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진관 윤효손 등이 남방 각 포구의 방비의 일, 활쏘기 시험의 일 등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經筵)에 납시니, 특진관(特進官) 윤효손(尹孝孫)이 아뢰기를,
"남방은 태평에 젖어서 변두리의 방어가 매우 허소하니 염려를 않아서는 안 되며, 각 포(浦)의 군기(軍器)와 병선(兵船)은 해가 묵어서 모두 파손되었으니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나의 방비가 있음을 믿어라.’ 하였으니, 항상 적이 오는 것 같이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해이하지 말아야 하옵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양희지(楊熙止)는 아뢰기를,
"남방 각 포구에 있는 군기는 대부분 수리하고 고쳐 만들었는데, 유독 활이 모두 쓸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사관(射官)도 많지 않아 한 포(浦)에 잘 쏘는 자가 겨우 5명에 불과하니 활 잘 쏘는 자를 많이 뽑아서 방수(防戍)하게 하고 또 연습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육지에서 쏘는 것과 배 위에서 쏘는 것은 완연히 달라서, 배 위에서 쏘는 것은 배가 동요하기 때문에 뜻과 같지 않습니다. 만약 평상시에 익히지 않으면 적을 만난 때에 싸우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니 활쏘기를 익힐 적에 과녁판을 육지에 설치하고 배에서 쏘게 하여 그것을 상습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입법을 이미 자상하게 하였는데 다시 새 법을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 지금은 마땅히 옛법을 거듭 밝혀야 한다."
하였다. 강겸(姜謙)이 아뢰기를,
"각 포(浦)에 있는 대맹선(大猛船)은 바탕이 무거워서 역풍(逆風)을 만나면 가지를 못하니 왜적을 만날지라도 잡을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포작선(鮑作船)은 가볍고 빨라서 비록 역풍을 만날지라도 노만 저으면 갈 수 있으며, 대맹선 한 척을 만들 재목이면 작은 배 3, 4척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 각 포의 사관(射官)들이 거개가 빈궁(貧窮)한 사람인데, 지금 자비로써 화살을 만들라 하고, 또 한 달을 건너서 번(番)을 서게 하니 의식이 넉넉하지 못한데 어느 겨를에 활과 화살을 만들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활을 못 쏘는 자는 칼과 막대를 가지고 번을 서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정언 홍윤덕(洪潤德)은 아뢰기를,
"상과 벌은 임금의 큰 권병(權柄)입니다. 근일에 삭서(朔書)에 으뜸을 차지한 자는 표피(豹皮)를 상주고 승정원 홍문관(弘文館)에서 또한 능단(綾緞)과 초피(貂皮) 등의 물건을 마구 상사(賞賜)했습니다. 옛사람은 떨어진 바지 하나라도 반드시 간직하게 해서 공이 있는 자를 기다렸으니, 청하옵건대 옛사람을 본받아 상을 함부로 내리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진실로 옳도다."
하였다. 영사 정문형(鄭文炯)이 아뢰기를,
"윤덕(潤德)의 말이 당연하옵니다. 무신(武臣)의 활쏘는 것을 시험할 때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먹을 것을 장만하게 하는 것은 폐단이 있습니다. 훈련원(訓鍊院)에서 쏘는 것을 시험하게 하여 우수한 자를 혹 별도로 줄지언정 반드시 상사(賞賜)할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예빈시는 전적으로 국가의 연향(宴享)을 위하여 설치된 기관이라서 노비(奴婢)들의 공괴(供饋)하는 노고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무신(武臣)의 쏘는 시험을 혁파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활쏘는 시험은 성종조의 고사(故事)로 무사(武士)가 전죽(箭竹)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이로써 상을 준 것이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세조조(世祖朝) 때에는 불시로 활쏘는 것을 관찰하여 훈련에 유의하였으므로 그때의 무사는 쓸 만한 자가 많았습니다. 성종조의 시사법(試射法)은 참으로 국가에 유익한 일입니다만, 그 폐단이 과연 문형(文炯)의 아뢴 바와 같으니 폐지해도 좋겠습니다. 또 국가의 재정 수입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자주 상을 주어 인재를 권장하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일이나 남용의 지경에 이른다면 계속해서 주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걱정되니 꼭 상줄 만한 공이 있는 자를 기다려서 상을 준다면 사람들이 모두 권면하고 재정도 고갈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임금은 사람 쓰는 일이 지극히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변방의 수령과 장수를 더욱 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홍형(洪炯)을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삼았으니 홍형이 비록 쓸 만하지만 적변(賊變)을 만나면 장수가 꼭 앞장서서 전장에 나가는 것인데, 홍형이 활을 잘 쏜다 할지라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타는 것이 무사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신(文臣)으로 판관(判官)을 삼아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만약 절도사를 삼는다면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 무신(武臣)은 젊고 씩씩한 사람을 써야 하옵는데 젊은이는 계급이 낮아서 직차(職次)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전조(銓曹)에서 의망(擬望)을 할 때는 매양 사람이 없어서 걱정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71 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기(軍器) / 군사-병법(兵法) / 사법-법제(法制)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御經筵。 特進官尹孝孫曰: "南方狃於昇平, 邊禦踈虞, 不可不慮。 各浦軍器兵船年久破毁, 不可不改造。 古人云: ‘不恃敵之不來, 恃吾有備。’ 宜常如敵至, 毋或少弛。" 參贊官楊熙止曰: "南方各浦軍器率皆修改, 惟弓皆不可用。 且射官不多, 一浦能射者纔四五人, 宜多選能射者, 使之防戍, 且令鍊習。 然在陸而射, 與在船上射頓殊, 在船上射, 因船動搖, 不能如意。 若不習之於平時, 恐難用於遇敵之日。 令習射時, 張侯於陸, 射之於船, 習以爲常何如?" 王曰: "立法已詳, 不可更立新法, 今宜申明舊法。" 掌令姜謙曰: "各浦大猛船質重, 遇逆風不得行, 雖遇倭賊萬無捕獲之理。 鮑作船輕疾, 雖遇逆風, 若能搖櫓則可行, 以大猛船一隻之材, 可作小船三四。 且各浦射官類皆貧窮, 而令自備弓箭, 又令越一朔立番。 衣食且不贍, 奚暇備弓箭乎? 臣意以爲, 不能射者, 令佩刀持杖可也。" 正言洪潤德曰: "賞罰人主之大柄也。 近日朔書居首者, 賞以豹皮, 承政院、弘文館亦以綾段、貂皮等物濫加賞賜。 古人雖敝袴, 必命藏之, 以待有功者。 請法古人, 使賞不僭。" 王曰: "此言良是。" 領事鄭文炯曰: "潤德之言當矣。 武臣試射時, 令禮賓寺供饋有弊。 令試射於訓鍊院, 其優者或給別賜, 不必賞賜。 況禮賓寺專爲國家宴享設也, 而奴婢供頓之苦, 難可勝言, 請罷武臣試射。" 王曰: "試射成宗朝故事, 武士箭竹難得, 故以此賞之耳。" 同知事洪貴達曰: "世祖朝不時觀射, 留意訓錬, 故其時武士多有可用者。 成宗朝試射之法, 固有益於國家也, 然其弊果如文炯所啓, 雖廢之可也。 且國家財賦之入, 有常數。 賞以勸人才, 雖爲美事, 然至於濫用, 則恐有難繼之憂。 必待有可賞之功, 然後賞之, 則人皆勸勵, 而財不至於匱乏矣。 且人君用人至大, 而邊方守令及邊將, 尤不可不擇。 今以洪泂爲穩城府使, 泂雖可用, 遇賊變則將帥必身先赴戰。 泂雖能射, 被甲上馬, 其能如武士乎? 以文臣爲判官, 使之治民則可, 若以爲節制使, 則不合也。 且武臣須用於少壯之時, 而以秩卑不當職次。 故銓曹注擬之時, 每患乏人。"
- 【태백산사고본】 7책 2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71 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기(軍器) / 군사-병법(兵法) / 사법-법제(法制)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