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대왕 행장(行狀)
그 예부(禮部)에 보낸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국왕(國王)의 성(姓) 모(某) 휘(諱) 모(某)는 회간왕(懷簡王)001) 의 제 2자(第二子)인데, 모비(母妃)는 한씨(韓氏)로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확(韓確)의 딸이었습니다. 천순(天順)002) 정축년003) 7월 30일[辛卯]에 왕이 탄생하였는데, 회간왕이 세자가 되어 일찍 훙(薨)하자, 왕의 조부(祖父)인 혜장왕(惠莊王)004) 께서 왕을 궁중에 기르셨습니다. 왕은 천자(天資)가 영이(穎異)하고 기도(器度)가 웅위(雄偉)하므로, 혜장왕께서 기특히 여겨 사랑하셨으며,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셨습니다. 왕이 일찍이 동모형(同母兄)인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과 함께 왕궁(王宮)에 있었는데, 마침 천둥과 비가 갑자기 몰아쳐 시인(寺人)이 곁에 있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놀라 넘어지면서 넋을 잃었으나 왕은 조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하니, 혜장왕께서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성화(成化) 5년005) 11월에 왕의 숙부(叔父)인 양도왕(襄悼王)006) 이 병(病)으로 위독하였는데, 아들은 나이가 어리고 또 병이 있었으므로 후계자를 고르는데 왕이 덕기(德器)가 숙성(夙成)하여, 효제(孝悌)하고 학문을 좋아함으로써 국무(國務)를 권서(權署)007) 하게 하였습니다. 양도왕이 승하하자, 왕이 배신(陪臣) 송문림(宋文琳)을 보내어 부음(訃音)을 고하고, 권감(權瑊)이 승습(承襲)008) 을 청하니, 성화 6년009) 5월에 선황제(先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비도(丕圖)010) 를 이어 지키고 환우(寰宇)011) 를 무어(撫御)하여, 먼 지방과 외딴 지역까지도 모두 군장(君長)을 세워서 그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고, 대[世]가 바뀌면 봉작(封爵)을 내려 주는 것에 그 떳떳한 법이 있었다. 고(故) 조선 국왕 이(李) 휘(諱)는 선왕(先王)을 이어받들고 사대(事大)하여서 충효(忠孝)로 알려짐이 있었는데, 봉작을 받은 지 한 해를 지나지 못하여 부(訃)를 고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이 서업(緖業)012) 은 마땅히 친족의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므로, 이제 태감(太監) 김흥(金興)을 특별히 보내어 칙서(勅書)를 받들고 가서 왕의 조카 휘(諱)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이어서 다스리게 한다. 생각하건대 휘는 실로 혜장왕(惠莊王)의 손자이니, 본국의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한 마음으로 받들어 순종하여, 동토(東土)를 화합하게 하고 중조(中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그대의 선왕(先王)의 업(業)을 떨어뜨림이 없게 하라. 이는 짐이 그대 나라를 권애(眷愛)하는 뜻이다.’ 하였고, 또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짐(朕)이 홍도(鴻圖)를 공경히 이어서 병한(屛翰)013) 을 존중하는 데 힘썼다. 이에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여 가까이 하고, 한결같이 사랑하여 차별이 없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이 동번(東藩)014) 은 세상에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일컬으니, 진실로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 어진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조선 국왕의 조카 휘(諱)는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학문이 숙성(夙成)하여 국론(國論)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종조(宗祧)015) 를 이음이 마땅하다. 이제 특별히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국사(國事)를 총통(總統)하게 한다. 아아! 오직 정성과 공경만이 몸을 닦을 수 있고 오직 예의(禮義)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오직 충성만이 사대(事大)를 할 수 있고, 오직 효도만이 종족을 보호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서 훈칙(訓飭)을 잊지 말지어다.’ 하였으며, 또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달(奏達)한 것을 보건대 그대의 숙부(叔父) 왕(王) 휘(諱)가 성화(成化) 5년 11월 28일에 훙서(薨逝) 하였다고 하므로, 이에 특별히 태감(太監) 김흥(金興)과 행인(行人) 강호(姜浩)를 보내어, 제문(祭文)을 가지고 가서 유제(諭祭)하게 하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지고 그대의 국인(國人)에게 보이며, 그대 휘(諱)를 봉(封)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서 나라 일을 이어 맡게 한다. 아울러 그대의 처(妻) 한씨(韓氏)를 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선업(先業)을 공경히 지켜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히 할 것이며, 충성을 돈독히 하여 조정을 섬기고 신의(信義)를 두터이 하여 인국을 화목하게 하며 절검(節儉)을 몸소 행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여, 동토(東土)로 하여금 백성이 편하고 물건이 풍족하게 하며 영구히 중국의 번보(藩輔)016) 의 중함이 되게 하라. 짐(朕)이 그대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그대와 비(妃)에게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채폐(綵幣) 등의 물건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 하였는데, 왕이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어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왕이 대소 신료(大小臣僚)로 하여금 각각 시의(時宜)를 진술하게 하고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 6품 이상이 각각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습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효자(孝子)·절부(節婦)와 그 행실이 특이한 자에게 정문 복호(旌門復戶)017) 하게 하여 이를 장려하고 홍문관(弘文館)을 대전(大殿) 곁에 설치하여 문학과 재행(才行)이 있는 선비 17원(員)을 골라 뽑아서 날을 바꾸어 직숙(直宿)하게 하여,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고 도의(道義)를 바르게 간하거나 풍자하여 간하게 하였습니다.
성화(成化) 7년018) 3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대뢰(大牢)019) 로 제사를 지내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문사(文士)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문난(問難)하게 하였습니다. 11월에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유충(幼沖)하여 선업(先業)을 이어받았는데, 무릇 조정(朝政)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이해(利害)를 마음을 다해 다스리고 정돈하였으나, 사기(事機)가 지극히 번거로와서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제 날씨가 춥고 음(陰)이 폐색(閉塞)하는 때를 당하여 건양(愆陽)020) 이 재앙을 이루니, 하늘의 뜻이 어찌 있는 바가 없겠는가?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매 진실로 과매(寡昧)함에 말미암았다. 여러 번 바른 말을 구하였으나 말을 다해 극진히 간하는 자가 없고 여러 번 어질고 준수(俊秀)한 이를 구하였으나 미천한 사람을 추천해 드날리게 한 자가 없었다. 백사(百司)를 독려해 다스려도 오히려 해이함이 있고 옥언(獄讞)021) 을 심리(審理)하여도 오히려 억울함과 유체(留滯)됨이 있으며, 백성의 폐단을 부지런히 근심하였으나 억울함이 아직 많고 공역(功役)을 줄이기를 힘썼으나 공역을 일으킴이 그치지 아니하니, 이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널리 효유(曉諭)하여 자세히 연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8년022) 에 황태자(皇太子)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예관(禮官)이 다음날 거애(擧哀)하기를 청하니, 말하기를, ‘슬픔이 마음속에 간절한데 어찌 내일을 기다리겠는가?’고 하면서, 곧 백관(百官)을 거느리고는 거애하고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위(陳慰)하였습니다.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생재(生財)는 근본(根本)023) 에 힘쓰는 데 있고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쓰기를 절약하는 데 있으니, 쓰기를 절약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검약(儉約)해야 할 것이다. 대저 사치하면 쓰임이 반드시 많을 것이고 쓰임이 많으면 재물이 반드시 고갈될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지력(地力)이 소박(疎薄)하므로 근검 절용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재용(財用)의 부족함을 근심할 것인데, 하물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末端)024) 에 따르며 생산하는 자가 이미 적은데도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쓰는 것을 절제 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를 염려하여 말리(末利)에 따르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는 법을 정하며, 급하지 아니한 일은 파하고 무익한 비용을 없애어 그대 인민(人民)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려고 하니, 그대 인민은 농상(農桑)에 힘을 다하고 태만하지 말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사치하지 말며, 재물을 헤아려 절약하여 쓸 것이며, 함부로 허비하지 말 것이다. 집과 나라는 크고 작음은 비록 다르더라도 그 대체는 한 가지이니, 진실로 능히 줄이고 절약하는 데 마음을 두면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대 인민은 각각 내 뜻을 체득하여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라.’ 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상서(尙書)》를 보다가, ‘나무는 먹줄을 따라 깎으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諫)하는 말에 따르면 성(聖)해진다.’는 데에 이르자, 말하기를, ‘임금이 되는 도리(道里)가 무엇이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임금뿐만 아니라 신하가 된 자도 능히 극진한 말을 받아들인 뒤에야 능히 그 임금을 간할 수 있으니, 그대들도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사서(史書)를 읽다가,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도둑이 나타난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쫓아가 잡게 하였다. 그런데 아홉 사람 중에서 네 사람은 도둑이 아닌데도 유사(有司)가 황제가 이미 참(斬)하기를 결정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아뢰지 아니하고서 모두 죽였다.’는 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양제(煬帝)는 진실로 무도(無道)하다. 그러나 당시의 신하가 알면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양제로써 경계를 삼을 것이며 그대들은 또한 아뢰지 아니한 자로써 경계를 삼아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닦으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또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이르기를, ‘정관(貞觀)025) 초년에는 폐하께서 절검(節儉)하고 간(諫)함을 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셨는데 근래에는 영선(營繕)이 조금씩 많아지고 간하는 것에 자못 뜻을 거스림이 있습니다.’고 한 데에 이르자, 왕이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능히 끝까지 잘하는 자가 드물다.」고 하였는데, 태종의 초년에는 성대(盛大)하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였다. 태종의 어짊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태종에게 미치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근래에 자못 영조(營造)를 일으켰는데, 비록 모두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외(中外)에서 어떻다고 하겠는가? 내가 즉위[卽政]한 이래로 일찍이 일을 말한 한 사람의 신하도 죄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들은 뜻을 거스리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일이 적당하지 못함이 있거든 마땅히 극진히 말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를 길렀는데 시신(侍臣)이 이를 말하자, 왕이 곧 놓아 보내라 명하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10년026) 9월에 왕이 배신(陪臣) 김질(金礩)을 보내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용렬한데도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 선업(先業)을 얻어 지킨 지 몇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소생부(所生父)027) 신(臣) 휘(諱)는 선조(先祖) 혜장왕(惠莊王) 신(臣) 휘(諱)의 적자(嫡子)로서 명을 받아 세자(世子)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조서(早逝)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이미 왕의 작위를 받았고 처도 비(妃)가 되었는데, 소생부는 세자라고 일컫고 소생모는 명호(名號)가 없으니, 일국의 신민(臣民)의 일컫는 말이 순조롭지 못하여 인자(人子)의 마음에 진실로 미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미 선신(先臣) 양도왕(襄悼王) 휘(諱)의 후계자가 되었으니, 의(義)로 보아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고, 또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성(天性)의 친(親)은 은의(恩義)가 또한 중하니, 현양(顯揚)하는 회포를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작(爵)을 내리고 시호[諡]를 내려서 작은 정성을 펴게 하여 효(孝)로 다스림을 넓히소서. 지극한 소원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선황제(先皇帝)가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주본(奏本)을 보건대 왕의 소생부(所生父) 휘(諱)는 먼저 세자에 책봉(冊封)되었다가 일찍 서거(逝去)하고, 소생모 한씨(韓氏)는 현재 있으나 모두 명호(名號)가 없어, 비록 남의 후계자가 되어 의(義)가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양(顯揚)하려는 마음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다는 등의 말을 인하여 왕의 효성을 갖추어 알겠다. 이에 특별히 고(故) 세자(世子) 휘(諱)를 조선 국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회간(懷簡)으로 하며 한씨(韓氏)를 봉(封)하여 회간 왕비(懷簡王妃)로 삼아서 왕의 어버이를 나타내려는 뜻을 이루게 하고 또 고명(誥命)과 아울러 비(妃)의 관복(冠服)을 내려 주니, 영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이 은혜를 입자 감격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를 내리고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級)을 내려 주었으며, 표(表)를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1년028) 정월에 왕이 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029) 드디어 적전(籍田)030) 을 몸소 갈았습니다. 또 왕비로 하여금 친잠(親蠶)031) 하게 하였는데 모두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습니다. 8월에 하교하기를, ‘옥(獄)을 맡은 관리가 잘못하는 바가 하나만이 아니다. 포학[苛暴]하고 심각(深刻)한 자는 항상 얽어 짜는 데 빠지고, 혼미(昏迷)하고 용나(庸懶)한 자는 항상 엄체(淹滯)함에 빠지니, 얽어 짜기를 좋아하면 율문(律文)을 심각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하며 고신(栲訊)을 엄하게 하여 끌어다 붙여서 일체 보태고 꾸미니 허물없는 사람이 형벌에 잘못 걸리며, 엄체하기를 좋아하면 머뭇거리고 결단하지 못하여 문득 세월이 흘러 질곡(侄梏)032) 을 몸에 가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여 슬프게 부르짖다가 병이 들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이 상대하는 사람 없이 구석을 향하여 슬퍼하면 당(堂)에 가득한 사람이 즐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필부필부가 그 허물이 아닌 데에 죽으면 허물이 장차 누구에게 있겠는가? 대저 옥사(獄辭)는 처음에는 복잡한 것 같으나 정(情)을 인연하여 추구(推究)하면 칼로 벤 듯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다만 법을 맡은 자가 뜻을 더하지 아니한 것뿐이다. 그대는 혹 나직(羅織)하지 말고 그대는 혹 엄체(淹滯)하지 말 것이다. 어짊과 용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밝고 진실함으로써 이를 행하여, 죽는 자로 하여금 허물에 승복하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성화 12년033) 봄에 선황제(先皇帝)가 황상(皇上)을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고 칙서(勅書)를 내리기를, ‘왕은 본래 예의(禮義)를 가지고 조정을 충성으로 공경하였다. 이에 짐(朕)이 황저(皇儲)034) 를 세우고 여러 방면에 은혜를 베푸는데, 하물며 왕의 나라는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과 부사(副使) 행인사 좌사부(行人司左司副) 장근(張瑾)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게 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채폐(綵幣)와 문금(紋錦)을 내려 주게 하니, 수령(收領)하여 짐의 권대(眷待)하는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두 사신(使臣)이 왕을 보고 서로 이르기를, ‘참으로 어진 임금이다.’고 하였으며, 작별할 때에 임하여 정사(正使)가 시(詩)를 지어 왕에게 주었는데, 그 서(序)에 이르기를, ‘기순(祈順)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 번 왕과 더불어 서로 접견하고 마음으로 심히 아름답게 여겼다. 대저 그 어린 나이에 준수 영오(俊秀穎悟)하여 유(儒)를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하므로 위덕(威德)이 널리 펴지어서 일국이 화목하니, 진실로 다른 나라에 짝이 드문 바이다.’ 하였습니다. 왕의 전세(前世)의 명군(明君)과 암주(暗主)가 행한 선악(善惡)의 사적(事跡)을 모아서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려 병풍을 만들게 하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시(詩)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여 앉으나 누우나 보고 살피면서 권계(勸戒)로 삼았습니다.
성화 13년035) 8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서 선성(先聖)에게 술잔을 올리고 사례(射禮)를 행하였습니다. 인하여 제도 관찰사(諸道觀察使)에게 하교(下敎)하여 소재지(所在地)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음사례(飮射禮)를 행하게 하고 해마다 상례(常禮)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국왕의 생일에 훈구(勳舊)의 신하가 승사(僧寺)에 나아가서 축리(祝釐)036) 하자, 왕이 말하기를, ‘《시경》에 「복을 구함이 간사하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파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4년037) 4월에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서 친히 선성(先聖)에게 제사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노인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왕이 여러 노인에게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안으로 색황(色荒)038) 을 하고 밖으로 금황(禽荒)039) 을 하며, 술마시기를 좋아하거나 집을 높이 짓고 담장을 치장하는 것들 중 하나라도 이런 것이 있으면 망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임금의 약석(藥石)040) 이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써서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항상 보고 살폈는데, 이제 또 여러 노인들의 진술한 바를 들으니 모두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절요(切要)한 말이므로, 내가 마땅히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아니하겠다.’ 하였습니다.
성화 15년041) 겨울에 선황제가 사신을 보내 칙서를 내리기를, ‘건주(建州)의 여진(女眞)이 천명(天命)을 거역하고 은혜를 저버려서 여러 번 변경을 침략하기에 이미 감독(監督)·총병(總兵) 등의 관원으로 하여금 정병(精兵)을 뽑아 거느리고 기한을 정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그대 국왕은 계속해서 동번(東藩)이 되어 우리 국가에 충성을 바침이 더함이 있고 쇠함이 없으니, 짐이 심히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우리 군사가 적(賊)의 경내를 덮어, 적이 국경으로 달아나 숨는다면, 반드시 사로잡아 포로를 바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왕이 만일 편사(偏師)를 보내어 멀리서 응원하여 용맹한 군사의 위엄을 크게 떨쳐 견양(犬羊)042) 의 무리를 같이 섬멸하여서 역로(逆虜)가 이미 제거된다면, 왕의 적개(敵愾)043) 의 공(功)이 더욱 성할 터인데, 명성이 어찌 무궁토록 누리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는데, 왕이 곧 배신(陪臣)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치게 하였습니다. 어유소가 강물이 얼었다가 곧 녹자 군사가 건너기 어렵다고 하여 군사를 파하고 돌아오자, 왕이 어유소가 군기(軍期)에 미치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다시 배신(陪臣) 윤필상(尹弼商)·김교(金嶠)를 보내어 군사 4천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굴로 쳐들어가서 적의 무리를 사로잡고 참(斬)하며, 둔락(屯落)을 분탕(焚蕩)하고 아울러 사로잡힌 요동(遼東)의 인구를 찾아서 돌아왔습니다. 왕이 배신 어세겸(魚世謙)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게 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건주(建州)의 도적이 배역(背逆)하므로 짐이 일찍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대 나라 선왕(先王) 휘(諱)가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와서 능히 쳐서 이겼다. 그런데 이번에 도적이 그래도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므로 짐(朕)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던 바 왕이 군사를 발하여 와서 도왔는데, 전의 군사는 비록 강물의 얼음이 풀려서 건너기 어려움으로 인하여 우리 군사와 합세(合勢)하여 그 공을 같이 이룩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뒤의 군사는 또한 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토벌하여 그 부속(部屬)을 사로잡고 참(斬)하며,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우고 그들이 약탈한 우리 변위(邊衛)의 인구를 찾아서, 또 배신(陪臣)을 보내어 압송(押送)해 와서 바치게 하였으니, 왕의 충성은 선세(先世)의 뜻을 능히 이어받들었다고 이를 만하고 짐의 명령을 저버림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아름다운 이름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제 내관(內官) 정동(鄭同)과 강옥(姜玉)을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白金)·문금(紋錦)·서양포(西洋布)를 내려 주게 하고, 그 영병관(領兵官)인 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과 절도사(節度使) 김교(金喬)에게도 각각 예(例)와 같이 하사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게 하니, 왕은 공경히 이를 받을지어다.’ 하였는데, 왕이 표(表)를 받들어 올려서 진사(陳謝)하였습니다.
성화 17년044) 8월에 영안도(永安道)의 수신(守臣)이 흰 사슴을 얻어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놓아 보내라.’ 하였습니다. 10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원유(苑囿)를 설치한 것은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농한기[農隙]에 친히 무사(武事)를 강(講)하고 수선(蒐獮)045) 에 예(禮)를 거행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유사(有司)가 백성들이 나무하는 것을 금하여 새와 짐승이 더욱 성하니, 백성을 위해 해로움을 없애는 뜻에 어긋남이 있다. 예전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풀 베고 나무하는 자도 가고 꿩이나 토끼를 잡는 자도 간다.」라고, 이제부터는 원유가 있는 곳에는 모두 금하는 것을 풀어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8년046) 6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예전의 어진 임금은 어진이와 능한이를 선발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든 정치를 함께 다스렸다. 우리 나라는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를 취하고 또 천거(薦擧)하는 법을 세워서 재덕(才德)이 있는 선비를 모두 등용(登庸)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어진이를 구하는 길이 넓지 아니함이 아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 빠뜨려진 구슬은 옛부터 어려워하는 바이니, 초택(草澤)과 암혈(巖穴) 사이에 어찌 재주를 품고 기이함을 가지고도 침울(沈鬱)하여 스스로 팔리지 못하는 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그 지위에 있는 자는 유일(遺逸)047) 을 찾아서 모두 이름을 계문(啓聞)하라.’ 하였습니다. 11월에 왕이 유신(儒臣)을 불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하여,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강(講)하게 하고, 인하여 선유(先儒)의 같고 다른 해설과 역대(歷代)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자취를 평론하게 하였으며, 때로 규풍(規諷)함이 있으면 왕이 부지런히 들었습니다. 밤이 깊어 여러 신하가 물러가기를 청하면 왕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때가 많으면 기질(氣質)의 변화가 자연히 이루어 진다.」고 하였으니, 내가 오늘 아직 듣지 못한 말을 얻어들어 유익함이 크고 많아 자못 피곤하지 아니하니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19년048) 2월에 왕이 적자(嫡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선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이 생각하건대 작토(爵土)049) 를 가진 자는 대[世]를 길이 전하는 계책을 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다.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은 뭇사람들의 뜻이 바라는 바와 합치되게 하려는 것이니, 고금(古今)이 그러한 것이다. 주본(奏本)을 보건대 온 나라 신민(臣民)이 뜰에 모여서 명을 청하여 왕자 휘(諱)를 세워 세자로 삼으려고 하나, 왕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어 아뢴다고 하니, 짐이 보고 특별히 윤허하고, 곧 명하여 태감(太監) 정동(鄭同)을 정사(正使)로 삼고, 김흥(金興)을 부사(副使)로 삼아 칙서와 아울러 저사(紵絲)·사라(紗羅) 등 물건을 가지고 가서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 왕세자(朝鮮國王世子)로 삼게 하니, 그 맞추어 쓸 관복(冠服)은 왕의 나라에서 스스로 만들 것이다. 대저 조정의 명령은 왕이 받들 것이며, 번방(藩邦)의 그릇[器]050) 은 세자가 맡을 것이다. 천지(天地)의 분수는 때를 넘을 수 없음을 알아서 위를 섬기는 정성으로써 거느리며, 국체(國體)를 잇는 도(道)는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알아서 예(禮)를 지키는 가르침에 따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근본이 더욱 튼튼하고 명예가 더욱 높아져서 왕의 표문[表]을 받들어 사례를 올렸습니다. 왕이 명유(名儒)를 뽑아서 세자의 사우(師友)로 삼고 경사(經史)를 주어 서로 갈고 닦게 하며, 또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게 하니, 무릇 교양(敎養)하게 하는 바가 지극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습니다. 3월에 왕의 조모 혜장 왕비(惠莊王妃) 윤씨(尹氏)가 승하(昇遐)하자 왕이 슬퍼하여 병이 났는데, 대신들이 술을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슬픔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성화 20년051) 4월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로서 수령(守令)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수령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생민(生民)의 큰 근심이 된다. 한 달을 관직에 있으면 한 달의 해(害)를 끼치고, 한 해를 관에 있으면 한 해의 해를 끼치는 것이니, 하물며 3기(三朞)·6기(六朞)의 오램이겠는가?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가혹한 정사는 호랑이보다 사납다.」고 하였으니, 대저 아래에서 가혹한 정사를 행하면 임금이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겠는가? 내가 양덕(涼德)052) 으로써 외람되게 선업(先業)을 이어받아서 신민(臣民)의 위에 임한 지 15년인데, 그 사이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따라서 백성이 굶주림을 만났으니, 이는 비록 나의 덕이 없는 소치라고 하더라도, 또한 백성을 가까이 다스리는 관리가 침해를 일삼고 가혹하게 살피는 것으로 밝게 한다고 여겨,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형벌이 함부로 행해져, 그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서 한갓 자기만 살찌우기에 힘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방면(方面)의 신하는 비록 자거(刺擧)053) 의 임무를 맡았으나 그 선악[薰蕕]을 구분하는 데 어둡고 전최(殿最)054) 를 잘못하여 가끔 자상 개제(慈祥豈弟)한 자가 억울함을 품고 탐포 간회(貪暴奸回)한 자가 뜻을 얻음이 있으니,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災殃)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할 것이다. 내가 별도로 올리고 내치는 것을 의논하여 권징(勸懲)을 보이고자 하니, 이에 그대 의정부(議政府)는 각각 아는 바를 분별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순량(循良)055) 하여 다스리는 공(功)이 있는 자와 탐하고 나태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없는 자를 들어서 아뢰니, 곧 올리고 내칠 것을 명하였습니다. 5월에 왕이 명하여 조맹부(趙孟頫)056) 가 쓴 글자를 본떠 모아 장온고(張蘊古)057) 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便殿)에 걸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친히 왕우칭(王禹偁)058) 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承旨)들에게 이르기를, ‘왕우칭의 대루원기가 비록 집정(執政)을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벼슬에 있는 백집사(百執事)059) 가 모두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할 만하다. 더욱이 그대 승정원이 추기(樞機)060) 의 곳임에랴?’ 하였습니다. 12월에 하교하기를, ‘학교(學校)는 풍화(風化)의 큰 근원이며 어진 인재는 국가의 이기(利器)인데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의 희름(餼廩)061) 이 풍족하지 못하니, 내가 숭상하는 뜻이 아니다. 전사(田肆) 1백 경(頃)을 주어서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주부 군현(州府郡縣)의 학교에도 차등이 있게 주어라.’ 하였습니다. 왕이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제도(諸道)에서 공진(供進)하는 물건을 감하라고 명하자, 경상도 수신(守臣)이 아뢰기를, ‘해산물[海錯]과 같은 종류는 구하기가 쉬우니, 예전대로 올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윗사람을 받드는 뜻은 비록 정성스러우나 임금이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또한 간절하니,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화 23년062) 가을에 왕이 선황제가 승하(昇遐)한 것을 듣자 곧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곧 배신(陪臣) 변종인(卞宗仁)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이봉(李封)은 진향(進香)하였으며, 노사신(盧思愼)은 황상(皇上)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게 하였습니다.
홍치(弘治) 원년063) 봄에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짐(朕)이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을 이어받아서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하니,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에는 마땅히 은택(恩澤)을 널리 베풀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왕의 나라는 대대로 충성이 돈독하니, 내려 주는 예물을 더욱 마땅히 후하게 해야 할 바이므로,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 우서자 겸 한림원 시강(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가서 왕에게 유시(諭示)하고, 아울러 왕과 비(妃)에게 폐백(幣帛)·문금(紋錦)을 내려 주게 하였으니, 수령(收領)할 것이며, 더욱 짐의 사랑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예(禮)를 잡고 의(義)에 따라서 번보(藩輔)를 더욱 융성하게 하여 함께 태평한 복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왕을 보고 탄복하기를, ‘노생(老生)064) 이 예전에 듣건대 현왕(賢王)이 학문이 높고 밝으며, 예의(禮義)에 통달하다고 하더니, 이제 다행히 눈으로 보니, 과연 본래 들은 바와 합한다.’ 하였습니다. 11월에 대간(臺諫)이 옛날 이윤(伊尹)065) 과 소공(召公)066) 이 그 임금에게 권계(勸戒)했던 말을 써서 올리며 규경(規警)하는 뜻을 붙였는데, 왕이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들의 올린 말을 보건대 대개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궁온(宮醞)을 내려 주고 밤이 되자 궁중의 초[燭]를 거두어서 보냈습니다.
홍치 2년067) 정월에 어떤 거자(擧子)068) 가 향시(鄕試)의 대책(對策)에 부처에게 제사하여 화(禍)를 물리칠 것을 말하였으므로 시관(試官)이 이를 물리쳤는데, 왕이 이를 듣고는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유생(儒生)의 대책에 쓴 말을 내가 매우 분(憤)하게 여긴다. 부처의 해(害)를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공자(孔子)·맹자(孟子)를 배우는 자이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전공하면 이는 해(害)가 된다.’고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능히 말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해는 양주·묵적보다 심하니, 마땅히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女色)과 마찬가지로 멀리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후세의 배우는 자가 힘써 살피고 밝게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치도(緇徒)들이 천상(天常)069) 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좀먹는 것을 한(恨)스러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끊고 세상의 교화를 붙들어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제 유생이 국가에서 어진이를 올려 쓰는 날을 당하여 요(堯)·순(舜)의 도(道)를 진술하지 아니하고 부도(浮屠)의 법을 고창(鼓唱)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같이 사신(捨身)하고 당(唐)나라 헌종(憲宗)과 같이 막배(膜拜)070) 하게 한 뒤에 그만두게 하려는 것인가? 유자(儒者)라고 일컫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무식한 사녀(士女)이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여 먼 지방에 내쳐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밝게 보이게 하라.’ 하고, 또 해조(該曹)에 명하여 도승법(度僧法)을 회복시키지 말게 하였습니다. 왕이 향학(鄕學)에 서적(書籍)이 적다고 여겨 《사서(四書)》·《오경(五經)》과 제사(諸史)를 인쇄하라고 명하고 제도(諸道)에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홍치 3년071) 윤9월에 왕이 장헌왕(莊憲王)072) 의 묘(墓)에 참배하고 지나가는 고을에 관원을 보내어 선성(先聖)의 묘(廟)에 치제(致祭)하고 학생(學生)에게 쌀을 차등 있게 주었습니다. 또 대가(大駕)가 머무는 곳에는 공돈(供頓)에 수고한 비용으로 이 해 전조(田租)의 반(半)을 감하게 하였습니다. 겨울에 성변(星變)이 있자 일관(日官)이 초제(醮祭)073)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앙(災殃)이 변하여 상서로움이 되는 것은 덕을 닦는 데에 있고 기양(祈禳)074) 에 있지 아니하다.’ 하였습니다.
홍치 4년075) 5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지친(至親)인 사람은 한 몸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숙질(叔姪)은 부자(父子)의 의(義)가 있고 형제는 천륜(天倫)의 중함이 되니, 마땅히 화목한 행실을 돈독히 하여 돈목하고 후한 풍속을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왕상(王商)076) 이 후(侯)가 되자 재산을 미루어 동생에게 주었고, 설포(薛包)077) 는 분재(分財)할 때 나쁜 물건은 자기 자신이 가졌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습속(習俗)이 요박(澆薄)하여 혹은 서로 다투는 자도 있고 혹은 서로 꾸짖고 원망하기도 하니, 골육(骨肉)을 잔상(殘傷)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 뒤로는 형제·숙질이 쟁단(爭端)을 일으켜서 속이고 거짓을 행하는 것이 현저(現著)한 자는 모두 변경에 옮기게 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근년 이래로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되어 중외(中外)에 일이 없으므로,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음식·복완(服玩)078) ·거마(車馬)·제사(第舍)가 모두 사치하고 화려함이 지극하니, 내가 심히 그릇되게 여긴다. 오직 그대 신료(臣僚)들은 검약(儉約)하기에 힘쓸 것이며 폐풍(弊風)을 고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11월에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금년은 곡식이 조금 풍년이 들었는데 세(稅)를 거두는 것이 너무 가볍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어찌하여 부족하겠는가? 백성에게 1분(分)을 감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평안도에 변경(邊警)이 있어 병조(兵曹)에서 본도(本道)의 군사로 하여금 모두 변경을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番)을 나누어 방수(防戌)하도록 예전부터 법이 있었다. 누가 부모가 없으며 누가 처자가 없겠는가? 처자와 집을 떠나 있는 것을 내가 심히 가엾게 여긴다. 번을 나누어 가서 방수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홍치 5년079) 정월에 성균관 전고리(成均館典庫吏) 가 쌀 약간을 소모하였으므로 유사(有司)가 추상(追償)하게 하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작을지라도 어찌 어진 선비를 기르는 자본이 없겠는가? 추상하지 말고 특별히 미포(米布)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8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사생(師生)과 백료(百僚)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며 이르기를, ‘술을 마시되 진실로 어지러운 데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진실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뜻이므로 각각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게 먹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궁(學宮)을 중수(重修)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6년080) 6월에 왕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081) 가 있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왕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져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까 두려운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12월에 해조(該曹)에서 원일(元日)에 예연(禮宴)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그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가하겠는가? 정지하라.’ 하였습니다. 왕이 전대(前代)의 여러 왕과 명현(名賢)의 묘(墓) 중에 혹시 허물어진 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는 곳에 명하여 수즙(修葺)하게 하고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홍치 7년082) 12월에 왕의 병이 미류(彌留)하였으나 오히려 청단(聽斷)을 멈추지 아니하고, 병이 위독해지자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인견(引見)하여 뒤의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24일[己卯]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비록 어린아이와 부녀라 할지라도 달려와서 슬퍼하며 울부짖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26년입니다.
왕은 총명 영무(聰明英武)하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며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뜻이 독실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함에 미쳐서는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진독(進讀)하게 하고 밤에도 소대(召對)083) 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권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084) 에 더욱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성력(星曆)·종률(鍾律)에 이르기까지 통하여 밝지 아니함이 없었고, 사예(射藝)와 초예(草隷)085) 에도 그 묘(妙)함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대(事大)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무릇 공헌(貢獻)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친히 스스로 감시(監視)하였습니다. 한인(漢人)으로서 사로잡혔다가 오랑캐들로부터 도망해 오는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후히 주어서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냈는데, 전후에 모두 5백 55인(人)이었습니다.
왕은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여 혜장 왕비(惠莊王妃)086) ·회간 왕비(懷簡王妃)087) ·양도 왕비(襄悼王妃)088) 가 한 궁(宮)에 같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섬겨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고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친히 조리하며 약이(藥餌)를 반드시 먼저 맛보아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혜장 왕비가 만년(晩年)에 병으로 앓았는데, 매양 왕을 보면 문득 조금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제사 일에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일이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친히 행하였습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은혜와 예(禮)가 모두 지극하였고, 졸(卒)함에 미쳐서는 슬퍼한 나머지 철선(輟膳)하여 병을 이루는 데 이르렀습니다. 종실(宗室)의 여러 친족도 때때로 내전(內殿)에 불러 보고 술자리를 차려 놓고 가인(家人)의 예(禮)를 행하여 화락하게 하였습니다. 가법(家法)이 심히 엄하여 궁곤(宮壼)이 숙연(肅然)하였으며, 여러 아들이 비록 어리더라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쳐서 모두 성인(成人)의 덕(德)이 있었습니다. 대신(大臣)을 접대하기를 예(禮)로 하여 매양 진현(進見)할 때에 태만한 모습을 가진 적이 없었고, 비록 작은 관리라도 모두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죄가 있으면 너그럽게 용서함이 많았으며 세상을 마치도록 형륙(刑戮)을 당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관대(寬貸)함이 없었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과 더불어 자세히 의논하여 처치하였으며,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을 물었습니다. 사람을 쓰는 즈음에 그 단점(短點)을 배척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장점(長點)을 취하고 반드시 〈모든 것을〉 구비할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년 봄·가을로 친히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한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각 있는 곳에서 대접하게 하였으며,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한 처녀에게는 자장(資裝)을 관(官)에서 주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수령이 배사(拜辭)하면 반드시 인견(引見)하고 계유(戒諭)하였으며,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었습니다. 달마다 두 번 열무(閱武)하고 해마다 수선(蒐獮)을 강(講)하여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청단(聽斷)하는 여가에 문사(文士)를 불러서 경사(經史)를 상고해 묻고 겸하여 문예(文藝)를 시험하며, 우림(羽林)089) 군사에게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간혹 후원(後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하여 권려(勸勵)하고 성취(成就)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모두 구도(矩度)가 있었으며, 이단(異端)에 혹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며, 유전(遊畋)을 경계하고 절검(節儉)을 숭상하였으며, 상서(祥瑞)가 이르게 하고 음사(淫祀)를 금하였으며, 직간(直諫)하는 선비를 포상(褒賞)하고 충신(忠臣)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으며, 패상(敗常)090) 의 법을 엄중하게 하고 장리(贓吏)의 법을 엄하게 하였으며, 형벌이 지나치지 아니하여 영어(囹圄)091) 가 여러 번 비었었습니다. 깊은 사랑과 후한 은혜가 온 나라에 젖었는데, 슬프다!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애통하도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29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61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註 001]회간왕(懷簡王) : 덕종(德宗).
- [註 002]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 003]
정축년 : 1457 세조 3년.- [註 004]
혜장왕(惠莊王) : 세조(世祖).- [註 005]
성화(成化) 5년 : 1469 예종 원년.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註 006]
양도왕(襄悼王) : 예종(睿宗).- [註 007]
권서(權署) : 대행.- [註 008]
승습(承襲) : 왕위를 이어받음.- [註 009]
성화 6년 : 1470 성종 원년.- [註 010]
비도(丕圖) : 제위(帝位).- [註 011]
환우(寰宇) : 천하.- [註 012]
서업(緖業) : 왕위 계승.- [註 013]
병한(屛翰) : 제후국을 가리킴.- [註 014]
동번(東藩) : 조선을 가리킴.- [註 015]
종조(宗祧) : 종묘. 왕위를 뜻함.- [註 016]
번보(藩輔) : 제후(諸侯)를 가리킴.- [註 017]
정문 복호(旌門復戶) : 열녀(烈女)·의부(義婦) 등을 상줄 때 그 문려(門閭)에 홍문(紅門)을 세워 주고, 그 집에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것.- [註 018]
성화(成化) 7년 : 1471 성종 2년.- [註 019]
대뢰(大牢) : 소·양·돼지 세 가지 희생을 갖춘 제수(祭需).- [註 020]
건양(愆陽) : 겨울날이 따뜻함.- [註 021]
옥언(獄讞) : 옥사를 평의함.- [註 022]
성화 8년 : 1472 성종 3년.- [註 023]
근본(根本) : 농사를 가리킴.- [註 024]
말단(末端) : 농업 외의 상공업을 가리킴.- [註 025]
정관(貞觀) : 당 태종의 연호.- [註 026]
성화 10년 : 1474 성종 5년.- [註 027]
소생부(所生父) : 낳은 아버지.- [註 028]
성화 11년 : 1475 성종 6년.- [註 029]
선농(先農)에 친히 제사하고, : 동교(東郊)의 제단(祭壇)에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지내던 제사. 경칩(驚蟄) 후의 길일(吉日)인 해일(亥日)에 행하였음.- [註 030]
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밟고 가는 전지라는 뜻으로, 임금의 친경전(親耕田)을 말함.- [註 031]
친잠(親蠶) : 양잠(養蠶)을 장려하기 위하여 왕후(王后)가 몸소 누에를 치는 것을 말함.- [註 032]
질곡(侄梏) : 수갑과 차꼬.- [註 033]
성화 12년 : 1476 성종 7년.- [註 034]
황저(皇儲) : 황태자.- [註 035]
성화 13년 : 1477 성종 8년.- [註 036]
축리(祝釐) :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복을 빔.- [註 037]
성화 14년 : 1478 성종 9년.- [註 038]
색황(色荒) : 여색에 빠짐.- [註 039]
금황(禽荒) : 사냥하는 데 탐닉(耽溺)함.- [註 040]
약석(藥石) :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 [註 041]
성화 15년 : 1479 성종 10년.- [註 042]
견양(犬羊) : 여진을 가리킴.- [註 043]
적개(敵愾) : 제왕(帝王)을 위하여 원한을 풀려고 함.- [註 044]
성화 17년 : 1481 성종 12년.- [註 045]
수선(蒐獮) : 봄 사냥과 가을 사냥.- [註 046]
성화 18년 : 1482 성종 13년.- [註 047]
유일(遺逸) : 빠뜨려진 인재.- [註 048]
성화 19년 : 1483 성종 14년.- [註 049]
작토(爵土) : 작위(爵位)와 영지(領地).- [註 050]
그릇[器] : 명위(名位)와 작호(爵號)를 가리킴.- [註 051]
성화 20년 : 1484 성종 15년.- [註 052]
양덕(涼德) : 박한 덕.- [註 053]
자거(刺擧) : 악(惡)을 꾸짖고 선(善)을 쳐듦.- [註 054]
전최(殿最)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정하던 일.- [註 055]
순량(循良) : 법을 지켜 백성을 잘 다스림.- [註 056]
조맹부(趙孟頫) : 원(元)나라의 문인(文人).- [註 057]
장온고(張蘊古) : 당나라 때 문장가.- [註 058]
왕우칭(王禹偁) : 송나라 때 문장가.- [註 059]
백집사(百執事) : 백관(百官).- [註 060]
추기(樞機) : 중요한 기관.- [註 061]
희름(餼廩) : 녹미(祿米).- [註 062]
성화 23년 : 1487 성종 18년.- [註 063]
홍치(弘治) 원년 : 1488 성종 19년.- [註 064]
노생(老生) : 자신을 가리킴.- [註 065]
이윤(伊尹) : 은(殷)나라 때 명신.- [註 066]
소공(召公) : 주(周)나라 때 명신.- [註 067]
홍치 2년 : 1489 성종 20년.- [註 068]
거자(擧子) : 과거를 보는 선비.- [註 069]
천상(天常) : 인륜(人倫).- [註 070]
막배(膜拜) : 땅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절함.- [註 071]
홍치 3년 : 1490 성종 21년.- [註 072]
장헌왕(莊憲王) : 세종(世宗).- [註 073]
초제(醮祭) : 별에 지내던 제사.- [註 074]
기양(祈禳) :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침.- [註 075]
홍치 4년 : 1491 성종 22년.- [註 076]
왕상(王商) : 한(漢)나라 때 사람.- [註 077]
설포(薛包) : 후한(後漢) 때 사람.- [註 078]
복완(服玩) : 의복과 노리개.- [註 079]
홍치 5년 : 1492 성종 23년.- [註 080]
홍치 6년 : 1493 성종 24년.- [註 081]
즉어(鯽魚) : 붕어.- [註 082]
홍치 7년 : 1494 성종 25년.- [註 083]
소대(召對) :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 이하를 불러서 임금이 몸소 글을 강론(講論)함을 말함.- [註 084]
성리학(性理學) :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례를 설명(說明)한 유교 철학(儒敎哲學). 송(宋)나라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희(朱熹) 등이 주창(主唱)한 학설(學說).- [註 085]
초예(草隷) : 초서와 예서.- [註 086]
혜장 왕비(惠莊王妃) : 세조비.- [註 087]
회간 왕비(懷簡王妃) : 덕종비.- [註 088]
양도 왕비(襄悼王妃) : 예종비.- [註 089]
○其申禮部行狀曰:
國王姓某諱某, 懷簡王第二子, 母妃韓氏, 議政府左議政確之女也。 以天順丁丑七月辛卯生王, 懷簡王爲世子早薨, 王祖父惠莊王, 育王于宮中。 王天資穎異器度雄偉, 惠莊王特奇愛之, 封爲者山君。 王嘗與〔同〕母兄月山君 婷, 在王宮, 適雷雨暴作, 有寺人在傍震死。 左右皆顚仆褫魄, 王略不動色, 惠莊王尤異之。 成化五年十一月, 王叔父襄悼王病革, 嗣子年幼且病, 擇所宜後, 以王德器夙成, 孝悌好學, 令權署國務。 及襄悼王薨, 王遣陪臣宋文琳告訃, 權瑊請承襲, 六年五月先皇帝賜詔曰: ‘朕嗣守丕圖撫御寰宇, 遐方絶域咸立君長, 俾治其民, 易世錫封厥有彝典。 故朝鮮國王 李諱承先事大, 忠孝有聞, 受封未及踰年, 告訃遽云卽世, 顧玆緖業宜屬親賢, 今特遣太監金興齎勑, 封王之姪諱爲朝鮮國王, 繼總國政。 惟諱實惠莊王之孫, 本國大小臣民, 其一心奉順, 用輯和東土藩屛中朝, 無替爾先王之業。 斯稱朕眷待爾國之意。’ 又賜制曰: ‘朕祗紹鴻圖懋隆屛翰, 肆懷遠以爲近, 庶一視以同仁。 眷此東藩世稱秉禮, 允惟承序, 宜屬仁賢。 朝鮮國王姪諱聰明天賦, 問學夙成, 國論攸歸宗祧當繼。 今特封爲朝鮮國王, 總統國事。 於戲! 惟誠敬可以修身, 惟禮義可以爲國, 惟忠可以事大, 惟孝可以元宗。 尙愼始終毋忘訓飭。’ 又賜勑曰: ‘得奏爾叔王諱, 於成化五年十一月二十八日薨逝, 玆特遣太監金興、行人姜浩, 齎文諭祭, 幷齎詔示爾國人, 封爾諱爲朝鮮國王繼主國事, 幷封爾妻韓氏爲王妃, 爾宜敬守先業保國安民, 篤忠誠以事朝廷, 敦信義以睦隣境, 躬節儉以舒財用, 俾東土民物康阜, 永爲中國藩輔之重。 朕惟爾嘉, 特頒賜爾及妃誥命, 晩服、綵幣等件至可領也。’ 王遣陪臣奉表稱謝。 王令大小臣僚各陳時宜, 宗親文武六品以上, 各擧賢能。 命該曹, 孝子節婦其行卓異者, 旌門復戶以奬之。 設弘文館於殿側, 選文學才行之士十七員, 更日直宿, 侍講經史規諷道義。 七年三月王至成均館, 謁先聖祀以大牢, 坐明倫堂, 令文士問難經義, 十一月上敎曰: ‘予以幼沖纉承先業, 凡朝政得失民生利害, 盡心釐整, 然事機至繁罔知攸措。 今當冱寒陰閉之時, 愆陽爲災, 天意豈無所在歟? 反身省己實由寡昧。 累求直言未有盡言極諫者, 累求賢俊未有明揚側陋者。 董治百司猶有懈弛, 審理獄讞猶有冤滯, 勤恤民隱而無告尙多, 務省功役而興作不息, 其令政府廣曉中外, 詳究以啓。’ 八年三月皇太子訃音至, 禮官請以明日擧哀, 王曰: ‘哀切於中, 奚待明日?’ 卽率百官擧哀, 奉表陳慰。 五月下敎曰: ‘生財在於務本, 裕財在於節用, 如欲節用必先儉約。 蓋奢侈則用必廣, 用廣則財必竭。 念我東方地力踈薄, 勤儉節用猶患財用之不裕, 況棄本逐末, 生之者旣寡, 事尙華侈, 用之者不節哉? 予爲是慮嚴逐末之禁, 定役民之法, 罷不急之務, 除無益之費, 庶不擾爾人民, 爾人民盡力農桑勿爲惰慢, 崇尙節儉勿爲奢靡, 量財節用勿爲橫費, 家之與國大小雖殊, 其體則一, 苟能存心省約, 於裕國乎何有? 爾人民各體予意, 以遂生業。’ 王嘗觀尙書, 至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謂侍臣曰: ‘爲君之道孰有加於此乎? 非獨人君, 爲臣者能受盡言而後, 能諫其君, 爾等亦宜知之。’ 嘗讀史至隋煬帝聞盜發, 使人逐捕。 九人內四人非賊, 有司以帝已令斬決, 遂不執奏竝殺之, 王曰: ‘煬帝固爲無道, 然當時之臣知而不言, 豈得無罪? 予以煬帝爲戒, 爾等亦以不執秦者爲戒, 君臣交修不亦可乎?’ 又讀至魏徵言於太宗曰: ‘貞觀之初, 陛下節儉求諫不倦, 比來營繕微多, 諫者頗有忤旨。’ 上曰: ‘古稱: 「鮮克有終。」 太宗之初可謂盛矣, 至於末年漸不如初。 以太宗之賢猶若此, 況不及太宗者乎? 近來頗興營造, 雖皆出於不得已, 中外以謂何如? 予卽政以來, 未嘗罪一言事之臣, 爾等勿以忤旨爲虞, 事有不便當盡言之。’ 鷹坊嘗畜一海東靑, 侍臣以爲言, 王卽命放之, 終不復畜。
十年九月, 王遣陪臣金礩奏曰: ‘臣以愚庸特蒙聖恩, 得守先業有年。 顧惟所生父臣諱, 先祖惠莊王臣諱嫡子, 受命爲世子, 不幸早逝。 今臣旣受王爵, 妻亦爲妃, 而所生父稱世子, 母無名號, 一國臣民稱說不順, 於人子之心誠有未安。 然臣旣爲先臣襄悼王諱之後, 義不可顧私親, 且懼天威囁嚅至今。 竊念天性之親, 恩義亦重, 顯揚之懷不能自已, 敢昧死塵瀆, 伏望聖慈賜爵、賜謚, 俾伸微誠以廣孝理。 不勝至願。’ 先皇帝賜勑曰: ‘得奏, 王所生父諱, 先封世子早逝, 及所生母韓氏見在, 俱未有名號, 雖爲人後者義不可顧私親, 然顯揚之懷不能自已等, 因具悉王之孝忱。 玆特追封故世子諱, 爲朝鮮國王, 謚懷簡。 封韓氏爲懷簡王妃, 以遂王顯親之志, 及頒給誥命, 幷妃冠服, 至可領也。’ 王蒙恩感激, 宥境內, 賜群臣爵一級, 奉表陳謝。
十一年正月, 上親祭先農, 遂躬耕籍田。 又令王妃親蠶, 皆如其儀。 八月下敎曰: ‘司獄官吏所失非一, 苛暴深刻者, 常失於羅織, 昏迷、庸懶者, 常失於淹滯。 好羅織則深文峻法, 嚴加栲訊援引傅會, 一切增飾, 無辜之人橫罹斧鑕, 好淹滯則依違不決, 動隔炎涼桎梏加體, 飢寒切身悲號疾病, 遂死狴獄, 豈不冤哉? 嘗聞一人向隅, 滿堂不樂。 匹夫匹婦死非其辜, 咎將誰執? 大抵獄辭, 初若轇輵緣情推究, 迎刃自解。 但司臬者, 不加之意而已, 毋或爾羅織、毋或爾淹滯。 本之以仁恕、行之以明允, 使死者服辜, 生者無冤, 豈不美哉?’
十二年春, 先皇帝冊皇上, 爲皇太子, 賜勑曰: ‘王素秉禮義忠敬朝廷。 玆朕建立皇儲嘉惠多方, 矧惟王國尤所當厚, 特遣正使戶部郞中祈順、副使行人司左司副張瑾, 齎詔諭王, 幷賜王及妃綵幣紋錦, 至可收領, 用副朕眷待之意。’ 兩使見王相謂曰: ‘眞賢王也。’ 臨別正使作詩贈王, 其序云: ‘順使朝鮮, 累與王相接, 心甚嘉之。 蓋其妙齡秀穎, 崇儒好學, 威德旁敷, 一邦輯睦, 誠他邦所罕儷也。’ 王採前世明君暗主所行善惡事迹, 命工圖畫爲屛, 命詞臣作詩, 書于其上, 坐臥觀省, 以爲勸戒焉。
十三年八月, 王詣成均館, 酌獻先聖, 行射禮, 仍下敎諸道觀察使, 令所在官守令, 行飮射禮, 歲以爲常。 前此國王生日, 勳舊之臣就僧寺祝釐。 王曰: ‘詩不云乎?: 「求福不回。」 豈可侫佛而求福哉? 其罷之。’
十四年四月, 王詣成均館, 親祀先聖, 坐明倫堂養老乞言。 王謂群老曰: ‘書云 「內作色荒, 外作禽荒, 甘酒嗜飮, 峻宇雕墻, 有一於此, 靡或不亡。」 此實人君之藥石。 予嘗書此貼於座右, 常常觀省, 今又聞諸老所陳, 皆修身治國切要之言, 予當服膺勿失。’
十五年冬, 先皇帝遣使賜勑曰: ‘建州女眞, 逆天背恩, 累寇邊陲, 已令監督、總兵等官, 選領精兵刻期征勦。 惟爾國王紹作東藩, 輸忠於我國家, 有隆無替, 朕甚嘉悅。 我兵壓境, 賊有奔竄國境, 諒必擒而俘獻之, 王如申遣偏師, 遙相應援大奮貔貅之威, 同殲犬羊之孽, 逆虜旣除, 則王敵愾功勤愈茂, 而聲名豈不有以享於無窮哉?’ 王卽遣陪臣魚有沼等, 領兵入攻。 有沼以江水氷合旋解, 難於渡師罷兵廻還。 王治有沼不及軍期之罪, 更遣陪臣尹弼商、金嶠, 領兵四千直擣賊穴, 俘斬醜類焚蕩屯落, 幷得被虜遼東人口而還。 王遣陪臣魚世謙獻俘, 先皇帝賜勑曰: ‘往年建賊背逆, 朕嘗出師致討, 而爾國先王諱, 發兵來助用能克捷矣。 玆者賊猶稔惡不悛, 朕從廷議, 仍出師討之, 王發兵來助, 雖前兵因江水凍解難濟, 不獲與我師合勢, 同成厥功, 而後兵, 亦抵巢攻勦, 擒斬其部屬, 焚燬其廬舍蓄峙, 得其所掠我邊衛人口, 又遣陪臣押赴來獻。 王之忠誠, 於先世可謂能繼, 於朕命可謂無負矣。 令聞寧有窮已耶? 今遣內官鄭同、姜玉, 至王國, 賜王綵叚、白金、紋錦、西洋布, 其領兵官左議政尹弼商、節度使金嶠, 亦各如例有賜, 以旌勞勩, 王其欽承之。’ 王奉表陳謝。
十七年八月, 永安道守臣獲白鹿以聞, 王曰: ‘此非予所喜, 其放之。’ 十月下敎曰: ‘苑囿之設, 非以病民也。 常於農隙親講武事, 擧蒐獮之禮耳。 今有司禁民樵採, 禽獸益繁, 有乖爲民除害之義。 古不云乎?: 「芻蕘者往焉, 雉兔者往焉。」 自今苑囿所在, 悉令弛禁, 與民共之。’
十八年六月, 下敎曰: ‘古昔賢君莫不選賢與能, 共康庶績。 我國家設科取士, 又立薦擧之法, 欲其才德之士, 咸使登庸, 求賢之路不爲不廣。 然滄海遺珠自古所難, 草澤巖穴之間, 豈無懷才抱奇, 沈鬱而不能自售者乎? 凡厥在位搜訪遺逸, 咸以名聞。’ 十一月, 王引儒臣入內殿, 講中庸、大學, 因尙論先儒同異之說、歷代治亂之迹, 時有規諷, 王聽之舋舋。 至於夜分諸臣請退, 王曰: ‘古人有云: 「接賢士大夫之時多, 則氣質變化自然而成。」 予今日得聞所未聞之言, 裨益弘多, 殊不爲倦勿退。’
十九年二月, 王請立嫡子諱爲世子, 先皇帝賜勑曰: ‘朕惟有爵土者, 莫不爲長世之圖。 立嫡長者, 得以係群情之望, 古今然也。 得奏, 擧國臣民旅庭請命, 欲立王子諱爲世子, 王不敢顓貢使以聞, 朕覽之特加兪允, 乃命太監鄭同爲正使, 金興爲副使, 齎勑幷紵絲、紗羅等件, 封諱爲朝鮮國王世子, 其合用冠服, 王國自制。 夫朝廷之命, 王其承之, 藩邦之器, 世子其主之。 知天地之分不可踰時, 率以事上之誠, 知繼體之道不可忽罔, 替夫秉禮之訓。 若是則本愈固、譽愈隆, 王國享福, 詎有窮耶? 欽哉!’ 王奉表陳謝。 王選名儒爲世子師友, 授以經史交相切磋, 又令謁先聖, 入學于成均館, 凡所以敎養之者無所不至。 三月王祖母惠莊王妃尹氏薨, 王哀毁成疾, 大臣請進酒, 王曰: ‘忘哀飮酒予所不忍也。’ 固請不聽。
二十年四月, 下敎曰: ‘親民之官莫重守令, 守令之匪人生民之大患也。 在官一月, 則貽一月之害, 在官一年, 則貽一年之害。 而況三朞、六朞之久乎? 仲尼有言: 「苛政猛於虎。」 蓋苛政行於下, 則人主雖有仁民愛物之心, 何能澤及於民乎? 予以涼德叨承前緖, 臨莅臣民十有五年, 間者水旱相仍, 民罹飢饉, 是雖寡躬無德之致, 亦恐親民之官, 以侵耗爲事, 以刻察爲明, 貨賄公行刑罰縱濫, 不修厥職徒務自肥, 方面之臣雖任剌擧, 眩於薰蕕失於殿最, 往往慈祥(豈弟)〔愷悌〕者抱屈, 貪暴姦回者得志, 傷和召災未必不由乎是。 予欲別議陞黜以示勸懲, 玆爾政府各以所知, 旌別以聞。’ 議政府擧循良有治効者, 貪懶不宜臨民者以啓, 卽命陞黜焉。 五月王命摹集趙孟頫字, 刻張蘊古大寶箴, 揭于便殿以自警, 親寫王禹偁 待漏院記, 以賜承政院, 謂承旨等曰: ‘禹偁之記, 雖爲執政而作, 然在位百執事, 皆可以代座右之銘, 況爾院爲樞機之地乎?’ 十二月下敎曰: ‘學校風化之大源, 賢材國家之利器, 而成均儒生, 餼廩不豐, 非予崇重之意也。 給田肆百頃以贍其用, 州府郡縣之學, 亦給有差。’ 王嘗因旱, 命減諸道供進之物, 慶尙道守臣啓曰: ‘如海錯之類得之甚易, 請依舊以進。’ 王曰: ‘臣子奉上之意雖勤, 人君恤下之情亦切, 其勿進。’
二十三年秋, 王聞先皇帝昇遐, 率百官擧哀, 卽遣陪臣卞宗仁陳慰, 李封進香, 盧思愼賀皇上登極。
弘治元年春皇帝賜勑曰: ‘朕嗣守祖宗鴻業, 統御萬方, 聲敎所曁宜覃恩澤。 矧伊王國世篤忠誠, 錫齎之典尤所當厚, 特遣正使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講董越、副使工科右給事中王敞, 齎詔勑諭王, 幷賜王及妃幣帛、紋錦, 至可收領, 尙其體朕眷懷, 秉禮服義益隆藩輔, 共享大平之福。’ 正使見王歎曰: ‘老生舊聞, 賢王學問高明, 通達禮義, 今幸目覩果愜素聞。’ 十一月, 臺諫採古伊尹、召公勸戒其君之辭, 繕寫以進以寓規警之意, 王嘉悅曰: ‘今觀爾等所進之辭, 蓋欲納君於無過之地也。 爾等愛君之誠寧可忘耶?’ 賜以宮醞, 至夜撤宮燭送之。
二年正月, 有擧子於鄕試對策, 言祀佛禳禍者, 試官斥之, 王聞之, 手札下敎曰: "儒生對策之辭, 予甚憤焉。 佛之爲害誰不知之? 況學孔、孟者耶? 孔子曰: ‘攻乎異端斯害也已。’ 孟子曰: ‘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 程子曰: ‘佛氏之害甚於楊、墨, 當如淫聲美色以遠之。’ 後之學者, 可不力察而明辨之乎? 予嘗恨緇徒, 蔑棄天常, 耗蠧民財, 將欲絶其根株, 扶植世敎, 而今者儒生, 當國家擧賢之日, 不陳堯、舜之道, 皷唱浮屠之法, 是欲使予, 如梁 武之捨身, 唐宗之膜拜, 而後已乎? 號爲儒者猶尙如此, 況無識士女乎? 宜令有司推鞫, 屛諸遐裔, 明示好惡。’ 又命該曹勿復度僧。 王以鄕學書籍尠少, 命印《四書》、《五經》及諸史, 頒于諸道。 三年閏九月, 王謁莊憲王墓, 所過州縣, 遣官致祭于先聖廟, 給學生米有差。 又以駐駕之地, 供頓勞費, 減是年田租之半。 冬有星變, 日官請行醮祭, 上曰: ‘變災爲祥在於修德, 不在祈禳也。’ 四年五月下敎曰: ‘至親之人一體而分, 叔姪有父子之義, 兄弟爲天倫之重, 宜敦雍睦之行, 以成敦厚之風。 昔王商爲侯推財與弟, 薛包分財以惡物自與, 今世之人習俗澆薄, 或有交爭自相詆怨, 殘傷骨肉莫此爲甚。 今後兄弟、叔姪起爲爭端, 詐僞著現者, 竝令徙邊以厚風俗。’ 又下敎曰: ‘比年以來昇平日久, 中外無事, 競尙華靡, 飮食、服玩、車馬、第舍, 皆極侈麗, 予甚非之。 惟爾臣僚務要儉約, 以革弊風。’ 十一月, 戶曹啓: ‘今者年穀稍稔, 而收稅太輕。’ 王曰: ‘百姓足君誰與不足? 寬民一分不亦可乎?’ 平安道有邊警, 兵曹請本道軍卒竝令戍邊, 王曰: ‘分番防戍古有其法, 誰無父母誰無妻子? 靡室靡家予甚憐憫。 其令分番往戌。’
五年正月, 成均館典庫吏耗米若干, 有司欲令追償, 王曰: ‘國雖小豈乏養賢之資? 其勿追償特給米布。’ 八月, 王至成均館祀先聖, 大饗師生及百僚謂曰: ‘飮酒固不可及亂, 然今日之事, 實崇儒重道之意, 其各醉飽。’ 因命有司重修學宮。 六年六月, 王有疾醫云: ‘鯽魚可治。’ 王謂近侍曰: ‘今方雨潦採捕之人, 恐罹沒溺之患, 豈可以口腹累人乎?’ 十二月, 該曹請設元日禮宴, 王曰: ‘人君當與民同其憂樂。 今當歲歉民飢, 而獨樂可乎? 其停之。’ 王以前代諸王及名賢之墓, 或有頹毁者, 命所在修葺禁樵牧。
七年十二月, 王寢疾彌留, 猶聽斷不輟, 及疾篤, 具冠服引見大臣, 屬以後事。 翼日己卯薨于正寢, 雖童稚婦女, 莫不奔走悲號。 享年三十八, 在位二十六年。 王聰明英武寬仁恭儉, 自少篤意經史, 及嗣位, 令講官日三進讀, 夜又召對, 終始不倦。 尤邃於性理之學, 至於百家、星曆、鍾律靡不洞曉, 射藝、草隷亦臻其妙。 畏天事大出於至誠, 凡干貢獻必親自監視。 漢人被搶, 自虜中逃來者, 厚資衣糧解送遼東, 前後共五百五十五人。 王天性孝友, 惠莊王妃、懷簡王妃、襄悼王妃, 同處一宮, 事之如一, 日三問安, 甘旨必親調, 藥餌必先嘗, 未嘗少懈。 惠莊王妃晩年患疾, 每見王病輒少間, 人稱孝誠所感。 凡祀事盡其誠敬, 非有故必親行之。 待月山君 婷恩禮備至, 及卒悲悼輟膳, 以至成疾。 宗室諸親亦時召見于內, 置酒行家人禮, 怡怡如也。 家法甚嚴宮壼肅然, 諸子雖幼敎以義方, 皆有成人之德。 接大臣以禮, 每進見未嘗有惰容, 雖小官亦皆禮遇之。 有罪多寬假, 終世無遭刑戮者, 至宦寺不少㒃。 國有大事, 必與大臣詳議處置, 令朝臣輪對問以朝政得失。 用人之際人有斥其短者, 取其所長不必求備。 每歲春秋親宴老人, 亦令守令各於所在饗之, 處女之貧乏未嫁者, 官給資裝無使失時。 守宰拜辭必引見戒諭, 數遣使臣問民疾苦。 月再閱武, 歲講蒐獮以嚴武備。 聽斷之暇引文士, 考問經史兼試文藝, 羽林之士亦令受學。 或於後苑較射, 以勸勵成就之。 凡所施爲皆有矩度, 不惑異端不近聲色, 戒遊畋、崇節儉、却祥瑞、禁淫祀, 褒賞直諫之士, 錄用忠臣之後, 重敗常之典, 嚴贓吏之法, 刑罰不濫囹圄屢空。 深仁厚澤洽于一國, 噫! 天不假年, 遽至於斯, 痛哉!
- 【태백산사고본】 47책 29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61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註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