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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87권, 성종 25년 2월 14일 계유 2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우의정 허종의 졸기

우의정(右議政) 허종(許琮)이 졸(卒)하니, 철조(輟朝)134) ·사부(賜賻)·조제(弔祭)·예장(禮葬)135) 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허종의 자(字)는 종경(宗卿)이니, 고려(高麗) 시중(侍中) 허공(許珙)의 후손이다. 그 심지와 기질이 침중(沈重)하고 원대하였으니, 젊어서 벗과 더불어 같이 지내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 의복과 신을 다 가지고 갔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 도둑을〉 모두 원망했지만, 허종은 기꺼운 양으로 조금도 이에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경태(景泰) 병자년136) 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천순(天順) 정축년137) 에 문과(文科)에 제 3위로 합격하여 처음에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에 제수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기묘년138) 에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과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천문(天文)을 익히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마침 일식(日食)하는 것을 보고 허종이 그 식분(食分)을 추산(推算)하여 올리고, 아울러 소(疏)를 올려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며, 유전(遊畋)139) 을 절제하고 경연(經筵)에 〈자주〉 임어할 것 등의 일을 개진(開陳)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경직(鯁直)하였다. 〈세조가〉 명하여 불려 들어가매 힐책하기를, ‘십순(十旬)을 돌아가지 않았거나140) 면(麪)으로 희생[牲]을 대신하는 따위141) 의 내 과실이 없거늘, 네가 하(夏)태강(太康)양(梁)무제(武帝)를 나에게 비유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거짓 위엄과 노기를 가하면서 상투를 잡고 끌어내리어 곤장을 치도록 명하는데도 허종이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차착(差錯) 없이 응대(應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 장사(壯士)로다.’ 하고, 드디어 잔을 올리라 명하니, 그 진퇴(進退)하는 동작이 옹용(雍容)하므로, 갑자기 겸선전관(兼宣傳官)을 제수하였으며, 세조가 여러 명신(名臣)에게 나누어 주어 불경을 읽게 하면서 말하기를, ‘허종은 불도를 좋아하지 않으니 주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다.

경진년142) 에 평안도 도절제사 도사(平安道都節制使都事)에 제수되고, 신사년143) 에 형조 도관 좌랑(刑曹都官佐郞)에 제수되었으며, 임오년144) 에는 함길도 관찰사 도사(咸吉道觀察使都事)에 제수되었다가 갈리어 정언(正言)이 되었다.

계미년145) 에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성균 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예문 응교(藝文應敎)를 겸임하였고, 갑신년146) 에 사예(司藝)로 승진되었다. 이때 한명회(韓明澮)가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가 되어 허종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품지(稟旨)를 받아야 했으므로 반드시 허종을 보내곤 했다. 이해 겨울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 제수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147)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 함길도 절도사(咸吉道節度使)에 제수되었고, 병술년148) 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강효문(康孝文)으로 대체하였는데, 정해년149)이시애(李施愛)강효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150) 기복(起復)151) 하여 다시 절도사가 되었다. 반적(叛賊)을 평정하고 나서 허종이 종용(從容)히 진정시켜 북방(北方)이 안정을 되찾으매,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하여 양천군(陽川君)에 봉(封)하였다.

무자년152) 에 모친(母親)의 병으로 소환(召還)되고, 기축년153)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다시 불러 돌아와서 바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全羅道)에서 일어나니, 허종을 절도사로 삼아 적(賊)을 사로잡자, 소환된 지 얼마 안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신묘년154) 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내렸고, 정유년155) 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 해에 건주 야인(建州野人)이 요동(遼東)을 침범해 들어가니, 허종에게 명하여 평안도를 순찰(巡察)케 하였으며, 겨울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어 바로 좌참찬(左參贊)에 승진되었다.

무술년156) 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하는데도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허종이 한(漢)나라 광무(光武)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과실을 들어 그 불가함을 극력 진달하니, 임금의 마음이 풀렸다. 이해 가을에 조모상(祖母喪)을 당하였는데, 경자년157) 에 〈다시〉 기복(起復)되어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가 되었고, 신축년158) 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59) 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승진되고 계묘년160) 에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을사년161) 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고, 정미년162) 가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무신년163) 〈명(明)나라〉 한림 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敞)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는데, 허종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응대(應對)와 주선(周旋)이 절도에 맞으므로, 두 사신이 존경하고 감복(感服)하였으며, 작별에 임하여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일찍 북경[京]에 조회하러 와서 중국 조정으로 하여금 해외(海外)에도 이런 인물이 있음을 알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늘 위에는 몰라도 인간(人間)에는 둘도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가을에 병조 판서로 옮겨 곧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기유년164) 영안도(永安道)에 와언(訛言)이 일어나 인심(人心)이 불안하자, 허종을 명하여 관찰사로 삼고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시켰다. 신해년165) 임기가 만료되어 마땅히 체임(遞任)되어야 할 터인데, 장차 니마차(尼麻車)를 정벌하려 하므로 그대로 유임하고 있다가, 역마(驛馬)를 타고 들어와 뵙기를 명하여 임금 면전에서 그 방략(方略)을 진달하매 드디어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로 삼았다. 허종이 명을 받고 돌아가 각 부서(部署)에 제장(諸將)을 배치하여 오랑캐의 부락에 다다르니,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하므로 드디어 그들의 집과 여막을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오니,166)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정경조(鄭敬祖)를 보내어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영접해 위로하게 하였다.

임자년167) 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진계(進階)되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함을 듣고 임금이 중관(中官) 안중경(安仲敬)을 보내어 뒷일을 물으니, 허종이 이미 위중하여 눈을 뜨고 목구멍 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종말을 삼가기를 처음같이 하소서.’ 할 뿐이었다. 향년이 61세였다. 시호(諡號)를 충정(忠貞)이라 하였으니, 임금을 섬기되 신절(臣節)을 다함을 충(忠)이라 하고, 곧은 도(道)를 동요하지 않음을 정(貞)이라 한다.

사신은 논한다. 허종(許琮)은 성품이 관후(寬厚) 간중(簡重)하고 자태와 의표가 빼어나고 위연(偉然)하였으며, 수염 또한 아름다와서 바라보는 자 누구나 그가 대인 군자(大人君子)임을 알았다. 아무리 창졸간이라 해도 조급한 말이나 장황한 안색을 짓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는 임금의 희로(喜怒)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확고한 소신대로 하였다. 서적(書籍)을 널리 보았고 잡예(雜藝)에도 통하였으며,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생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아 거처하는 곳이 좁고 누추한데도 태연하게 지냈다.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여 장상(將相)으로서 물망이 중하여 그 한 몸이 국가의 경중에 연계되었는데, 북정(北征)의 거조를 당시의 논의가 애석해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28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475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왕실-사급(賜給)

  • [註 134]
    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혹은 재앙(災殃)이 있을 때 근신하는 의미에서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던 일. 정조(停朝).
  • [註 135]
    예장(禮葬) : 임금이나 종친(宗親) 2품 이상의 문무 백관(文武百官)과 그 부인들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그 격에 맞게 예(禮)를 갖추어 지내던 장사(葬事). 이때 일체의 장례 비용과 물자와 군정(軍丁)을 지급하였음.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상등(上等:정·종1품)·중등(中等:정2품)·하등(下等:종2품)으로 나누어 산역 군인(山役軍人)과 석회(石灰)·관곽(棺槨) 등을 지급하였음.
  • [註 136]
    경태(景泰) 병자년 : 1456 세조 3년.
  • [註 137]
    천순(天順)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138]
    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139]
    유전(遊畋) : 놀이삼아 하는 사냥.
  • [註 140]
    십순(十旬)을 돌아가지 않았거나 : 중국 고대 하(夏)의 임금 태강(太康)이 정사를 보지 않고 사냥과 놀이를 즐겨 멀리 낙수(洛水) 남쪽까지 가서 백일 간을 돌아오지 않은 고사를 지적하여 경계한 말임. 태강은 결국 유궁(有窮)나라 임금에 의해 폐위되었음. 십순(十旬)은 백일.
  • [註 141]
    면(麪)으로 희생[牲]을 대신하는 따위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양(梁)의 개국주(開國主) 무제(武帝)는 성품이 인자하고 공검(恭儉)하였으며, 초정(初政)에서는 유교를 일으켰고 볼 만한 정치도 많았으나, 뒤에 불교에 침혹하여 세 번의 사신 수행(捨身修行)까지 하였으며, 종묘에 희생(犧牲)을 쓰지 않고 면(麪)으로 대신하기도 하였음. 무제는 뒤에 반란으로 굶어 죽고 나라도 잃었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음.
  • [註 142]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143]
    신사년 : 1461 세조 7년.
  • [註 144]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145]
    계미년 : 1463 세조 9년.
  • [註 146]
    갑신년 : 1464 세조 10년.
  • [註 147]
    성화(成化)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148]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149]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150]
    이시애(李施愛)가 강효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조 13년에 영안도(永安道:함경도) 길주(吉州)의 토호(土豪)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군민(軍民)을 선동하고는 마침 도내를 순찰 중이던 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이시애·이시합 형제는 허종(許琮)의 휘하 군관(軍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로 자신들의 우위장(右衛將)인 이운로(李雲露) 등에게 사로잡히는 바 되어 형제가 함께 처형되었음.
  • [註 151]
    기복(起復) : 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을 3년 상이 끝나기 전에 다시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
  • [註 152]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153]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154]
    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155]
    정유년 : 1477 성종 8년.
  • [註 156]
    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157]
    경자년 : 1480 성종 11년.
  • [註 158]
    신축년 : 1481 성종 12년.
  • [註 159]
    임인년 : 1482 성종 13년.
  • [註 160]
    계묘년 : 1483 성종 14년.
  • [註 161]
    을사년 : 1485 성종 16년.
  • [註 162]
    정미년 : 1487 성종 18년.
  • [註 163]
    무신년 : 1488 성종 19년.
  • [註 164]
    기유년 : 1489 성종 20년.
  • [註 165]
    신해년 : 1491 성종 22년.
  • [註 166]
    그들의 집과 여막을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오니, : 신해 북정(辛亥北征)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종 22년(1491) 정월 12일에 올적합(兀狄哈) 1천여 인이 영안도(永安道:함경도) 조산보(造山堡)를 에워싸고 군사 3인을 사살하고 26인을 다치게 하였으므로, 경원 부사(慶源府使) 나사종(羅嗣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가 싸웠으나, 나사종은 전사하고 많은 사상을 입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북정(北征)이 논의되고 영안도 관찰사 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10월에 정벌하기로 정하고 각도의 군사 2만을 징발하여 10월 15일에 5천의 정병(精兵)이 강을 건너 소굴을 분탕하고 11월 2일 강을 건너 돌아왔음.
  • [註 167]
    임자년 : 1492 성종 23년.

○右議政許琮卒。 輟朝賜賻弔祭禮葬如例。 宗卿, 高麗侍中之後, 志氣沈遠, 少與友同棲, 偸兒盡取衣屨以去, 諸人咸懊恨, 怡然不介意。 景泰丙子中生員試, 天順丁丑中文科第三名, 初授義盈庫直長兼世子右正字, 己卯授通禮門奉禮郞知製敎。 世祖嘗命習天文, 時適見日食, 推算食分以進, 幷疏斥異端、開言路、節遊畋、御經筵等事, 言甚鯁峭, 命召入, 詰之曰: "十旬不返, 以麪代牲, 予無是失, 而汝以 比予, 何耶?" 佯加威怒, 命捽下杖之。 略無懼色, 應對不差。 上曰: "眞壯士也。" 遂命進爵, 進退雍容。 俄授兼宣傳官, 上分授諸名臣, 使讀佛經曰: "不喜佛, 其勿授之。" 庚辰拜平安道都節制使都事, 辛巳拜刑曹都官佐郞, 壬午拜咸吉道觀察使都事, 遞爲正言。 癸未拜持平, 遷成均直講兼藝文應敎, 甲申陞司藝。 時韓明澮平安道巡察使, 以爲從事, 每有事當稟旨, 必遣。 是年冬擢授承政院同副承旨, 成化乙酉拜嘉善咸吉道節度使, 丙戌春丁父憂, 康孝文代之, 丁亥李施愛孝文以叛, 起復爲節度使, 及賊平, 從容鎭定, 北方賴以安。 賜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之號, 階加崇政, 封陽川君。 戊子以母病召還, 己丑爲平安道觀察使, 數月徵還, 俄拜大司憲。 有賊張永奇全羅道, 以爲節度使, 賊就擒召還, 未幾拜兵曹判書, 辛卯賜純誠佐理功臣之號, 丁酉拜禮曹判書。 是年建州 野人遼東, 命巡察平安道, 冬拜議政府右參贊, 尋陞左參贊, 戊戌上將廢妃, 人莫敢言, 獨 光武 仁宗之失, 力陳不可, 上意解。 秋丁祖母憂, 庚子起復爲平安道巡察使, 辛丑拜戶曹判書, 壬寅陞議政府右贊成, 癸卯兼世子貳師, 乙巳丁母憂, 丁未秋拜吏曹判書, 戊申翰林侍講董越、給事中(王敝)〔王敞〕 奉詔來, 爲遠接使, 應對周旋中度, 兩使敬服, 臨別至出涕曰: "望公早時朝京, 使中朝知海外有此人也。 所不知者天上, 人間則無雙。" 秋移兵曹判書, 尋加崇祿, 己酉永安道訛言起, 人心不定, 命爲觀察使, 進階輔國崇祿, 辛亥秩滿當遞, 將征尼麻車, 故仍之。 命乘遽入覲, 面陳方略, 遂以爲北征都元帥。 受命還部署, 諸將抵虜部落, 虜皆畏遁, 遂焚蕩室廬而還。 上遣都承旨鄭敬祖齎宣醞迎勞。 壬子進階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 至是病篤, 上遣中官安仲敬問後事, 已危, 開目喉語曰: "願殿下愼終如始而已。" 享年六十一, 諡忠貞, 事君盡節, 忠; 直道不撓, 貞。

【史臣曰: "性寬厚簡重, 姿表秀偉, 鬚髯亦美, 人望之知其爲大人君子, 雖倉卒未嘗疾言遽色, 臨事確然, 不以人主喜怒爲遷就, 博覽書籍, 旁通雜藝, 尤深於性理之學, 平生不治産業, 所居湫陋, 處之泰然。 才兼文武, 望重將相, 以身繫國家輕重, 而北征之擧, 時議惜之。"】


  • 【태백산사고본】 45책 28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475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