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4일 갑술 2번째기사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대사헌 이항이 현량과의 혁파와 안당·최숙생 등에 대해 아뢰다

대간 전원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양사(兩司)의 장관에게 명하여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항(李沆)이 아뢰기를,

"요전 승전(承傳)에 ‘청선(淸選)의 중임(重任)은 한두 자급(資級)이 모자라더라도 차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발탁해 쓰라.’ 하셨으므로 근래 관직이 외람되니, 조종(祖宗)의 구법대로 날짜를 계산해서 사일(仕日)을 주고 외람되게 제수된 자는 모두 개정하소서. 근래 조광조 등이 붕비(朋比)를 맺고 조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온 나라 안이 다 마음아파 하였으니, 죄를 정한 까닭이 아래에서 아뢰었기 때문이건 위에서 나왔건 다 광명정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외(中外)에서 그 연유를 모르고 ’상께서 밀지(密旨)가 계셨다.’고도 하고 ‘대신이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 아뢰었다.’고도 하니 조정(朝廷)의 일이 이처럼 애매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현량과(賢良科)는 부득이 혁파해야 합니다. 당초에 듣건대, 김식(金湜)은 급제한 자가 아니건만 저들이 다 끌어들여서 경연관(經筵官) 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하고자 하였으나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현량과라는 명목으로 저희가 아는 자들만을 뽑아서 시험하되 그 사람들의 이름 밑에 ‘경제(經濟)가 유여(裕餘)하다.’ 느니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 느니 주를 달았다 합니다. 대저 경제가 유여하다는 것은 능히 성인 지위에 도달한 자라야 그런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경제가 유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도 성인 지위인 사람입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오직 안자(顔子)한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자유(子游)·자하(子夏)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저런 자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 임금을 속인 것이며 그 나머지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능히 깨달으시면 쾌히 결단하여 혁파해야 하고 이렇게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안당(安瑭)·최숙생(崔淑生)·이자(李耔)·유용근(柳庸謹)·신광한(申光漢)·정순붕(鄭順朋)·한충(韓忠)·정은(鄭譍)·최산두(崔山斗)·장옥(張玉)·이희민(李希閔)·이청(李淸)·양팽손(梁彭孫)·구수복(具壽福)·정완(鄭浣)·이연경(李延慶)·이약빙(李若氷)·권전(權磌)·파릉군(巴陵君) 이경(李璥)·시산 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숭선 부정(嵩善副正) 이총(李灇)·장성수(長城守) 이엄(李儼)·강녕 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 등 23인의 이름을 열거해 써서 아뢰기를,

"이는 다 박세희(朴世熹) 등과 같은 자들로 조광조와 붕비를 맺고 서로 한 집에서 잤으며, 정사(政事) 때의 의망(擬望)하는 것과 논박하는 것을 다 사론(私論)에서 예정하여 요란하기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그 죄를 같이하지 않으면 저 죄받은 자들도 마음이 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광조에게 붙은 자가 역시 많으나, 이것은 그 중에서 심한 자를 뽑아 적은 것일 뿐입니다. 죄받은 자들과 그 죄를 같게 하소서. 또 안당·최숙생은 나이가 이 사람들과는 같지 않고 교결(交結)한 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안당은 처음으로 정승이 될 때에 재상들이 공천한 것이 아니라 자제로 인연해서 저들과 교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최숙생은 한 해 안에 초천(超遷)하여 숭정(崇政)에 이르렀으니 그 사이에 간사한 일이 없었겠습니까? 박세희의 죄보다 한 등을 낮추어서 죄주소서. 또 종친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것인데, 시산 부정 등은 조사(朝士)와 교통하고 또 동류(同類)의 말을 들어 상소까지 하였는데, 그 소의 뜻도 매우 그르며 공론이 아닙니다. 【이성언(李誠彦)을 죄주려던 상소이다.】파릉군조광조 등이 죄받던 날 종친부(宗親府)에 가서 종친을 죄다 모아서 아뢰어 구제하려다가 못하고 또 궐정(闕庭)에 나아가 한 밤에 무리로 모여서 아뢰어 구제하려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저들과 그 죄를 같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박영(朴英)의 가자(加資)를 개정하소서. 올 가을 별시(別試)도 혁파해야 하나 지금 시관(試官)을 추고하는 중이므로 추고를 끝낸 뒤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청선의 중임은 차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발탁해 쓰라는 승전은 다시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조광조 등이 한 일은 상하가 다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 것이라 하며 대신이 발론하려 하나 능히 하지 못하므로, 깊은 밤이기는 하나 특별히 서문을 열게 하고 병조(兵曹)의 입직한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일을 맡게 한 것이다. 어두운 밤에 하였으므로 부당한 듯은 하나 부득이한 때문이었다. 또 조광조 등이 이토록 극심하기에 이르렀는데도 대신이 일찍이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매우 옳지 않다."

하고, 드디어 황이옥(黃李沃)의 상소를 이항 등에게 주고 이르기를,

"유생(儒生)의 소의 뜻이 이러하다. 조정에 공론이 있다면 유생이 상소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유생은 조광조의 죄를 분명히 바루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한 것이나, 그 말대로 저들의 죄를 결단하면 지나칠 것이다."

하매, 이항이 아뢰기를,

"무릇 일에 있어서 우유(優游)하여 사정(邪正)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이미 옳지 않거니와 구태여 지나치게 강단(剛斷)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저들의 죄는 법대로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으나, 조사를 대우하는 도리를 그렇게 하는 것은 조종조에서 없던 일이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유생의 말이 지나치니 좇아서는 안 되며, 임금께서 짐작해서 하셔야 합니다. 또 조광조가 대사헌에 제배된 이래로 소민(小民)으로서 법금(法禁)을 범한 자는 모두 버려 두어 구차하게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이는 도리를 어기고 명예를 구한 것이므로 그 마음쓰는 것이 간사합니다. 김정시인(猜忍)710) 하고 우혹(愚惑)하며, 김식은 잔혹하고 각박합니다. 신이 듣건대, 김식은 강변에 사는 사람이 조사(朝士)에 의지하여 폐단을 부린다 하여 형조(刑曹)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여 한 집의 5인이 다 죽게 하였으니 잔혹하기가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율문(律文)대로 죄주어도 아까울 것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죄가 크니, 처음에는 율문대로 죄주어도 아까울 것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짐작해서 하였다. 율문대로 한다면 조정에서 조사를 대우하는 데에 불가한 바가 있어서 한때의 해가 될 뿐 아니라 혹 후세에 폐단을 끼치게도 될 것이므로, 저렇게만 하고 말았다. 큰 무리의 도둑을 다스리더라도 그 무리를 죄다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옛 사람도 이르기를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근자에 조정과 인심도 거의 안정되었고 조광조 등은 이미 다 죄를 다스렸으니, 이런 사람들을 죄다 다스릴 수는 없다." 【안당 등 23인을 가리킨 것이다.】

하매, 대사간 이빈(李蘋)이 이뢰기를,

"송(宋)나라가 위망(危亡)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인후(仁厚)만 넉넉하고 강단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임금께서는 강단으로 조처하소서. 지금 만약에 잡목[荊榛]을 가리지 않고 뒤섞여 있게 하면 유위(有爲)하고자 하는 조사가 안심하지 못할 것이니, 임금께서 멀리 염려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지금 시비의 논의를 상께서 정하지 않으시므로 대신들도 의논을 정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왕안석(王安石)이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그 마음은 본디 저러한 짓을 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채경(蔡京)의 무리가 어지러이 화창(和唱)하여 문란하게 된 것이므로, 예전에 역사를 만든 사람은 안석을 열전(列傳)에 썼습니다. 지금 조광조 등도 그 마음은 본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이 무리가 어지럽게 하여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모두 죄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안당 등의 일은 대신과 의논해야 하겠으나, 그 죄를 죄다 다스릴 수는 없다."

하매, 이빈이 아뢰기를,

"만약에 이 무리가 무슨 짓을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큰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쾌히 결단하시면 대신들의 의논도 정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99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註 710]
    시인(猜忍) : 시기가 많고 잔인함.

○臺諫全數詣闕, 上命兩司長官, 入對于便殿。 大司憲李沆曰: "前此承傳, 有淸選重任, 則雖一二資不足, 不次擢用, 故近來官職猥濫。 請依祖宗舊章, 計日給仕, 而其所濫授者, 竝皆改正。 近來趙光祖等, 交相朋比, 紊亂朝政, 一國皆痛心。 其所以定罪, 雖自下啓之, 或自上發之, 皆光明正大事也, 中外不知所由, 或云自上有密旨, 或云大臣自神武門啓之。 朝廷事, 不可如是黤昧, 使人不曉也。 且賢良科, 不得已罷之可也。 初聞金湜, 雖非及第, 彼類皆欲引以爲經筵官與大司成, 而非祖宗之法, 故名爲賢良科, 只取其所識者以試, 而題其人之名下曰經濟裕餘, 曰學問淵源。 夫經濟裕餘云者, 乃能到聖人地位者然也。 博施濟衆, 雖不能焉, 如是之人, 豈可謂之經濟裕餘乎? 且學問淵源者, 亦聖人地位人也。 孔門弟子, 唯顔子一人當之, 雖, 不能焉。 況如彼者豈能之乎? 此皆罔上者也, 而其他皆類此。 上能覺悟, 則快斷以罷, 不可若是留難也。" 又列書安瑭崔淑生李耔柳庸謹申光漢鄭順朋韓忠鄭譍崔山斗張玉李希閔李淸梁彭孫具壽福浣、李延慶李若氷權磌巴陵君 詩山副正 正叔嵩善副正 長城守 江寧副正 二十三人名以啓曰: "此皆朴世熹等類也。 與趙光祖交相朋比, 相投宿于家, 及其政事時, 其所擬望與論駁, 皆自私論預定, 使至擾亂。 若不同其罪, 則彼被罪者, 亦不得便心矣。 附會光祖者亦多, 此特抄其甚者耳。 請與被罪者, 同其罪。 且安瑭崔淑生, 其年歲與此人等, 不相等而又非交結者也。 然初入相時, 非宰相公薦, 乃因子弟, 交通彼類以得之。 淑生, 一歲中, 超遷至崇政, 其間豈無邪慝之事也? 請下世熹罪一等罪之。 且宗親不得干預朝政, 而詩山副正等, 交通朝士, 且聽同類之言, 乃至上疏之意, 亦甚非矣, 非公論也。 【欲加罪李誠彦之疏。】巴陵君, 當光祖等被罪之日, 詣宗親府, 盡會宗親, 而欲啓救之不得, 又詣闕庭, 夜半群聚, 欲啓救之, 甚可驚愕。 請與彼類同其罪。" 又曰: "朴英加資, 請改正。 今秋別試, 亦可罷也, 但今方推考試官, 畢推後, 當更啓。" 上曰: "淸選重任, 不次擢用承傳, 勿復擧行可也。 趙光祖等所爲之事, 上下皆以爲濁亂朝政, 大臣雖欲發之, 有不能焉, 故雖其夜深, 而特令開西門, 命兵曹入直堂上任事耳。 雖昏夜爲之, 似若不當, 然乃所〔以〕 不得已者也。 且光祖等, 至於此極, 大臣不早矯之以正, 此又大不可也。" 遂以黃李沃等上疏, 授等曰: "儒生疏意若此。 若朝廷有公論, 則儒生不必上疏矣。 此儒以不得明正光祖等之罪, 故若是爾。 然如其所言, 以斷彼等之罪則過矣。" 曰: "凡事優游而不辨邪正, 旣不可矣, 又敢爲過剛, 亦不可也。 彼等之罪, 如以法, 則雖如此可矣, 然待士之道若此者, 自祖宗朝所無之事也, 上之卽位以來, 亦無是事。 儒生之言過矣, 不可從也。 自上斟酌爲之, 可也。 且光祖自拜大司憲以來, 小民之犯禁者, 一皆捨之, 苟悅其心。 此違道干譽之人, 其用心奸詐。 金凈則猜忍愚惑, 金湜, 則殘酷深刻。 臣聞金湜, 以其江邊居人, 爲依朝士作弊, 捉致刑曹, 使之訊鞫, 一家內五人皆死, 殘酷莫甚。 以此視之, 則雖以律罪之, 不足惜也。" 上曰: "其罪大矣。 初以爲以律罪之, 亦不足惜也, 然斟酌爲之。 若以律, 則朝廷待士, 有所不可, 而非徒一時之害也, 或貽後世之弊, 故如彼而止。 雖治大黨之盜, 猶不可盡治其類。 古人亦曰: ‘脅從罔治。’ 近者朝廷及人心, 亦幾安靜。 光祖等旣皆治罪, 不可盡治此人之類也。" 【指安瑭等二十三人。】 大司諫李蘋曰: "之危亡, 專由仁厚有餘, 而剛斷不足。 願上須以剛斷處之。 今若不分荊榛而雜處, 則凡士之欲有爲者, 不得安其心, 須自上遠慮而處之。 今是非之論, 自上不定, 故大臣亦不能定其議也。 昔王安石, 初不爲誤國之計也, 其心本不欲如彼之所爲也, 蔡京之輩, 紛紜和倡, 以至於亂, 故古之爲史者, 以安石書於列傳。 今光祖等, 其心本不欲若是也, 此輩紛紜, 終至若此也。 請皆罪之。" 上曰: "安瑭等事, 當與大臣議之, 然不可盡治其罪也。" 曰: "若以此輩爲何能爲, 而不治其罪, 則後必有大事也。 若自上快斷, 則大臣之議, 亦可定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37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99면
  •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