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연산군일기 24권, 연산 3년 6월 5일 을해 4번째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예문관 봉교 강덕유 등이 간관·작상의 남발 등에 대해 상소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강덕유(姜德裕)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모두 형편없는 사람으로 잘못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전하의 한 가지 정사, 한 가지 호령이라도 잘된 것을 보면 반가운 마음으로 쓰며, 혹시 빠지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가지 정사, 한 가지 호령이라도 잘못된 것을 보면 붓을 쥐고 서로 돌아보며 오랜 후에야 썼으니, 대개 차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인군의 잘잘못을 논하게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충신은 비록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오히려 인군을 잊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관직이 시종(侍從)의 대열에 있는 자이겠습니까. 견마(犬馬) 같은 충성심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기에, 하늘 같은 위엄을 무엄하게 범하면서 감히 정신 없이 참람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 등은 듣건대, 예전에는 간하는 관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공(樂工)은 잠명(箴銘)을 외워 간하고, 소경은 시를 외워 간하고, 사관(史官)은 글을 올려 간하고, 사(士)는 말을 하여 간하며, 가까운 신하는 모두 규간(規諫)하고, 친척은 보좌하여 살폈으며, 또한 상인이나 행려들도 저자에서 논란하여, 위로 공경 대부(公卿大夫)에서 아래로 사서(士庶)와 온갖 공인(工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교섭되고 언론의 길이 넓었던 것인데, 후세에 와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주로 하고 선비는 자기 말을 위주로 하므로, 비로소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이목(耳目)의 책임을 맡기고, 또한 그 말을 다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므로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받아들이며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 무엇이나 다 말하고 숨김이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전의 제왕이 ··우(禹)·탕(湯)·주 문왕(周文王)보다 나은 이가 없으되, 그 덕을 칭송한 말이 ‘아름다운 말을 감추어지지 않게 한다.’ 했고, ‘너의 선한 말[昌言]을 스승 삼는다.’ 했고, ‘간하는 말을 들어주어 거스르지 않는다.’ 했고, ‘늙은이를 공양하며 좋은 말을 구한다.’ 했습니다. 이 몇 분의 성인들이 능히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기 때문에 천하의 선한 말이 모두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세에 쇠퇴하게 되어서는 걸(桀)용방(龍逢)324) 을 죽이고, 주(紂)비간(比干)325) 을 죽였으며, 주(周)나라는 비방을 감시하는 관직을 두었고, 진(秦)나라는 마음속으로 비방하는 것도 처벌하였었는데, 모두 나라가 멸망하게 되고 몸이 망하여 천하의 악이 모두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대에 있어 간을 받아들여 흥하게 되고 간을 거부하여 망하게 된 것이 역사에 실려 있어 소연하게 볼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보아 알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성묘(成廟)께서 재위하시는 26년 동안에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하신데도 오히려 또한 날마다 세 차례씩 강론하고 질문하되, 조신(朝臣)들을 맞아들여 고금 일을 토론하시면서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정이 상달(上達)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고, 또한 윤대(輪對)326) 를 설치하고 각기 자기의 소견을 진술하게 하여 충직한 말 듣기를 좋아하고 간하는 선비를 우대하여, 신하들의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을 조성하시었는데, 이것은 역시 전하께서 친히 보신 일입니다. 그런데, 정사를 보시기 시작한 이래 경연에 나오시기를 게을리하여 여러 신하들과의 접촉을 드물게 하고, 편파적으로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시어 극력 남의 말을 거절하고, 간관(諫官)을 가두고 모욕하여 정직한 의기를 좌절시켜, 성묘께서 배양(培養)해 놓은 공을 떨어뜨리시니, 근자의 일이 더욱 한심합니다.

을묘년부터 오늘까지 3년 동안에, 대간이 일을 보는 날은 적고 복합(伏閤)하는 날이 많아 조정의 기강이 해이되고 백성들의 원성이 쌓이니, 이름은 비록 대간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대간이 없는 것입니다. 인군으로서 그 과실을 듣게 되는 것은 대간뿐인 것인데, 대간이 또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인군의 귀와 눈이 가려지고 막혀 귀머거리와 같이 듣지 못하고 소경과 같이 보지 못하여 우두커니 고립될 것이니, 비록 전복되지 않으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상하(上下)가 교섭되지 않으면 천하에 나라가 없어진다.’ 하였는데,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은 나라가 멸망된다는 말입니다. 상하가 교섭되지 않으면 비록 조정과 인군과 신하가 있다 하더라도 나라를 멸망시킬 행적이 이미 갖추어진 것입니다. 신 등은 나라의 사세가 장차 구출할 수 없는 데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근년에 재앙과 변괴가 자주 나타나 지진이 일고 햇무리가 있으며 겨울에 뇌성이 나고 여름에 눈이 오며, 흰 기운이 하늘에 가로지르고 금성(金星)이 낮에 보이며 변방 백성들이 염병에 걸려 거의 다 죽어가니, 재앙과 변괴의 일어남이 비록 춘추(春秋) 때의 쇠퇴한 세상일지라도 오늘 같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원인이 없이 그렇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아직도 두려워 하실 줄을 모르고 옛날에도 있었다고 하여, 별로 몸을 근신하고 행동을 반성하는 마음이 없으시니, 신 등이 통분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옛날 〈주(周)나라의〉 유왕(幽王)여왕(厲王)이 정사를 잘못하자, 일식(日蝕)·월식이 드러나고 산과 골짜기가 위치를 바꾸며, 비·눈·뇌성·번개가 순서 없이 서로 겹쳤는데, 이런 후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고, 진(秦)나라가 망할 때에는 화성이 달을 뒤덮고 태백이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구름도 없는데 뇌성이 진동하였으며, 한(漢)나라가 쇠약해질 무렵에는 서리와 눈이 여름에 내리고 별들이 제 길을 잃었으며, 낮에도 어두울 때가 많았고 바닷물이 뒤끓었으니, 옛적부터 재앙의 까닭없이 일어나지 않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국가가 비록 평온 무사하다 하나 작상(爵賞)이 남발되고 형벌이 타당을 잃었으며 옥에 송사가 적체되고 곡직(曲直)이 분간되지 못하여 두어 달 동안에 사면(赦免)하는 조서가 몇 차례나 내려지고 하루동안에도 명령이 여러번 변경되며, 비용이 절도가 없어 국고가 거의 고갈되었는데, 금원(禁苑)의 깊고 지밀한 곳에는 들짐승이 떼를 이루고 있으며, 풍속이 사치를 좋아하고, 온갖 관원의 체통이 해이되어 이속은 거개가 청렴하지 못하고 선비는 염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며, 부역이 너무 빈번하고 토목 공사가 끊긴 날이 없으며, 어진 선비는 배척을 받아 묻혀 있고, 간사한 무리는 틈을 타 진출되며, 환관은 총애를 믿고 법을 경시하고 외척(外戚)은 교만 방자하여 법을 업신여기니, 이야말로 쇠퇴하고 미약해지며 어지러워져 멸망하게 될 조짐인데, 대신은 녹이나 유지하려 관망만하며, 다 말하려 하지 않고 대간·시종은 비록 더러 진언(進言)하나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래서 나랏일은 날로 잘못되어가게 되고 하늘의 꾸지람이 겹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하는 것을 옳게 여기지 마시고 과실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게 하시며, 충직한 말을 거역한다 마시고 간하는 말을 들어주어 거스르지 말으시며, 조금 편안한 것을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성황(城隍)을 엎어버린 경계를 생각하시며, 재변을 소홀히 여기려 하지 마시고 하늘에 순응하는 정성을 닦으시는 것이 태평의 기반이 되고 종사(宗社)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정원이 예문관의 상소를 가지고 아뢰기를,

"예로부터 인군들이 사관(史官)을 두려워한 것은 그가 좌우에 가까이 모시면서 인군의 선과 악을 모두 그대로 기록하며,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논평할 수 있게 하여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마음대로 악을 하지 못한 것인데, 인군으로서 사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상소를 보건대,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여 오늘날 정사의 잘못을 모두 기록하여 숨김이 없으니, 이것은 모두 보고 들은 것이 있어 그대로 쓴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사책에 써 놓는다면 만세의 뒤에 논평하는 사람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상소 안에 이르기를, ‘어진 선비는 실의(失意)하여 배척당하고 간사한 무리들은 틈을 노려 진출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더욱 적절합니다. 군자와 소인의 진퇴는 실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전하께서 더욱 체념(體念)하셔야 할 바이오니, 마땅히 그 사람을 찾아내어 만일 과연 어진 사람인데도 뜻을 잃고 묻혀 있다면 빨리 발탁하여 등용하여야 할 것이요, 간사한 사람인데도 틈을 노려 진출되었다면 빨리 내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인들의 나라 다스리는 가장 큰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름짓기를 ‘유왕(幽王)·여왕(厲王)’이라 하여 놓으면 비록 성스러운 아들과 인자한 자손이 있더라도 백대토록 고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거니와 비록 내가 하지 않은 것이라도 사책에 써놓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이른바 ‘간사(奸邪)’라는 것은 반드시 임사홍(任士洪)을 가리킨 것이다. 만일 어진 선비가 있었다면 대신들 중에 어찌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에 한림(翰林) 등을 불러 물어보리라."

하였다. 강덕유(姜德裕)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신 등이 지칭한 어진 선비라는 것은, 대개 정성근(鄭誠謹)·조지서(趙之瑞)를 말한 것입니다. 성근은 정직하고 효렴(孝廉)하여 일찍이 해주(海州)·여주(驪州) 목사가 되었을 때에 정사를 청렴하고 검박하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지서 역시 청렴 정직한 사람으로 일찍이 경주 판관(慶州判官)·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되었을 때에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으므로 간사한 이속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는데, 백성들이 역시 지금까지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사림(士林)에 칭찬받고, 선왕께서도 소중하게 여기시던 사람인데, 전번에 미치광이 유승양(柳承陽)의 말 때문에 주의(注擬)하지 못하게 하여 폐기(廢棄)하여 등용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 등의 이른바 배척되어 실의하고 있다는 사람들입니다.

간사라는 것은 대개 임사홍(任士洪)·정숭조(鄭崇祖)를 말하는 것입니다. 임사홍은 선왕조에 있어서 붕당을 결탁하여 조정의 정사를 혼란시키므로 성종께서 그 간악함을 분명히 아시고 끝내 한 등급도 올려 주지 않았고, 정숭조는 전에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장사치들과 내통하여 위를 속이고 사리를 도모하는데, 간사하여 술책이 많았고, 탐탁(貪濁)하기 짝이 없었으니, 두 사람은 모두 소인 중에도 우심한 자인데 지금 특별히 높은 품계(品階)에 승진시키니, 이것이 신 등의 이른바 틈을 노려 진출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조사(朝士)가 유독 성근·지서만이 아닌데 유승양의 구설(口舌)에 올랐으니, 이 두 사람이 주공(周公)과 같다면 가하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어찌 가하겠는가. 지서로 말하면 전에 서연관(書筵官)으로 있었기에 나도 그 사람됨을 알고 있다. 성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조정 신하들의 추모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었지만 졸곡(卒哭) 후에는 모두들 고기를 먹었는데, 성근만은 유독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당(阿黨)한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을 끝내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래 있는 사람의 논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228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註 324]
    용방(龍逢) : 중국 하(夏)나라의 어진 신하.
  • [註 325]
    비간(比干) : 은(殷)나라의 어진 신하.
  • [註 326]
    윤대(輪對) : 매일 세 번씩 각부(各部)의 낭관(郞官)이 차례로 임금을 알현하고 직무에 관한 일을 아뢰던 일을 말함.

○藝文館奉敎姜德裕等上疏曰:

臣等俱以無狀, 謬玷史局, 見殿下一政事、一號令之善, 則歡然而書, 猶恐泯滅; 一政事、一號令之失, 則握筆相顧, 久然後書, 蓋不忍使後世得以議吾君之得失也。 忠臣雖在畎畝, 猶不忘君, 況職在侍從之列者乎? 犬馬之誠, 不能自已, 瀆犯天(戒)〔威〕 , 敢進狂僭之說。 臣等聞, 古者諫無官, 工誦箴諫, 瞽誦詩諫, 史獻書諫, 士傳言諫, 近臣盡規, 親戚補察。 又有商旅議於市上, 而公卿、大夫下至士庶、百工之賤, 皆得以諫。 是故, 上下相交, 而言路廣。 至於後世, 人私其身, 士私其言, 始設諫官, 以寄耳目之責。 又慮其不能盡言, 故和顔而受, 虛懷而納, 使得盡言而不諱。 古昔帝王莫盛於, 而稱其德則曰: "嘉言罔攸伏。" 曰: "師汝昌言。" 曰: "從諫弗咈。" 曰: "養老乞言。" 此數聖人者, 能舍己從人, 故天下之善皆歸焉。 及後之衰, 龍逄, 比干, 設監謗, 誅腹誹, 皆國滅身亡, 而天下之惡皆歸焉。 前代所以納諫而興, 拒諫而亡者, 載在史策, 昭然可觀。 殿下豈不見而知之歟? 且成廟在位二十六年之間, 聖學旣已高明, 猶且日三講問; 迎訪朝臣, 討論古今, 猶恐下情不得上達, 又設輪對, 各陳己見, 樂聞讜言, 優待諫士, 以釀成臣子敢言之氣, 此亦殿下之所親覩也, 而卽政以來, 倦御經筵, 曠接群臣。 偏執己私, 力拒人言。 囚辱諫官, 摧折直氣, 以墜成廟培養之功, 近日之事, 尤爲寒心。 自乙卯以至今日, 三載之間, 臺諫治事之日少, 伏閤之日多, 朝綱解弛, 民怨鬱積。 名雖有臺諫, 而實無臺諫也。 人主之所從聞其過者, 特臺諫而臺諫亦不得其言, 則人主之耳目蔽窒, 而若聾之無聞, 瞽之無見, 塊然孤立, 雖欲不至顚蹶得乎? 《易》曰: "上下不交, 而天下無邦。" 無邦者, 亡國之謂也。 上下不交, 則雖有朝廷君臣, 亡國之形已具矣, 臣等恐國勢將至於不可救也。 竊見近歲災異疊見, 地震日暈, 冬雷夏雪。 白氣橫天, 金星(盡)〔晝〕 明。 邊氓疾疫, 死亡殆盡。 災變之作, 雖春秋衰世, 未有如今日之甚者, 此豈無自而然歟? 殿下尙不知懼, 乃謂: "古亦有之。" 殊無側修之心, 臣等不勝痛憤。 昔失政, 日月薄蝕, 山谷易處, 雨雪雷電, 失序相乘。 自此之後, 天下大亂。 之亡也, 熒惑襲月, 太白經天, 無雲而雷。 之將衰也, 霜雪夏降, 列星失行, 晝多晦暝, 海水沸騰, 自古災不虛應者如此。 今國家雖號爲昇平無事, 而爵賞僭濫, 刑罰失宜, 獄訟留滯, 曲直未別。 數月之間, 赦書三下; 一日之內, 命令屢更。 費用無節, 府庫幾竭。 禁苑深密, 野獸成群。 風俗侈靡, 百僚解體。 吏多不廉, 士鮮知恥。 賦役太繁, 土木不輟。 賢士擯斥而抱屈, 奸邪抵隙而進用。 宦寺怙寵而輕憲, 外戚驕縱而侮法。 此正衰微亂亡之兆, 而大臣持祿顧望, 不肯盡言。 臺諫、侍從雖或進言, 亦不見聽, 此國事所以日非, 而天譴之所以沓至也。 伏願殿下, 勿以自用爲善, 而改過不吝; 勿以忠言爲逆, 而從諫弗咈; 勿以小康爲可恃, 而思覆隍之戒; 勿以災變爲可忽, 而修應天之誠, 太平之基, 宗社之福也。

不從。 政院將藝文館疏啓: "自古人君畏史官者, 以其近侍於左右, 人君善惡, 無不直書, 使天下後世得以議己也。 是故, 不敢肆然爲惡。 人君而不畏史官, 則何所畏憚乎? 今觀此疏, 言甚切直, 時政之失, 悉書無隱。 此皆有所見聞, 而直書矣。 以此而書之史冊, 則萬世之下, 無乃有議之者乎? 且疏中云: ‘賢士抱屈而擯斥, 奸邪投隙而進用。’ 此言尤切。 君子小人之進退, 實係國家之治亂, 殿下尤所當體念也。 宜訪問其人, 若果賢而抱屈, 則亟擢用之; 奸而進用, 則亟黜去之, 此卽聖治之大事, 故特擧而啓之耳。" 傳曰: "名之曰, 雖孝子、慈孫, 百世不能改也。 若予所爲則已, 雖予所不爲, 書諸史冊, 則將何所辨明乎? 所云奸邪, 必指士洪也。 若有賢士, 則大臣豈無言之者乎? 然第召翰林等問之。" 姜德裕等書啓:

臣等所指賢士, 蓋謂鄭誠謹趙之瑞也。 誠謹正直、孝廉, 曾爲海州驪州牧使時, 政尙淸簡, 民至今, 愛之如父母。 之瑞亦淸直人也, 嘗爲慶州判官、昌原府使, 守法不阿, 奸吏畏服, 民亦至今愛慕。 此二人者, 皆士林所稱道, 而先王之所取重者也。 頃以狂人柳承陽之言, 命不注擬, 廢棄不用。 此臣等所謂擯斥而抱屈者也。 奸邪蓋謂任士洪鄭崇祖也。 士洪在先王朝, 交結朋黨, 濁亂朝政。 成宗灼知其奸, 終不加一級。 崇祖曾判戶曹, 私通商賈, 誣上圖利, 奸邪多術, 貪濁無比。 二人皆小人之尤者也。 今特陞崇品, 此臣等所謂投隙而進用者也。

傳曰: "我國朝士非獨誠謹之瑞而已, 騰揚於柳承陽之口舌。 此二人如周公則可矣, 不然則豈其可乎? 之瑞則舊爲書筵官, 予知其爲人也。 成宗之昇遐也, 在廷之臣追慕之誠, 非不至也, 卒哭之後, 莫不食肉矣。 誠謹獨不食肉, 此非阿黨乎? 此人等非終棄不用也, 然此非在下之人所得論也。"


  • 【태백산사고본】 7책 2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228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