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는 의주에 관해 예부에 물어보는 여부를 의논하다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와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中國使臣)이 온 것은 한 번이 아니었으나,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를 맞이할 때는 한결같이 우리 나라의 의주(儀註)429) 에 의해서 시행했습니다. 장영(張寧)은 본조에서 야인(野人)을 죽였다고 하여 와서 그 까닭을 물었으므로 다른 사신의 예와는 달랐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의 의주에 따라서 동시에 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월(董越)이 왔을 때에 비로소 그 예(禮)를 변경시켜 나누어서 두 가지로 하게 하였습니다. 동월의 사람 됨됨이는 점잖아서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부사(副使)인 왕창(王敞)은 경박한 사람이었는데, 동월이 예를 변경시킨 것은 모두가 왕창이 계도(啓導)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애박(艾璞) 등은 동월의 의주(儀註)에 의하여 각각 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도록 강요하였는데, 동월의 무슨 예(禮)에 의해서 그렇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서는 그들이 우리 나라는 해외(海外)의 작은 나라로서 반드시 예(禮)를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니, 신은 마음이 아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정조(正朝) 때에 예(禮)를 아는 대신(大臣)을 선택해 보내어 옛 관례를 널리 상고하게 하고, 조서와 칙서를 맞이 하는데 대한 의주를 겸하여 가져가서 예부(禮部)에 나아가 그 시비(是非)를 밝히게 하면 반드시 귀일(歸一)되는 정론(正論)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조서와 칙서를 따로 맞이하는 의주를 옳다고 하여 항식(恒式)을 삼는다고 하더라도 이는 곧 황제(皇帝)의 명이므로,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아마도 애박처럼 얄팍한 소인(小人)으로 우리 나라를 깔보는 자가 많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쥐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여도 그릇이 깨어질까봐 염려가 되어서 그러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내가 감히 강력하게 거부하지 못하였었는데, 경(卿)이 통분(痛憤)하게 여김은 마땅하다. 다만 이는 큰 일이므로, 용이(容易)하게 할 수는 없다. 예부(禮部)에서 혹 의주를 지금보다 더 심하게 고친다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다.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이극증(李克增)이 아뢴 것은 비록 옳다 하나, 동월(董越)과 애박(艾璞)은 모두 번왕(藩王)의 의주(儀註)에 의거하여 조서와 칙서를 각각 맞이하라고 하는 것인데 무슨 말로 예부(禮部)에 물어야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서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윤호(尹壕)·홍귀달(洪貴達)은 의논하기를,
"소국(小國)은 대국(大國)과 예(禮)를 다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존대(尊大)한다는 책망(責望)만 받을 뿐이니, 이는 사대(事大)하는 성의에 위배됨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이극증이 아뢴 것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예를 아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니, 굳이 예부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말을 타고 칙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번국(藩國)의 의주(儀註)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비록 예부에 물어 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주에 의해 시행한다고 할 것인데, 조서를 맞이하는 의주에는, ‘먼저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부에서, ‘의주에 의하면 먼저 간다고 되어있는데, 어떻게 연(輦)을 타고 갈 리가 있는가?’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서는 물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지난번에 동월(董越)이 돌아갈 적에 ‘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는 의주를 가져간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황제(皇帝)에게 아뢰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온 사신이 말하기를, ‘동 대인(董大人)이 가지고 간 의주는 이미 아뢰어 인준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지금 비록 예부에 물어 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기꺼이 외국을 도우려고 하겠습니까? 그 일은 나라의 체통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는 절차는 마땅히 이극증이 아뢴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부경 사신(赴京使臣)으로 하여금 자문(咨文)430) 을 가지고 가서 예부에 바쳐 의품(議稟)하여 시행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소국(小國)이 어찌 대국(大國)과 예(禮)를 다툴 수 있겠는가?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26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88면
- 【분류】외교-명(明) /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朔庚子/廣川君 李克增來啓曰: "上國使臣非一, 而迎詔勑一依本國之儀, 張寧以本朝殺野人之故, 來問其由, 非他使臣之例, 然亦從本國儀註, 不以一時迎詔勑爲非, 至董越始變其禮, 分而二之, 越之爲人, 平淡無害, 其副王敞輕浮, 越之變禮, 殆敞所導。 今艾璞等據越之儀, 强令各迎詔勑, 未知越據何禮而然也。 臣意彼以我國爲海外小邦, 必無知禮之人, 故敢爲此也。 臣不勝痛心, 請於正朝, 擇遣知禮大臣, 博考古例, 賫兼迎詔勑議註, 就禮部, 辨其是非, 則必有歸一之論, 設使以別迎詔勑之儀爲是, 定其恒式, 此卽皇帝之命, 在所當從, 不然, 臣恐如艾璞浮淺小人, 陵轢本國者多矣。" 上曰: "投鼠忌器, 予不敢固拒, 卿之痛憤宜矣。 但此大事, 不可容易爲之, 禮部或改儀註, 有甚於此, 則將若之何?" 命議領敦寧以上及議政府。 沈澮議: "李克增所啓雖是, 董越、艾璞, 皆據藩王儀註, 各迎詔勑, 以何辭問禮部乎? 臣以爲難。" 尹弼商、尹壕、洪貴達議: "小國不可與大國爭禮, 徒受自尊之責, 有違事大之誠。" 李克培議: "克增所啓似是, 然後日若知禮使臣來, 必不如此, 不必問於禮部。" 盧思愼議: "乘馬迎勑, 載於藩國儀註, 今雖問於禮部, 必云依儀註施行, 迎詔儀註云先行, 若禮部以爲, 依儀註先行, 安有乘輦之理, 則何以答之? 臣意以爲不可問。" 許琮議: "前者董越之還, 迎詔勑儀賫去云, 當奏皇帝。 今次使臣云, 董大人賫去儀註, 已奏准, 今雖問於禮部, 豈肯右外國乎? 玆事有關國體, 不可輕易爲之。" 鄭文炯議: "迎詔勑節次, 宜如克增之啓, 令後次赴京使, 賫咨文去, 呈禮部議稟施行, 似爲無妨。" 傳曰: "小國豈可與大國爭禮? 不如仍舊之爲愈也。"
- 【태백산사고본】 41책 26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88면
- 【분류】외교-명(明) /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