 글씨를 모두 좋아한다. 지난번에는 중국에 《문원영화(文苑英華)》라는 책이 있음을 듣고, 우리 나라에는 없는 책이므로 많은 돈을 주고 한 질을 사왔는데, 모두 오자(誤字)와 착간(錯簡) 투성이므로 인출하지 못하였다.’ 하니, 천사가 ‘그 책은 많이 없다. 앞서 운남(雲南)에 한 질이 있으므로 조정에서 은 13냥을 주고 사왔으니, 당신네 나라에서 주청한다면 얻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날에 예부의 손(孫) 낭중이 서책을 우리 나라 사람과 교역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요사이는 북경에 가는 사람들이 한 권의 책도 구해 오지 못하는데, 지금 어떻게 주청하겠습니까.’ 하니, 천사가 ‘지금은 손 낭중이 죄를 받아 외방으로 쫓겨나고 진(陳) 낭중이 주관하는데, 진 낭중은 기상이 너그럽고 순후하여 손 낭중과 같지 않다. 또 진 낭중은 우리와 같은 고을의 한 마을에 사는 친구로서 교분이 매우 두터우므로 우리들이 당신의 나라를 위해 힘써 옹호한다면 반드시 그전의 손 낭중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번 천사의 기상을 보건대 간격이 없는 듯하여, 묻는 것은 반드시 모두 말하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항(許沆)도 ‘알기 어려운 옛일을 물어보면 묻는 대로 모두 대답을 해주고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하였는데, 정사룡이 아뢰었다.

"고사라도 묻기만 하면 모두 말해 주었습니다. 다만 역관 중에 중국 말에 정통한 자가 없어서 역관을 통하여 묻는 말을 전하기는 어려웠고, 글로 써서 보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역관은 있지만 물을 수가 없었고 비록 묻더라도 자세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상사의 성품은 정교하여 기예(技藝)같은 잡술에서 음식 만드는 법까지 그 묘미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또 이황(蜊蝗) 【세속의 이른바 석화(石花)이다.】 구워 먹는 법을 손수 써서 신에게 주며 계달하도록 했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84권 74장 A면【국편영인본】 18책 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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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명(明) / 출판-인쇄(印刷)

    ○伴送使鄭士龍來復命, 上引見于思政殿士龍曰: "天使於今月初八日越江時, 兩使各修書契一道, 令臣啓達, 仍曰: ‘俺等擎詔來此, 殿下接待俺等, 極致誠敬, 不勝多謝。’ 又曰: ‘久聞此地, 爲守禮之邦, 今承欽差, 親自見之, 果然。 非但殿下致誠敬盡禮也, 自百執事, 下至奔走服役者, 莫不極其誠敬。 此豈爲俺等乎? 至誠事大, 敬慕朝廷, 有素而然也。 俺等來此, 如在吾家鄕, 頓無異土之念也。 俺還朝廷, 當奏聞此意也。’ 臨別, 頗有繾綣惜別之色, 兩使皆垂淚, 而上使泣下最多, 兩眼盡赤。 臨別, 上使謂臣曰: ‘翠屛山記, 須刻石立之。’ 臣答曰: ‘當以大人之意, 啓于殿下。’ 又曰: ‘俺之文, 則不得如故人矣, 特因時而留名于東土足矣。 立碑之後, 打出數本, (勿)〔而〕 寄俺等, 見此以驗其立碑。’ 云。 浮碧樓前巖石, 上使所書題名記, 亦令刻之打送云, 臣還到平壤, 問于監司李龜齡則曰: ‘巖石剝落, 刻之不得。 模刻於木板, 掛於浮碧樓。’ 云, 因出印本示臣。 臣見之, 大不似石字。 天使見之, 則必知其不刻於石矣。 臣意以爲, 巖上雖不可刻, 若刻於他石, 鑿而納之則似當。" 上曰: "取他石而刻之不妨。 翠屛山碑, 已立之乎?" 士龍曰: "時未立也。 黃海道觀察使李億孫謂臣曰: ‘無軍人, 時未伐石。 將欲啓請水軍而爲之也。’ 云。 上使曰: ‘俺依董先生 《朝鮮賦》, 而作續朝鮮賦於遼東, 入京師印送。’ 云。 又曰: ‘《皇華集》, 何以傳於俺等乎?’ 臣答曰: ‘唐天使 【皋】 來此曰: 「俺之還也, 爾國人, 毋得問俺相通。」 云, 故《皇華集》亦難於傳呈, 因提督主事, 僅得傳之, 今不知何以傳呈也。’ 天使曰: ‘皇帝重朝鮮, 視同一家。 有何間於內外, 而不得相通乎? 直傳於俺等之家可也。’ 又謂臣曰: ‘一別之後, 再見則難, 因人之來, 幸通書信。’ 臣曰: ‘外國人, 何敢通問於大人乎?’ 天使曰: ‘固無傷也。’ 此天使所製甚多, 故纂錄時, 不得楷書, 雖分三卷, 張數甚多。 若至印出, 則分卷必多矣。 臣謂天使曰: ‘我殿下敬戴皇恩, 以是爲大慶, 將欲別試取人, 大享群臣。’ 云, 天使曰: ‘盛禮也。 俺等還朝廷, 當奏聞此意, 使天下咸知賢王盛德。’ 因修書契, 以致歎美之意。 臣竊見其書契, 上使則幷及蠲釋逋負等語, 副使則幷及省刑等語。 臣但言設別擧, 宴群臣等事, 而天使書契, 竝此數語, 不知其何意也。 疑是皆中朝赦文等例語, 而以是爲美事, 故竝及之也。 且天使以製詩分贈, 爲大事。 其所以久留於義州者, 亦爲製詩也。 及其製畢, 將分贈之時, 令臣盡書一行官人, 下至通事之字以來云。 臣辭以國俗, 若於尊前, 不敢書字。 天使强之, 臣辭不得, 列錄以呈。 天使於各人贈詩, 皆書其字。 臣錄其草藁時, 隨其所書, 幷其字書之矣, 然甚未安, 思欲質於朝廷, 而改之也。 且贈通事洪謙詩, 以御諱押韻, 至爲未安, 亦欲改其韻字也。 通事車允成, 以通事宋希溫之代, 入去, 而其贈詞, 稱 ‘初迎鴨綠江頭’ 云。 此非緊關之事, 然中朝人見之, 以爲天使之來, 我國以多定通事, 迎候境上, 爲定例也, 則似爲不當。 削去贈允成絶句何如? 吏文學官魚叔權, 於一路隨行時, 以學官稱號, 故天使誤認爲學校之官, 贈叔權詩, 盛稱敎誨作人等事。 此於名實, 殊不相稱, 此詩亦可削去也。 然此非臣等擅便, 故敢啓稟。 前時天使, 凡所著述, 皆其手書, 故弘文館, 例爲收聚, 付于法帖而藏之, 此天使則不然, 唯上使所(白)〔自〕 手書, 謹數紙, 而其餘皆令下人書之, 副使則無一紙自書者。 天使在京時求硯, 故各贈大小硯各一面。 及回還時, 命各加贈一面, 故臣謹以贈之也。" 上曰: "《皇華集》印出時, 其加減改正等事, 質正于大提學, 【金安老】 而爲之可也。 兩使處, 各贈大小硯各一面, 而聞天使言, 欲以硯歸贈三閣老, 故各贈三面耳。" 士龍曰: "天使語臣曰: ‘俺等出來時, 達官多求爾國玲瓏硯, 欲加得以還, 以副其求。’ 云, 臣問于平安道觀察使, 【李龜齡】 道內適有藏硯, 臣求而贈之也。 其後天使, 又求造家硯, 臣與天使, 約上恩使歸時付送。 臣聞天使之言, 上使與夏閣老 【言】 相善也。 上使言: ‘俺之來也, 夏閣老贈別詩, 盛稱朝鮮守禮之邦, 君等擎詔以歸, 豈不美乎? 云。 但以其詩, 置諸遼東而來, 故不得相示。’ 天使又曰: ‘夏閣老以禮部尙書, 乃於前歲閏十二月, 陞爲閣老, 皇帝甚重之, 寵遇隆洽矣。 閣老善書, 甲於天下, 可與張汝弼之筆法, 麗美而齊名矣。 朝鮮若奏請其書, 則皇帝必喜閣老之名, 聞於天下而許之, 閣老亦喜其筆法, 見重於外國, 而別有殊眷於爾國也。’ 臣曰: ‘我殿下於儒書, 無不好之。 頃聞中朝有書, 名曰《文苑英華》云, 而我國未嘗有, 故重購一本而來, 皆是誤字錯簡, 不得印行也。’ 天使曰: ‘此書果不多有。 前於雲南有一本, 朝廷以銀十三兩, 貿之而來。 爾國若爲奏請, 則可得矣。’ 臣曰: ‘前日禮部孫郞中, 禁以書冊與我國人交易, 故近來赴京者, 不得一書而來。 今何以奏請乎?’ 天使曰: ‘今則孫郞中得罪貶外, 而有陳郞中者主之。 今之陳郞中, 其氣象寬厚, 大不似孫郞中矣。 且陳郞中, 與俺等爲同鄕同里之友, 交道甚密。 俺等爲爾國力護之, 則必不復如之所爲也。’ 大抵觀此, 天使之氣, 似無城府, 凡有所問, 則必極陳無隱矣。" 上曰: "許沆亦曰: ‘問古事之難解者, 則隨問隨答, 盡言無隱也。’" 士龍曰: "雖古事, 問之則無不言之矣, 但譯官, 無有精於華語者, 故固難於憑譯傳問, 亦不可以書示。 是以有(護)〔譯〕 而不得問, 雖問而不得詳也。 大抵上使之性稟精巧, 如技藝雜術, 至於飮食之法, 皆得其妙也。 且自書其蜊蝗 【俗所謂石花也。】 煮食之法, 付臣使之啓達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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