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공이 도당에 합좌하여 국정을 의논하도록 간한 홍문관의 차자
홍문관 부제학 조원기(趙元紀)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대전(大典)》을 상고하니 정부(政府)의 직책을 서술하여 이르기를 ‘백관을 총괄하고 서정(庶政)을 공평하게 하고, 음양을 다스리고 방국(邦國)을 경영한다.’ 하였습니다. 옛적에 재상에게 맡긴 것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서사(署事)318) 는 비록 폐지되었다 할지라도 직책을 맡긴 뜻은 오히려 남아 있어, 규모와 체통을 또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는 관여하여 결재하지 못하나, 무릇 시행하여 조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부에 보고하고, 제비(除批)가 내리면 또한 곧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은 국정의 득실(得失)과 인재의 승출(陞黜)을 정부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려는 것인데, 그것도 그럭저럭 폐이(廢弛)하여 정부에 앉아 있는 날이 없어서 드디어 정부를 일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저 지위가 있으면 반드시 직책이 있고, 직책이 있으면 반드시 일이 있는 것인데, 지금 삼공(三公)은 구차스럽게 이러한 폐습에 따라 사제(私第)에 물러가 거처하면서 맡은 일이 없는 것처럼 하며, 자문(諮問)하는 일이 없으면 참여하여 듣지 못하고, 혹 듣는 것이 있더라도 항상 남보다 뒤에 알게 됩니다. 만일 의견을 아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요속(僚屬)을 왕복시키므로 피차의 말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이는 나라를 도모하고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요, 조종(祖宗)이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주는 중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대저 국가의 일은 무궁하고 한 사람의 지식은 한정이 있습니다. 정부에 나아가 의논에 참여하여 심사 숙고(深思熟考)하더라도 오히려 미진할까 두려운데, 더구나 멀리서 묻고 범연하게 의논하니 어찌 사의(事宜)를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나라의 법을 밝게 거행하여 맡은바 직책을 수행하고, 날마다 도당(都堂)에 나아가 국정을 논의하게 하면, 조종의 재상을 임명하는 뜻에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또 나라에 큰일이 있어서 반드시 널리 물어야 할 것이라면 정의(廷議)를 열어야 합니다마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궐정(闕庭)에 모여 의논하고 혹은 그 집에 가서 자문하면, 하룻저녁이나 잠깐 동안에 어찌 능히 그 지혜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의(疑議)가 있으면 반드시 정부에 내려서,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상의해서 품달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체(事體)에 합당합니다. 근래 간원(諫院)의 논계로 인하여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정부는 자기에게 혐의쩍은 일이므로, 대답하는 형적(形跡)만을 남기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간원의 상소에 이르기를 ‘무릇 의득(議得)할 일이 있으면 정부에서 하소서.’ 하기에 내가 이로써 대신에게 물었더니, 대신이 ‘정부에서 합좌(合坐)하여 의논하는 일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없던 일이니, 이제 와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므로, 나도 또한 반드시 정부에서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차자를 보니 또한 그러하다. 물론(物論)이 이미 이와 같고 또 사체에도 합당하니, 《대전》에 따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 차자를 두루 삼공에게 보여 물으라."
하고, 홍문관에 전교하기를,
"마땅히 삼공에게 묻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2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91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318]서사(署事) : 태종 5년에 처음으로 의정부·육조의 행정체계가 확립되어, 의정부가 백관을 통솔하고 국무를 총리하였으며, 육조가 국무를 분장하고 각기 소관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 대신이 이를 협의 결정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서 육조에 회송하여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의정부가 육조의 공사를 총리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議政府署事)라 한다. 의정부 서사로 인하여 행정 질서는 확립되었으나,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어 임금은 다만 의정부에서 올라오는 공사를 재가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태종 14년에 의정부 서사를 폐지하고 명 나라 제도에 의하여 육조의 공사는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바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시행하고, 군국의 중대한 사건도 육조 판서가 회의하여 계문(啓聞) 시행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의정부는 할 일이 없는 관청이 되고 말았으므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은 명예직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세종 18년(1436)에 의정부 서사를 회복하여 삼공이 행정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세조 원년(1455)에 또다시 의정부 서사를 폐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원기 등이 의정부 서사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戊子/弘文館副提學趙元紀等上箚云:
謹按《大典》, 敍政府之職曰: "總百官, 平庶政, 理陰陽, 經邦國。" 古昔命相, 不過如此。 署事雖革其命職之意, 猶在規模, 體統亦可想已。 六曹公事, 雖不關決, 而凡有施措, 必報政府, 除批之下, 亦輒錄報者, 國政得失、人材陞黜, 使政府有以議之, 而因循廢弛, 坐閤無日, 遂以政府, 爲無事養閑之地。 夫有其位, 必有其職, 有其職, 必有其事。 今者三公, 苟循其弊, 退居私第, 若無所職, 非有咨問, 未嘗預聞, 雖或有聞, 常後於人。 如有論啓, 必令僚屬往復, 彼此莫能相一, 此甚非謀國、經邦之道, 而祖宗置官畀職之重, 果安在哉? 大凡國家之事無窮, 一人之知有限。 坐閤參論, 宿晝詳慮, 猶懼未盡, 況遙問泛議, 能不失其事宜乎? 乞自今, 申擧國典, 飭修職守, 使日坐都堂, 論議國政, 庶無負祖宗命相之意。 且國有大事, 必廣詢博訪者, 則廷議可也。 無問鉅細, 或聚論闕庭, 或就咨其第, 一夕之間、造次之頃, 豈能盡其謀猷乎? 凡有疑議, 必下政府, 使之從容商議以稟, 允合事體。 濱因諫院之論, 下問大臣, 而政府乃引小嫌, 存形跡不以實對, 豈不惜哉?
傳于政院曰: "諫院上疏云: ‘凡有議得, 請於政府爲之。’予以此問於大臣, 大臣以爲:‘於政府合坐議得, 自祖宗朝所無之事, 今不可爲之。’ 故予意以爲不必於政府爲之也。 今觀弘文館箚子, 亦然。 物論旣如是, 而又合於事體, 依《大典》爲之固當矣。 以此箚子, 遍示于三公而問之。" 傳于弘文館曰: "當問于三公。"
- 【태백산사고본】 11책 22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91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