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중종실록18권, 중종 8년 3월 21일 경인 2번째기사 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함경도 관찰사 정광필이 명천 혁파에 대해 장계하다

함경도 관찰사 정광필(鄭光弼)이 장계(狀啓)를 올려 이르기를,

"신이 조정에 있을 때에 명천(明天)을 혁파해야 된다고 의논드렸습니다만, 지금 신이 육진(六鎭)141) 을 순심(巡審)하는데, 옛 명천 이민(吏民)과 관노비(官奴婢)가 ‘본현(本縣)을 회복시켜 달라.’고 길을 막고 호소하며, 경성(鏡城)·길주(吉州) 등 고을에서도 글을 보내어 회복하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래하는 인원과 본도 수령의 말을 자세히 참작해 보니, 모두 ‘명천을 혁파한 뒤에 두 고을의 상거가 2백 40여 리나 되는데, 수재(守宰)가 없으므로 우마적(牛馬賊) 및 겁탈을 일삼는 자들이 여기에 모여들어 기탄없이 횡포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민폐가 많다.’고 합니다.

사말동보(斜末洞堡) 등처는 도둑들의 통로로서 가장 요긴한 곳인데, 길주로부터 거의 3식(息)142) 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서로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읍사(邑舍)가 이제 공관(空館)이 되었으니, 저들이 쳐다볼 때 또한 놀랄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전택(田宅)은 모두 본현(本縣)에 있고 토착(土着)된 지도 이미 오랜데, 이제 길주로 옮겨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제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므로, 전지는 끝내 황폐해지고 재산과 생업을 잃어 온 군민이 아우성치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도망쳐 흩어지는 자가 매우 많으니, 영원히 혁파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명천을 회복한다 해도 길주의 관노비와 토민(土民)은 과히 줄어들지 않아 끝내 대읍(大邑)의 체모를 잃지 않을 것이니, 명천을 만약 영구히 혁파하지 않으시려면, 청컨대 금년 봄으로 회복하고 품계가 높고 일에 능숙한 사람을 택차(擇差)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무너져가는 관사만 회복될 뿐 아니라 노비와 이민(吏民)도 더 흩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미 흩어진 자도 또한 환집(還集)할 수 있으오리다."

하였으므로, 이 일을 이조(吏曹)에 내리니 이조에서 여러 의논을 모으기를 청하매, 그대로 따랐다. 송일(宋軼)·김응기(金應箕)·이손(李蓀)이 의논드리기를,

"신 등이 전일에 ‘혁파한 지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회복한다면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않아 사체에 부당하오나, 단 노비와 관속은 풍년들기를 기다려 점차 이거(移居)하여 실업(失業)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고 아뢰었는데, 이제 다시 무슨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하고, 신윤무(辛允武)가 의논드리기를,

"신이 일찍이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가 되었었기에 양관(兩官)의 사세를 대강 알거니와, 이제 광필이 올린 장계에 그 사연이 빠짐없이 열거되었으니 회복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고, 윤금손(尹金孫)·정광세(鄭光世)·신용개(申用漑)·홍숙(洪淑)·강징(姜澂)·남곤(南袞)이 의논드리기를,

"이제 정광필의 장계를 보니, 이해(利害)를 살피고 민정을 헤아려서 규획(規畫)한 것이 아주 상세히 되었는지라, 다시 설치함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민상안(閔祥安)·임유겸(任由謙)·이자견(李自堅)이 의논드리기를,

"건치(建置)의 연혁은 나라의 중대사라 쉽사리 설치했다가 쉽사리 혁폐할 수 없습니다만, 민원이 이와 같으니 폐 또한 많을 것입니다. 시의를 살펴 설치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민원에 따라 다시 설치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금손 등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5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農業) / 호구-이동(移動) / 향촌(鄕村)

  • [註 141]
    육진(六鎭) : 세종(世宗) 때 동북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의 내습에 대비하여 김종서(金宗瑞) 등이 두만강(豆滿江) 하류 남안(南岸)에 설치한 여섯 진, 곧 종성(鍾城)·은성(穩城)·회령(會寧)·경원(鏡源)·경흥(慶興)·부령(富寧)을 말한다.
  • [註 142]
    3식(息) : 거리의 단위 30리가 1식이다.

咸鏡道觀察使鄭光弼狀啓曰:

臣在朝時, 以明川可革爲議。 而今臣巡審六鎭時, 古明川吏、民、官奴婢, 則復請立本縣, 遮道陳訴, 鏡城吉州等官, 亦馳書請復。 詳參往來人員及本道守令之言, 則咸曰: "明川革罷後, 兩官相距二百四十餘里, 無守宰, 故牛馬賊及行刦人等, 皆聚於此, 肆行無忌, 多爲民病。 且斜末洞堡等處, 賊路最緊, 自吉州幾至三息, 非徒脫有緩急, 勢不相救也, 久遠邑舍, 今爲空館, 彼人瞻視, 亦可駭愕。 其民田宅, 皆在本縣, 土着已久, 今移吉州, 晨夜服役, 未得趁時還家, 田土荒穢, 破産失業, 百口嗷嗷。 由此逃散者甚衆, 勢不可永革。 雖復明川, 吉州官奴婢及土民, 不至甚少, 終不失爲大邑矣。" 明川若不得爲永革, 則請趁今春復立, 而擇秩高諳鍊人員差任, 則非惟官舍未盡頹毁, 奴婢人吏, 未盡流離, 其戶散者, 亦或還集矣。

事下吏曹。 吏曹請收群議, 從之。 宋軼金應箕李蓀議: "臣等前日之議以爲: ‘革廢未久, 遽爾復立, 政令不一, 事體未便。 但奴婢官屬, 待年豐, 漸令移居, 毋使失業事。’ 已議啓之, 今復何議?" 辛允武議: "臣曾爲北道節度使, 租知兩官事勢。 光弼書狀內辭緣, 詳盡無餘。 復設爲當。" 尹金孫鄭光世申用漑洪淑姜澂南袞議: "今觀鄭光弼所啓, 審利害度民情, 規畫詳盡, 復置似當。" 閔祥安任由謙李自堅議: "建置沿革, 國之重事, 不可旋置而旋革。 然民怨至此, 弊端亦多, 不可不審時宜而更張之。 勉循民願, 復置爲便。" 上用尹金孫等議。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5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農業) / 호구-이동(移動) / 향촌(鄕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