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성현 등이 신위를 옮기는 종묘 조천의를 지어 아뢰다
예조 판서 성현(成俔)과 참판 신종호가 종묘 조천의(宗廟祧遷儀)558) 를 지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본조(本朝)의 세묘(世廟) 제도를 살펴보오니, 대실(大室)이 7칸이요, 좌우쪽 익실(翼室)이 각각 1칸씩인데, 태조께서 제1칸에 계시어 1실(室)이 되고, 태종께서 제2칸에 계시어 2실이 되고, 세종께서 제3칸에 계시어 3실이 되고, 문종께서 이 제4칸에 계시어 4실이 되고, 세조께서 제5칸에 계시어 5실이 되고, 덕종께서 제6칸에 계시어 6실이 되고 예종께서 제7칸에 계시어 7실이 되고, 공정(恭靖)559) 께서는 나가 좌익에 있습니다. 예법에, 천자는 7묘(廟)요 제후는 5묘인데, 부자간에는 소(昭)와 목(穆)560) 을 달리하고 형제간에는 소와 목을 같이하기 때문에, 형제는 같은 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종묘에, 태조께서 1세(世)가 되고, 공정·태종께서 1세가 되고, 세종께서 1세가 되고, 문종·세조께서 1세가 되며, 덕종·예종께서 1세가 되니, 위패 차례가 이미 5세가 되었는데 만일 성종 대왕을 부묘(祔廟)561) 하면 6세가 되어서 묘수가 벌써 지났으니, 갈아 내 모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조 대왕은 창업하신 시조로서 백대에 옮기지 않는 신주가 되며, 세종 이하는 4대의 친(親)이 되니 내어 모실 수 없으며, 태종만이 친진(親盡)하였으니 내어 모셔야 할 것이지만, 그 공덕을 가지고 논한다면 내어 모실 수 없습니다. 옛 선비가 이르기를 ‘부의 소(昭)와 자의 목이 정한 숫자가 있는 것은 예(禮)요, 공이 있는 분은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분은 종(宗)이라 하여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은 의(義)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에서는 3소 3목 외에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묘(廟)가 따로 있으며, 노(魯)나라에서는 2소 2목 외에 노공(魯公)의 세실(世室)이 따로 있었습니다. 정말 공덕이 있다면, 세수(世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입니다. 또 송(宋)나라의 경우에는, 광종(光宗)의 대에 와서 태종(英宗)·신종(神宗)·철종(哲宗)·휘종(徽宗)·흠종(欽宗)·고종(高宗)·효종(孝宗)이 그 묘수가 이미 7세가 지났으며, 선조(宣祖)·태종(太宗)·진종(眞宗)·인종(仁宗)·영종(英宗)은 친진하였으니 그 묘를 헐어야 할 것이지만, 그때 조정 의논이 난처하게 여겼는데, 주희(朱喜)가 말하기를 ‘태조·태종·인종은 공덕이 무성하니 주나라 문왕·무왕의 백세 불천(百世不遷)하는 예에 준하여 따로 세실(世室)을 만들고, 고종은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였으니 따로 세실을 만들어 역시 백세 불천하게 하며, 희조(僖祖)는 시조가 되고, 신종·철종·휘종·흠종·고종·효종은 친(親)이 되므로, 묘가 통틀어 10실이 되는데, 태조·태종·인종·고종은 세실의 신위로서 3소 3목 밖에 있으니, 실(室) 수효에 계산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희(朱熹)의 의논으로 본다면, 공덕이 있는 임금은 비록 10여 세가 지나더라도 묘를 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태종께서는 곧 주나라 문왕·무왕과 송나라의 태조·태종이요, 세종께서는 곧 송나라의 인종이며, 세조 역시 중흥한 임금이니, 공으로 보나 덕으로 보나 모두 백세 불천의 신위이니, 태종은 결단코 옮길 수 없습니다. 공정왕은 묘호(廟號)를 올리지 않았고, 복상 제도도 역시 27일 만에 벗는 데 그쳤습니다. 또 능에도 절제(節祭)만을 거행하니, 그 예절이 각실의 신위에 대한 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초 자리를 고쳐 모실 때에도 의논하는 이들의 말이 ‘임시로 좌익실에 옮겨 제사드리다가 친진하면 그친다.’ 하였는데, 지금 이미 친진하였으니, 조묘(祧廟)562) 에 모셔야 하겠는데, 지금 조묘 제도가 없으니, 처리하기가 실로 난처합니다. 옛날 한(漢)나라의 위현성(韋玄成) 등이 의논하기를 ‘훼묘(毁廟)의 신주는 능원(陵園)에 매장한다.’ 하여, 원제(元帝)는 태상 묘주(太上廟主)이므로 능원에 매장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예에 의거하여 공정왕과 정안 왕후(定安王后)의 묘주(廟主)를 후릉(厚陵)563) 에 매장함이 마땅할까 하옵니다. 또 송나라에서 희조·익조(翼祖)의 신위를 조천(祧遷)하는 데 있어서 예절에 준하여 〈어명(御名)〉 휘하지 않았으니 기일(忌日) 관계도 이 예에 의하여 국기(國忌)에서 제거하고 능제(陵祭)는 예전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문종의 신주는 좌익실에 봉안하되 그 의물(儀物)·제향(祭享)은 모두 공정왕의 예에 의하게 하며, 세조 이하는 차례로 올리고, 성종의 신위는 제7실에 모시는 것이 예에 마땅하겠습니다.
또 《실록》을 살펴보오니, 세종 14년에 문소전 원묘(文昭殿原廟)564) 제도를 정하는데 후침(後寢) 5칸을 지었으며, 전전(前殿)은 통하여 3칸입니다. 태조 신위는 북쪽에 모시고 소 2위는 동쪽에 모시고 목 2위는 서쪽에 모시어, 그것을 정제(定制)로 삼아서 후세에 더 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곳에 지금 5위가 이미 찼으니, 만일 성종을 모시게 된다면, 5위 중에서 어느 한 위를 뽑아 내어야 하겠습니다. 세종 이하는 지금 4친(四親)에 해당하니 결코 나갈 수 없고, 태종께서 친진하여 4친 밖에 있으니 준례에 의하여 갈아 내 모셔야 하겠는데, 문종의 예에 의하여 능원에 매장하는 것이 마땅하나, 태종은 종묘에 있어서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어 백세 봉향하는데, 원묘(原廟)에서만 봉향을 받지 못한다면 정리나 예절에 있어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대저 원묘는 한(漢)나라 때 시작되었으며, 송나라의 경령궁(景靈宮)도 한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종묘 외에〉 각각 신전(神殿)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예에 의거하여 따로 한 전을 지어서 태종을 보안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후세에 만일 이 예에 의거하지 않고 각각 전을 지으려고 한다면 앞으로 번거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께서는 대업(大業)을 협찬하여 이루셨으니, 다른 공덕 있는 임금의 비할 바가 아니므로 후세에서도 이것을 가지고 준례를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종묘 조천(祧遷)의 제도는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신들의 얕은 소견으로 경솔히 의논할 것이 아니오니,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모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39 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558]종묘 조천의(宗廟祧遷儀) : ‘조천’은 먼 조상 신위를 종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옛날에는 천자 7묘(廟), 제후 5묘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종조에, 종묘 서쪽에 따로 영녕전(永寧殿)을 짓고 5묘 이상 되는 선대의 군왕으로서 특별히 유공한 왕을 제외한 군왕의 신위를 옮겨 모시고 제사 드렸다. 종묘 조천의는 그 조천을 거행하는 의식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 [註 559]
공정(恭靖) : 정종.- [註 560]
소(昭)와 목(穆) : 소·목은 사당의 신주 배열의 순서를 말하는 것인데 시조를 1위로 하여 2, 4, 6이 소가 되고, 3, 5, 7이 목의 순위로 배열된다. 단 형제간에는 같은 소목이 되기 때문에 한 실에 봉안되는 것이다.- [註 561]
부묘(祔廟) : 신위를 사당에 함께 모시는 것.- [註 562]
조묘(祧廟) : 조천된 신위를 모시는 사당.- [註 563]
후릉(厚陵) : 정종능.- [註 564]
문소전 원묘(文昭殿原廟) : 원(原)은 출생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중국 한(漢)나라에서 고조(高祖)의 신위를 종묘 외에 다시 그의 고향인 패현(沛縣)에 사당을 짓고 모신 데서 출발하였다. 문소전은 처음 태조의 비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를 봉사하던 곳인데, 세종 14년(서기 1432)에 왕실 선대의 사당이 각기 나눠져 있음을 불편히 여겨 송나라 경령궁(景靈宮) 제도에 의거하여 경복궁 북쪽에 따로 원묘를 짓게 하고 그 해 10월에 문소전·광효전(廣孝殿)의 신위를 옮겨 봉안하고 이름을 그대로 문소전이라 하였으며 또 태조·태종의 신위도 봉안하여 명실 공히 원묘의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궁궐지(宮闕志).○辛亥/禮曹判書成俔、參判申從濩撰宗廟祧遷儀以啓曰: "臣等謹按本朝世廟, 大室七間, 左右翼室各一間, 而太祖在第一間爲一室, 太宗在第二間爲二室, 世宗在第三間爲三室, 文宗在第四間爲四室, 世祖在第五間爲五室, 德宗在第六間爲六室, 睿宗在第七間爲七室, 恭靖出寓左翼。 《禮》, 天子七廟, 諸侯五廟。 父子異昭穆, 兄弟同昭穆, 故兄弟爲一室。 今宗廟太祖爲一世, 恭靖、太宗爲一世, 世宗爲一世, 文宗、世祖爲一世, 德宗、睿宗爲一世, 位次已滿五世。 若(附)〔祔〕 成宗則是爲六世, 廟數已過, 不得已遞出之矣。 太祖以創業始祖, 爲百代不遷之主, 世宗以下則以四親不可出, 惟太宗親盡當出, 而論以功德, 則不可出也。 先儒云: ‘父昭子穆, 有常數者禮也; 祖功、宗德, 而無定法者義也。’ 故周於三昭、三穆之外, 而有文、武之廟; 魯於二昭、二穆之外, 而有魯公之世室。 苟有功德, 則不拘於世數尙矣。 且宋至光宗之世, 太宗、神宗、哲宗、徽宗、欽宗、高宗、孝宗廟數已過七世, 而宣祖、太宗、眞宗、仁宗、英宗親盡當毁, 其時朝議難之。 朱熹以謂: ‘太祖、太宗、仁宗功德茂盛, 宜准周之文、武, 百世不遷, 號爲世室。 高宗受命中興, 別爲世室, 亦百世不遷。 僖祖爲始祖, 神宗、哲宗、徽宗、欽宗、高宗、孝宗爲親廟, 通爲十室, 而太祖、太宗、仁宗、高宗。 以世室之主, 在三昭三穆之外, 而不計室數。’ 以朱熹之議觀之, 有功德之主, 則雖過十餘世, 亦當不毁矣。 我太祖、 太宗, 卽周之父〔文〕 、 武, 宋之太祖、太宗, 而世宗卽宋之仁宗, 世祖亦中興之主, 以功以德皆百世不遷之主, 太宗決不可遷也。 恭靖王不上廟號, 喪制亦止二十七日而除。 且於寢陵只行節祭, 其禮與各室不同。 當初遞出之時, 議者謂: ‘權遷左翼室祭之, 親盡則止。’ 今已親盡, 當藏於祧廟, 而今無祧廟之制, 處之實難。 昔漢 韋玄成等議云: ‘毁主瘞於園。’ 元帝以太上廟主瘞於寢園。 今依此例, 恭靖王、定安王后廟主瘞於厚陵爲便。 且宋祧遷僖祖、翼祖, 而準禮不諱。 忌日亦依此例, 除國忌, 其陵祭則依舊施行。 文宗神主奉安於左翼室, 其儀物、祭享一依恭靖王之例。 世祖以下次次而陞祔, 成宗神位於第七 室, 於禮爲當。 又按《實錄》, 世宗十四年定 文昭殿原廟之制, 營後寢五間, 前殿通三間。 太祖在北, 昭二位在東, 穆二位在西, 以爲定制, 使後世不得加造。 今五位已盈, 若祔成宗五位之中, 亦當遞出。 世宗以下則當代四親, 決不當出, 太宗親盡則在四親之外, 例當遞出, 其依文宗例, 瘞於寢園爲宜。 然太宗在宗廟, 則爲不遷之主, 百世享之, 獨於原廟不受其享, 其於情禮有所未安。 夫原廟始於漢世, 宋之景靈宮倣漢之制, 各立神殿。 今依此例, 別構一殿, 以安太宗爲便。 後世若不依此例, 永欲立殿, 則將不勝其煩。 太宗贊成大業, 非他有功德之主之比, 後世不可援以爲例也。 宗廟祧遷之制, 乃國家重事, 非臣等淺見所可輕論, 廣收群議何如?" 傳曰: "可。"
- 【태백산사고본】 3책 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39 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註 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