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때 놀며 잔치한 사람과 궁중 일을 전하여 말한 사람들을 잡아 가두게 하다
승지와 정승들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국상(國喪) 때 놀며 잔치한 사람들을 가두게 하였는데, 이 역시 군상(君上)을 업신여겨 한 짓이다. 지금 풍속을 고쳐 바로잡는 때인데 남겨두어 무엇에 쓰랴. 그때 함께 간 악공(樂工)이니 기생들 역시 같다. 그러나 기생은 아녀자라 혹 남자에게 끌려서 간 자도 있을 것이니, 깊이 논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풍악을 연주하는 일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므로, 놀며 잔치할 때에 궁중 일을 전하여 말한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형장 1백을 때려 관비(官婢)로 정속(定屬)하고, 악공은 음악을 잘 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이 없으며, 남겨둔들 역시 소용이 없다.
또 홍식(洪湜)은 궁중 일을 누설하였으며, 이총(李摠)은 종친(宗親)으로서 조사(朝士)들과 사귀어 결탁하였는데, 모두 남겨둔들 쓸 데가 없으니, 의금부에게 총의 머리를 베어 오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처는 관비로 정하여 부치고, 아비와 동생은 형장 1백 대를 때려 먼 외방에 안치(安置)하게 하라. 식(湜)도 참형(斬刑)에 청하고, 그 집을 몰수하며, 아들 홍세필(洪世弼) 역시 참형에 처하되, 모두 오늘 실행하며 승지가 가서 형벌을 감독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일찍이 《사기(史記)》를 보니, 재상과 대간(臺諫)이 항상 그 인군을 권고하여, 요(堯)·순(舜)의 정치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인군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나, 착하고 악한 것은 원래 천성으로 되는 것이지 신하의 말을 듣고서 고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인군의 하는 일을 어찌 말해서 되느냐. 누설하는 폐단은 관계가 매우 중하다. 식은 지위가 승지에 이르렀으니 은총을 입었다고 할 수 있는데, 궁중 일을 이렇게 발설하였으니 그 죄가 참으로 깊다. 식이 사간(司諫)일 때 그 아우 홍한(洪瀚)이 전한(典翰)으로서 한때 상소한 일이 있으니, 그 소장을 급히 상고하여 아뢰라."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총(摠)은 풍의가 준수 명랑하고, 시를 배워 문장이 아취(雅趣)가 있으며, 거문고 타기를 잘하여 당시의 명사들과 사귀어 놀았다. 집을 양화도(楊花渡) 가에 짓고, 세상 일을 접하지 않으며 날마다 고기잡고 낚시질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항상 작은 배를 하나를 타되, 거문고와 술을 싣고 가 종일토록 돌아오기를 잊으며, 취하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어 아무런 얽매임 없이 세속 밖의 생각을 가졌다. 뒤에 죄를 입고 유락(流落)하면서도 거문고를 가지고 다녔으며, 여기저기 옮겨 귀양다녀 거의 죽게 되어서도 일찍이 근심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하지 않았다. 함께 놀던 사람 종실(宗室) 수천 정(秀泉正)·명양 정(明楊正)도 모두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즐겼는데, 명양(明陽)은 청고(淸苦)하게 시를 다뤘으며, 수천(秀泉)은 비파와 현금(玄琴)을 잘 타 당대의 제1인이고 또 시를 잘 지었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여 녹을 타면 반찬을 마련하는데 다 써 봉양하였는데, 무오년 사화를 본 뒤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귀어 노는 일을 끊고, 다만 어버이 봉양하는 것을 삼았다. 남효온(南孝溫)이란 이가 있어 널리 배워 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성종조에 일찍이 글을 올려 일을 말한 뒤로는 거짓 미쳐 벼슬하지 않고, 자호(自號)를 추강 거사(秋江居士)라고 하였다. 문장을 공부하였는데, 시가 고고(高古)하여 당(唐)나라 문인들의 기풍이 있었다. 때로 총(摠)과 함께 놀면서, 현금부(玄琴賦)를 지어 찬양하였고, 《추강집(秋江集)》이란 저서(著書)가 있다. 또 유종선(柳從善)이라는 이가 있어, 역시 총과 함께 놀았는데, 널리 여러 글을 읽어 명분과 의리 이야기를 잘 하였으며, 또 불경[內經]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항상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젊어서 부모를 여의고 세상을 좋아하지 않아 전지·가옥과 노비(奴婢)를 모두 그 누이에게 미뤄주고, 여러 산을 유람하다가 거의 10년이 되어 돌아와서도 장가들거나 벼슬하지 않았다. 좀 있다 무오년 사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또 몸을 빼 나가 사방을 두루 다니며 놀았는데, 항상 작은 비파(琵琶)를 가지고 다니며,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만나면 그만 앉아 한동안씩 타다 가곤 하였다. 이때부터 발을 서울에 들여놓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동방삭(東方朔)이 「조정과 저자에 숨는다.」 하였는데, 이는 참 은자(隱者)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친구가 경상도에서 보니, 그가 가지고 다니던 거문고나 서적도 다 없애버리고 막연히 무엇 하나 몸에 지닌 것이 없었는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명교(名敎) 중의 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53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32 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풍속(風俗) / 사법(司法) / 신분-천인(賤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가족(家族) / 예술-음악(音樂)
○傳于承旨及政丞等曰: "昨命囚國喪時遊宴人, 是亦慢君上而爲之也。 今當革正風俗之時, 存之何用? 其時同往工、妓等, 亦與此同矣。 然妓則兒女也, 或有爲夫所携而去者, 不足深論, 然此人以奏樂出入宮禁, 而遊宴之時, 無不傳說宮禁之事, 決杖一百, 官婢定屬。 工人則雖工於音樂, 豈無他人? 存之亦無所用。 且洪湜漏說宮禁之事, 摠以宗親交結朝士, 皆存之無用。 其令義禁府, 斬摠首以來, 籍沒家産, 妻則官婢定屬, 父及同生決杖一百, 安置遠方。 湜處斬, 籍沒其家, 其子世弼亦處斬, 皆於今日決之, 承旨往監刑。" 傳曰: "嘗觀《史記》, 宰相、臺諫雖常勸其君以致堯、舜之治, 然君之賢否、善惡, 自由天性, 非聽臣之言而改之也。 況時君所爲之事, 豈可言之? 漏洩之弊, 所關甚重。 湜位至承旨, 可謂承寵, 宮禁之事, 如此發說, 罪固深矣。 湜爲司諫時, 其弟瀚爲典翰, 有一時上疏之事, 其疏急考以啓。" 承旨等啓: "上敎允當。"
【史臣曰: "摠風儀秀朗, 學詩有文雅, 善鼓琴, 與一時名士交遊。 築室楊花渡邊, 不接世務, 日以漁釣爲樂, 常乘小艇, 載琴携酒, 竟日忘歸。 醉則鼓琴詠詩, 翛然有出塵之想。 後坐罪流落, 亦以琴自隨, 雖遷謫(濱)〔瀕〕 死, 未嘗爲戚戚容。 同時遊者, 宗室秀泉正、明陽正, 皆好學樂善。 明陽淸苦攻詩, 秀泉善琵琶、玄琴, 爲時第一。 又能詩, 事親孝, 得俸祿盡備廚饌以奉之。 自見戊午禍, 杜門絶交遊, 只以養親爲事。 有南孝溫者, 博學無所不通。 成宗朝嘗上書言事後, 佯狂不仕, 自號秋江居士, 攻文章, 爲詩高古, 有唐人風。 時與摠遊, 作《玄琴賦》以讃之, 其所著有《秋江集》。 又有柳從善者, 亦與摠遊, 博覽群書, 善談名理, 又通內典, 然常自晦, 故人罕知者。 少喪父母, 不喜人世, 推田宅、臧獲, 盡與其姊, 遊歷諸山, 幾十年而返, 猶不娶不仕。 俄見戊午禍, 又脫身往, 周遊四方, 常以小琵琶自隨, 每遇佳山水, 輒坐鼓, 移時乃去。 自此未嘗足履京都。 常曰: ‘東方朔自謂隱朝市, 是非眞隱者也。’ 後有友見之於慶尙道, 其所隨琴書亦盡去之, 漠然無一物累身者, 嘆曰: ‘吾已作名敎中罪人。’"】
- 【태백산사고본】 14책 53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32 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풍속(風俗) / 사법(司法) / 신분-천인(賤人)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가족(家族) / 예술-음악(音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