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이 조칙을 주고받는 예가 서로 달라 중국이 우리의 예를 따른 것을 아뢰다
문례관(問禮官) 김수동(金壽童)이 복명(復命)하는 서계에 이르기를,
"신이 금월 27일에 의흥관(義興館)에 당도하여 중국 사신을 만나보고 전례(前例)의 단자(單子)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봉해서 부치신 의주(儀注)와 가르쳐 주신 사연은 이미 판서(判書)에게 말해서 넘겼습니다. 그 조칙(詔勅)을 객관(客館)에 유치하고서 먼저 사제(賜祭)하고 뒤에 봉배(封拜)하는 것도 우리 국가에는 진실로 손상되는 바 없으나 다만 지난날에 중국 열성(列聖)께서 파견하신 여러 대인(大人) 및 우리 선왕께서 강행(講行)하신 옛 예식과는 너무도 서로 같지 아니하므로 지금 우리 나라에서 수봉(受封)한 이후로 사왕(嗣王)의 봉배(封拜)와 전왕의 시제(諡祭)에 관하여 거행한 선후 차례와 월·일까지 자상히 갖춘 것을 고찰하고서 다시 취품(取稟)하려 하는 바입니다.’ 하였더니, 왕 천사(王天使)는 말하기를 ‘귀국의 전례가 그러하다 하지만 만약 이 예에 따른다면 이는 조정의 명령을 위배하는 것이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봉습(封襲)에 대한 것도 역시 예부(禮部)의 의주(儀註) 속에 있는 일이니, 대인이 비록 우리 나라의 전례에 의하여 진행한다 할지라도 특히 선후의 관계일 뿐이요 조정의 의주를 위배한 것은 아니오.’ 하였더니, 김 대감(金大監)이 말하기를 ‘지금 바친 전례의 단자가 여기 있으니 사행이 돌아가면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써서 황제께 주달하기를, 「문례관(問禮官) 아무개가 아무 사관에 와서 그 나라 전례의 단자를 바치기 때문에 전례에 의하여 행하였습니다」고 한다면 책임이 문례관에 있을 것이니 우리들은 우선 전례에 따라 행하겠소.’ 하였고, 왕 천사는 말하기를 ‘사시(賜諡)를 아니하고 봉배(封拜)를 먼저 하면 이는 자기를 먼저 하고 전왕을 뒤로 하는 일이요.’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만약 전례가 없다면 어찌 감히 여러 번 번거롭게 하리까.’ 하니, 왕 천사는 말하기를 ‘이 예는 다만 경태(景泰)원년380) 이후의 일만 있으니, 그 이전 것은 어찌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경태 원년 이전에도 비록 강헌왕(康獻王)·공정왕(恭定王)이 계셨지만, 다 살아 계실 때에 전위(傳位)하였으므로 예가 이와 다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더니, 천사는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가는 날 마땅히 전례에 따라 봉배를 먼저 하고 사제를 뒤에 하겠소.’ 하였고, 왕 천사는 말하기를 ‘지금 가지고 온 단자(單子)가 좋지 아니하니, 다시 좋은 종이에다 전례를 갖추어 좋은 날을 가려서 세자(世子)가 서한을 부쳐오면 우리들은 이에 의거하여 써서 황제께 주달하겠소.’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이 단자는 우선 세 분 대인께 올리고 취품하자는 것이니 마땅히 고쳐 써 오겠으나, 다만 우리 전하께서 조칙(詔勅)을 열기 전에는 응당 사사로이 조사(詔使)에게 서한을 전달하지 못할 것이며, 또 그런 전례도 없습니다.’ 하였더니, 왕 천사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소소한 절차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 나 역시 사제(賜祭)를 먼저 하고 봉배(封拜)를 뒤로 하는 의주에 의하겠소.’ 하고, 김 천사는 말하기를 ‘비록 세자가 서한을 전달하지 아니할 지라도 의정부(議政府)에서 상신하면 됩니다.’ 하기로, 신은 말하기를 ‘마땅히 판서(判書)와 의논하겠습니다. 의주(儀註)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리까?’ 하였더니, 천사는 말하기를 ‘당연히 전에 가져온 의주를 쓰겠소, 다만 국왕(國王)이란 문구를 세자로 고쳐 주시오.’ 하므로, 신이 이미 작별하고 물러났는데, 천사가 신을 불러 묻기를 ‘조칙을 맞을 적에 제부(祭賻)와 시고(諡誥)는 어느 곳에 두어야 하겠소?’ 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조칙과 제부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영접하여, 조칙은 곧장 왕궁(王宮)으로 들어가고, 제부는 태평관(太平館)에 안치(安置)해 두었다가 개조례(開詔禮)가 끝난 다음에 전하께서 태평관에 나아가서 제부를 안치한 곳에 배은(拜恩)하고서 대인과 더불어 차차로 행례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하였더니, 천사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조칙은 왕궁으로 돌아가고 선왕의 제부만 객관(客館)에 둔다는 것은 매우 미안하니, 마땅히 조칙과 제부를 동시에 영접하여 함께 태평관으로 들어가서 세자께서 향(香)을 올리고 다섯 번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한 뒤에 제부를 안치하고서 조칙을 받들고 왕궁에 나아가 반포하는 것이 가장 정(情)과 예(禮)에 합당하겠소.’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조칙을 영접하는 것은 성대한 예식이므로 전례에 궁성 문에다 채붕(綵棚)381) 을 마련하고서 맞으며, 태평관 문에는 다만 채승(綵繩)만 매둘 따름이요, 아울러 조칙까지 태평관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며, 또 조칙을 펼 적에 전후로 사배(四拜)하는 절차가 있소. 조칙은 하나인데 이미 태평관에서 절하고 또 왕궁에서 절한다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을 것 같으니 전례에 의하기를 청하오.’ 하였더니, 천사는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지만 전왕의 제부를 버려 두고서 먼저 조칙을 개독(開讀)하는 것은 불가하오. 다만 길례(吉禮)와 흉례(凶禮)가 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제부를 동쪽에, 조칙을 서쪽에 배설하고서 세자가 향을 올리고 다섯 번 절하는 예식을 행한 뒤에 왕궁으로 나아가 조칙을 개독(開讀)하는 대례(大禮)를 행하는 것이 옳으니, 여러 말을 하지 마시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오배(五拜)는 우리 나라에 없는 예식이오. 전에 온 조사(詔使)들도 다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있다고 말하였지만, 《대명집례》가 우리 나라에 반포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비록 조칙을 반포하는 대례에 있어서도 역시 사배의 예를 행했소.’ 하였더니, 김 천사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귀국의 예식에 따르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오.’ 하고, 왕 천사는 말하기를 ‘조칙을 맞을 때에 세자는 무엇을 타야 하오?’ 하므로, 신은 답하기를 ‘당연히 연(輦)을 타지요.’ 하니, 천사는 말하기를 ‘조칙을 맞을 때에 어떻게 연(輦)를 탈 수 있소? 이는 황제의 명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오.’ 하므로, 신은 답하기를 ‘조칙을 맞는 것은 성대한 예식이므로 의물(儀物)을 갖추어야 하는데, 연 역시 의물이니, 연을 타고 의물을 갖추는 것이 바로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니, 천사는 말하기를 ‘조칙이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감히 견여(肩輿)도 타지 못하고 말을 타는데, 세자가 어찌 연을 타서 되겠소.’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세자가 되었을 적에 이미 황제께서 흠사(欽賜)하신 칠장(七章)의 면복(冕服)을 받았으니, 지금 조칙을 맞는 데에 있어서도 역시 이 면복을 입어야 하는데, 어찌 천자의 명복(命服)을 입고서 말을 탈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왕 천사는 말하기를 ‘동시강(董侍講)·애낭중(艾郞中)이 와서 행하던 예식을 속임 없이 말해 주시오, 하루에 나누어서 행했소? 이틀에 따로 따로 행했소?’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동 대인은 하루에 나누어 행했는데, 비록 우리 나라에서 조사(詔使)의 명을 어기기 어려워서 따라 행했지만, 옛 예를 변해서 온 나라가 의혹했었습니다.’ 하였더니, 김 천사는 말하기를 ‘어찌 면복(冕服)을 입고서 말을 탈 수 있으며, 또 어찌 한 가지 일인데 나누어 행할 수 있으며, 우리들도 어찌 노고가 없겠는가 마땅히 귀국의 예를 따를 터이니, 빨리 봉배(封拜)를 먼저 하고 사제(賜祭)를 뒤에 하는 의주를 가지고 오시오.’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2 책 681 면
- 【분류】외교-명(明)
○問禮官金壽童, 復命書啓曰:
臣今月二十七日, 到義興館, 謁天使, 呈前例單子, 仍曰: "大人封付《儀注》及所敎辭緣, 已說與判書, 其詔勑, 留置客館, 先賜祭後封拜, 於國家, 固無所虧。 但與曩時天朝列聖所遣詔使諸大人曁我先王, 講行舊禮, 大不相同。 故今考我國受封以後, 嗣王封拜、前王諡祭, 所行先後次第, 詳具日月, 欲更取稟。" 《王》天使曰: "汝國前例, 雖如此, 若從此例, 是背朝廷之命。" 臣曰: "封襲, 亦是禮部《儀註》中事。 大人, 雖從我國之例, 特先後耳。 不是違背朝廷《儀註》也。" 金大監曰: "今呈前例單子, 在此。 使還, 當據此題奏曰: "問禮官某, 到某館, 呈其國前例單子, 故依前例, 行之。’ 云云, 則責在問禮官矣。 吾等, 姑從前例, 行之耳。" 王天使曰: "未賜諡, 而先封拜, 是先已而後前王也。" 臣曰: "若無前例, 何敢屢煩。" 王天使曰: "此例, 只有景泰元年已後事, 其已前, 則何不錄也?" 臣答曰: "景泰元年以前, 雖有 康獻王、恭定王, 然皆於生時, 傳位。 例與此異, 故不錄耳。" 天使曰: "入京之日, 當從前例, 先封後祭。" 王天使曰: "今來單子不好, 更於好紙, 具前例、吉日, 世子寄書, 則俺等, 當據此題奏。" 臣答曰。 "此單子, 姑呈三位大人, 取稟耳, 當改書而來。 但殿下, 於未開詔之前, 不應私致書於詔使也。 且無前例。" 王天使曰: "如此小節, 皆欲不爲, 則吾亦當依先祭、後封之儀耳。" 金天使曰: "雖非世子寄書, 議政府申之, 可也。" 臣曰: "當議於判書。" 仍曰: "《儀註》, 何以爲之。" 天使曰: "當用前持來《儀》耳。 但改國王爲世子。" 臣旣辭退, 天使呼臣問曰: "迎詔勑時, 祭賻諡誥, 當置之何處?" 臣答曰: "殿下, 迎詔、勑祭賻于慕華館 詔勑直向王宮; 祭賻則入安於(大平館)〔太平館〕 , 竢開詔禮畢, 殿下詣(大平館)〔太平館〕 , 拜恩于祭賻安處, 仍與大人, 次次行禮, 乃例也。" 天使曰: "不然, 勑歸王宮, 而先王祭賻, 空置客館, 甚爲未安。 當同迎詔勑祭賻, 俱入太平館, 世子, 上香, 行五拜叩頭禮後, 安置祭賻訖, 捧詔勑, 詣王宮頒之, 甚合情禮。" 臣答曰: "迎詔勑, 盛禮也。 例於宮門, 設綵棚以迎。 太平館門, 則只結彩而已。 幷入詔勑於太平館, 未安。 且於開詔時, 有前後四拜之節。 一詔勑, 而旣拜於館中, 又拜於王宮, 似不合禮, 請依前例。" 天使曰: "雖然, 委棄前王祭賻, 而先開詔, 不可。 但吉凶不同, 當設祭賻於東、詔勑於西, 世子, 上香, 行五拜禮。 然後詣王宮, 行開詔大禮可也, 毋多言。" 臣曰: "五拜, 東國所無之禮。 在前, 詔使皆言, 於《大明集禮》有之, 然《大明集禮》, 未頒於本國。 故雖頒詔大禮, 亦行四拜禮爾。" 金天使曰: "然則當從汝國之禮, 不妨。" 王天使曰: "迎詔時, 世子當何乘也?" 臣答曰: "當乘輦。" 天使曰: "迎詔時, 安得乘輦乎? 是則非尊敬帝命也。" 臣答曰: "迎詔, 盛禮也, 當備儀物。 輦亦儀物, 則乘輦而具儀物, 乃所以尊敬之也。" 天使曰: "詔勑在前, 吾等不敢乘肩輿, 而乘馬矣。 世子, 何可乘輦?" 臣曰: "殿下爲世子時, 已受欽賜七章冕服。 今迎詔勑, 亦當服此。 豈可服, 命服而乘馬乎?" 王天使曰: "董侍講、艾郞中所行之禮, 須宜言毋誑。 一日分行乎? 再日各行乎?" 臣答曰: "董大人, 一日分行。 雖我國, 重違詔使之命, 從而行之。 然變古禮, 擧國竊惑焉。" 金天使曰: "安有冕服而乘馬乎? 亦安有一事而分行乎? 吾輩, 亦無勞苦乎? 當從汝國之例。 速齎先封後祭之儀、而來," 云矣。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2 책 681 면
- 【분류】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