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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1권, 중종 10년 3월 7일 갑자 4번째기사 1515년 명 정덕(正德) 10년

궐내에서 내보낸 대행 왕비의 실록

궐내에서 대행 왕비의 실록(實錄).

"홍치(弘治)087) 신해년088) 7월 경진(庚辰)에 사저(私邸)에서 났으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졸한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아내인 외고(外姑)승평 부부인(昇平府夫人) 박씨(朴氏)의 집에서 자랐다. 병인년089) 가을 9월 상이 중흥(中興)할 때에 왕비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뽑혀 궁중에 들어와서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상을 받들기를 예의로 하고 동료를 너그럽게 대하여 숙덕(淑德)이 비할 데 없었다. 그때에 대신 등이 왕비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국모(國母)는 관계되는 바 지극히 중하니 갑자기 정함이 불가하다.’ 하였다. 정묘년에 대신 등이 다시 청하기를 ‘왕비를 오래 궐위할 수 없으니, 속히 세우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어진 덕이 숙의 윤씨 같은 이가 없으니, 정비(正妃)로 정하여야 하겠다.’ 하여, 8월에 왕비로 승봉(陞封)하였다.

비는 타고난 천성이 총명 예지(聰明睿智)하고 자선 관유(慈善寬柔)하며, 널리 여러 책을 열람하였다. 자전을 봉양하기를 지성으로 하여 변함이 없었고 날마다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였다. 비빈(妃嬪)을 무애(撫愛)하되 은혜가 높고 뜻이 후하며, 지서(支庶)를 양육하되 친아들을 사랑하듯 하였다. 집안 다스리기를 엄명(嚴明)하게 하고, 상을 보필하기를 혹시라도 힘이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였다. 항상 상께 아뢰기를 ‘첩이 옛글을 보았는데, 비록 어진 부인의 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상의 뜻에 불순하다는 이름을 얻지 않으려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첩이 잘못함이 있으면 상교(聖敎)를 아끼지 마시어,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외가(外家)의 성패는 후비(后妃)가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있습니다. 외척(外戚)의 관작을 첩이 어찌 구하리까? 어질면 자연 공론(公論)이 있어서 쓸 것이요 어질지 못하면 자연 공론이 있어서 버릴 것이니, 죄를 입는 자 있더라도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리까? 나는 한하지 않겠습니다.’ 하였으며, 왕비의 지위에 있은 지 9년 동안에 한 사람도 상에게 청하여 벼슬을 준 일이 없으며 또 청하여 죄를 면한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상이 깊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어질다. 비(妃)는 입지(立志)가 고매하여 태사(太姒)의 덕090) 이라도 이에서 더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중히 여겨 예우하고, 좌우의 사람들도 시종 비판하는 말이 없었다.

신미년091) 5월 정묘일에 딸을 낳았는데, 나이 어리어 아직 비녀를 꽂지 못하였으며, 을해년 2월 계축일에 원자를 낳았는데 겨우 수일을 지나서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상이 크게 놀라시어 친히 문병하고 또 말하고 싶은 것을 물으니, 처음에 대답하기를 ‘은혜 입음이 지극히 크니 반드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며,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튿날 새벽 병세가 매우 중해지자 일어나 앉아 손수 글을 써서 상께 아뢰기를 ‘어제 첩의 마음이 혼미하여 잊고 깨닫지 못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상고하여 본즉 사실이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상이 백방으로 약을 써서 구원하였지만 끝내 차도가 없이 이달 초2일에 경복궁 동궁 별전(東宮別殿)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25세였다. 상이 애통 망극하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낙이 극하면 슬픔이 생긴다 하였는데, 어찌 일국의 경사가 있고, 또 이런 불측(不測)한 일이 있겠는가? 사람의 생사가 천명이라고는 하지만 하늘이 어찌 나의 어진 내조를 일찍 빼앗는가?’ 하며 슬퍼하기를 마지않았다. 이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내가 지금 일찍 어진 내조를 잃어서,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일을 결단할 수가 없다. 무릇 상사에 관한 것 외에는 아직 여러 가지 상주(上奏)를 정지하라.' 안으로 궁중에서도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실록의 시종(始終)과 대략이 이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64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3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註 087]
    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 [註 088]
    신해년 : 1491 성종 22년.
  • [註 089]
    병인년 : 1506 중종 1년.
  • [註 090]
    태사(太姒)의 덕 : 주 문왕(周文王)의 비이고 무왕의 어머니로서 어진 부덕을 지녔다.
  • [註 091]
    신미년 : 1511 중종 6년.

○內出《大行王妃實錄》弘治辛亥七月庚辰, 生於私邸, 早失其妣, 長於外姑卒月山大君昇平府夫人 朴氏之第。 丙寅秋九月, 上中興時, 王妃未定, 選入宮中, 冊爲淑儀。 承上以禮, 接僚以寬, 淑德難比。 其時, 大臣等請建王妃, 上敎曰: "國母, 所關至重, 不可卒定。" 丁卯歲, 大臣等再請曰: "王妃不可久闕, 請速立之。" 上敎曰: "賢德無如淑儀 尹氏, 可定爲正妃。" 秋八月, 陞封爲王妃。 妃稟性, 聰明睿智, 慈善寬柔, 該覽諸書。 奉養慈殿, 至誠無間, 日日定省, 夙夜兢兢。 撫愛妃嬪, 恩隆意厚, 養育支庶, 如愛親子。 治家嚴明, 輔上不逮, 常啓上曰: "妾觀古事, 雖不及於賢之德, 不欲致不順上之名, 吾所願也。 妾有所失, 毋惜聖敎, 俾得改過。" 又啓曰: "外家之成敗, 在於后妃之賢否。 外戚之官爵, 妾何求哉? 賢則自有公論, 而用之; 否則自有公論, 而棄之, 雖有得罪者, 是誰之愆哉? 吾不恨也。" 在位九歲, 無一人請於上, 而爵之, 又無請免罪者, 故上深嘆曰: "賢哉! 妃立志高邁, 雖太姒之德, 蔑以加矣。" 是故, 重而禮之, 左右之人終始無間言。 辛未五月丁卯, 生一女, 年幼未筓, 乙亥二月癸丑, 誕生元子, 纔經數日, 忽罹重病。 上不勝驚駭, 親臨問病, 又問所言, 始對曰: "蒙恩至大, 必無所煩。" 但墜淚而已。 翌曉病勢甚劇, 起坐手筆奏上曰: "昨日妾心昏忘, 不能省覺, 妾思之, 去年夏, 夢有一人言曰: ‘生此兒則可名曰億命’書付壁上也。 上考之則是也。" 是何奇哉? 上百般救藥, 終未差愈, 本月初二日薨于景福宮東宮別殿, 春秋二十五也。 上哀痛罔極, 嘆曰: "古云: ‘樂極則生哀, 何有一國之慶, 而又有如是不測之事乎? 人之死生, 雖云天命, 天何早奪予之賢助?" 悲泣不已。 傳于政院曰: "予今早失賢助, 神迷心亂, 罔知攸措, 不能決事。 凡干喪事外, 姑停雜奏。" 內而宮中, 莫不悲慟。 終始大略, 不過於此云。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64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63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