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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 2월 7일 무신 1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지평 민휘 등이 내수사의 종에게 이미 잡역을 면제하고서 또 부역을 덜어 주는 것이 균등하지 못함을 아뢰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민휘(閔暉)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종은 본래 잡역(雜役)을 면제하였었는데, 이제 또 부역(賦役)을 덜어 주었으니, 같은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노고(勞苦)함과 안일(安逸)함이 균등하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정언(正言) 조형(趙珩)이 말하기를,

"모든 백성은 진실로 부역을 균등하게 해야 마땅한데, 유독 내수사의 종만을 면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수사에서 지금 영선(營繕)을 관장(管掌)하면서 바야흐로 그 종들을 역사(役使)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영구한 법이 아니다."

하였다. 민휘(閔暉)가 말하기를,

"만약 내수사 종들의 부역(賦役)을 줄인다면 반드시 다른 백성들에게 옮겨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좌우에 물었다.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다만 영선(營繕)할 때에만 덜어줄 뿐이라고 하나, 이 역사(役事)도 국가(國家)의 일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내수사의 종들을 부리지 말고 일체 선공감(繕工監)에 위임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모든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은 칸수[間數]의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 체제(體制)가 광활(廣闊)하고 또 높고 장려하여 공역(功役)이 지극히 무거우며 큰 재목도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무릇 가옥은 낮고 작아야 먼 훗날까지 지탱할 수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옥의 체제를 높고 장려하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나는 본래 장려(壯麗)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창경궁(昌慶宮)을 영선(營繕)하고 남은 재목을 써서 짓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

하자, 특진관(特進官) 정괄(鄭佸)이 말하기를,

"집이 높고 장려하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왕자(王子)와 왕손(王孫)은 그래도 유지하여 지킬 수 있겠지만, 후대에 이르면 유지해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칙(李則)이 말하기를,

"내수사의 노비(奴婢)는 본래 감로사(甘露寺)의 노비였는데, 내수사에 예속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제 와서 어떻게 누락된 장정이 있겠습니까? 단지 내수사는 잡역(雜役)이 없기 때문에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그 노역(勞役)이 무거운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투속(投屬)하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하였는데, 정괄(鄭佸)이 말하기를,

"진실로 이칙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사천(私賤)이 그 노역의 무거운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내수사에 많이 투속(投屬)하고 있는데, 한 번 정안(正案)에 기록하게 되면 그 주인이 고하여 다툴 수가 없기 때문에 억울함을 품은 자가 많으니, 청컨대 개통(開通)하는 법을 세우게 하소서."

하고,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정안(正案)에 기록된 자는 고하여 다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세워진 법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관리(官吏)와 부동(符同)하여 투속한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자는 주인이 고하여 다툴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사한 무리가 비록 내수사에 투속(投屬)하더라도 만약 속안(續案)을 고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개통(開通)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칙(李則)이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는 20년 만에 정안(正案)을 작성하고, 3년 만에 속안(續案)을 작성하는데, 3년 안에는 단지 생산(生産)한 것과 물로(物故)한 것만을 추쇄(推刷)하고, 20년에 이르러서야 속안(續案)을 상고해서 정안(正案)을 작성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수사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3년마다 추쇄(推刷)하기를 정안(正案)의 예(例)에 의거하니, 그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이미 선두안(宣頭案)091) 에 실려 있다 하더라도 어찌 고하여 다툴 수 없겠느냐?"

하였다. 이칙이 또 아뢰기를,

"지금 명하시어 화차(火車)092) 25부(部)를 평안도(平安道)에 보내게 하셨으나, 본도(本道)의 모든 진(鎭)에 어찌 두루 미치겠습니까? 그러나 평양(平壤)·영변(寧邊)에는 모두 공장(工匠)이 있으니, 스스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홍응이 말하기를,

"이칙이 아뢴 바에 의하여 서울의 공장(工匠)을 보내어 가르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듣건대 서북(西北)의 성(城)이 포위(包圍)되었을 때 그 포위를 풀게 한 공(功)이 화차(火車)만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자, 정괄이 말하기를,

"신이 전라도 여러 포(浦)의 수군(水軍)들을 보건대, 전혀 화포(火砲)를 익히지 않았었습니다. 비록 한두 사람이 쏘는 법을 익혔다고 하나, 또한 늙어서 시원스럽지 못하니, 위급한 사태가 있을 경우 소용(所用)이 없습니다. 청컨대 장건(壯健)하고 연소(年少)한 자를 가려서 평소 쏘는 법을 익히게 하소서."

하였다. 이칙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김종직(金宗直)은 본래 청빈(淸貧)한 사람이라, 지금 그 집에는 약(藥)을 달일 숯조차 없다고 합니다. 김종직은 고향으로 내려간 후 스스로 벼슬자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일체 녹봉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컨대 받지 않은 녹봉을 모두 헤아려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급(題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본래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벼슬자리에 있으므로 녹(祿)을 줄 수가 있으니, 또한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아울러 식물(食物)을 주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처음에 창경궁(昌慶宮)의 남은 재목(材木)을 써서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의 집을 지었는데, 지나치게 높고 크게 하니, 이후로 모둔 군(君)과 옹주(翁主)의 집에서 모두 그것을 본받아 관리를 충청도황해도에 보내어 재목을 채취하게 하였으므로 운반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았고, 선박의 꼬리가 잇달았으며, 또 수군(水軍)을 역사(役事)시키면서 겨울 여름없이 역사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내수사 서리[內需司書題]는 모두 사인(士人)이 아니었는데도, 공장(工匠)을 감독하며 외람된 일이 자못 많았다. 그래서 홍응이 내수사(內需司)를 파하고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도록 아뢰었는데, 첨정(僉正) 김영우(金靈雨)가 그 일을 대신 주관하게 되자, 김칭의 무리와 은총(恩寵)을 바라고 서로 다투어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꾸미려고 힘써서, 동우(棟宇)를 장려하게 하고 담장을 높게 하여 참람(僭濫)함이 궁궐에 견줄 만하였으며, 역부(役夫)를 가혹하게 독려하여 밤낮으로 계속하며 여러 가지로 침해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와하였다. 뒤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말한 것으로 인하여 점차 그 체제(體制)는 줄였으나, 노비(勞費)093) 는 줄지 않았다. 내수사의 종[奴] 흥수(興守)는 가장 간사하고 교활해서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본역(本役)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을 들으면 은밀히 꾀어 부동(符同)하고는 고발장을 내어 진고(陳告)하게 하고, 몰래 선두안(宣頭案)에 기록하곤 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천(私賤)으로서 본주인을 배반하려고 꾀하는 자와 관노(官奴)로서 본역(本役)을 면하려고 꾀하는 자가 다투어 흥수에게 뇌물(賂物)을 주면서 부산하게 부탁하여, 한 번 안(案)에 기록하게 되면 비록 계권(契券)094) 이 있다 하더라도 분변(分辨)하여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칙 등이 그것을 말했던 것이다. 홍응·정괄은 대신(大臣) 가운데 가장 명망(名望)이 있었고, 이칙 또한 도량(度量)이 있었으나, 시배(時輩)에게 추궁당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44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인물(人物) / 사법-법제(法制) / 역사-편사(編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재정-상공(上供) / 신분-천인(賤人) / 공업-관청수공(官廳手工) / 왕실-경연(經筵)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정론-간쟁(諫諍)

  • [註 091]
    선두안(宣頭案) : 내수사(內需司)에 속하는 노비를 20년마다 자세히 조사하여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던 원적부(原籍簿).
  • [註 092]
    화차(火車) : 화공(火攻)하는 데 쓰는 병거(兵車).
  • [註 093]
    노비(勞費) : 노동(勞動)과 비용(費用).
  • [註 094]
    계권(契券) : 증서(證書).

○戊申/御經筵。 講訖, 持平閔暉啓曰: "內需司奴子, 本除雜役, 而今又蠲賦, 同一國民而勞逸不均。" 正言趙珩曰: "凡民固當均役, 內需司奴子獨免可乎?" 上曰: "內需司今掌營繕, 方役其奴, 故不得不爾, 非永久之法也。" 曰: "若蠲內需司奴子賦役, 必移於他民矣。" 上問左右。 領事洪應對曰: "只蠲營繕時耳, 然此役亦國家事也。 臣意勿役內需司奴子, 一委繕工監可也。 且諸君、翁主家舍, 間數有限, 故體制廣闊而高壯, 其功役至重, 巨材亦不易得, 凡家舍低小者, 可以經遠。 請家舍體制, 勿使高壯。" 上曰: "然, 予非固欲壯麗也。 用昌慶宮營繕餘材構之, 故如此耳。" 特進官鄭佸曰: "家舍高壯, 則必不經遠, 王子、王孫, 猶可持守, 至于後世, 則持守亦難。" 特進官李則曰: "內需司奴婢, 本甘露寺奴婢也, 屬內需司已久, 至今豈有漏丁乎? 但內需司無雜役, 故公私賤苦其役重, 投屬者頗多。" 曰: "誠如所啓, 私賤苦其役重, 多投屬內需司, 一錄正案, 其主不得告爭, 抱冤者多。 請立開通之法。" 曰: "錄正案者, 不得告爭, 已有立法。 臣意若與官吏符同投屬明著者, 則許人告爭可也。" 上曰: "奸詐之徒, 雖投屬內需司, 若許改續案, 則可以開通矣。" 曰: "各司奴婢二十年成正案, 三年成續案, 三年內只推刷生産、物故, 至二十年考續案乃成正案。 今內需司不然, 每三年推刷依正案例, 可乎?" 上曰: "雖已載宣頭案, 何不可告爭之有?" 又啓曰: "今命送火車二十五部于平安道, 本道諸鎭, 何以遍及? 平壤寧邊皆有工匠, 可以自造。" 曰: "依啓, 送京匠敎之可也。" 上曰: "近聞西北圍城時解圍之功, 莫如火車。" 曰: "臣見全羅道諸浦水軍, 專不習火砲, 雖有一、二人習放, 亦老而不快, 緩急無所用。 請擇壯健年少者, 常令習放。" 又啓曰: "臣聞金宗直素淸寒, 今聞其家無湯藥之炭, 宗直下鄕後, 自以爲不在官, 一不受祿, 請計未受之祿, 令所在官題給。" 上問左右。 對曰: "宗直, 本廉靜人也。 今猶在職, 可給其祿, 亦令觀察使幷給食物。" 皆從之。

【史臣曰: "初用昌慶宮餘材構桂城君 家, 過爲高大, 自後諸君、翁主家, 皆效之, 遣官取材於忠淸黃海, 輦輸不絶, 軸轤銜尾, 又役水軍, 冬夏督役, 內需司書題, 皆非士人, 監涖工匠, 猥濫頗多, 故啓罷內需司, 令繕工主之, 而僉正金靈雨代幹其事, 與金偁輩希求恩寵, 爭務奢麗, 壯棟宇、高垣墉, 僭擬宮闕, 苛督役夫, 夜以繼晝, 侵耗百端, 民甚苦之。 後因臺諫、侍從言, 稍損其制, 而勞費不減。 內需司奴興守, 最奸黠, 聞公私賤欲避本役, 陰誘符同, 投狀陳告, 仍暗錄宣頭案, 由是私賤之謀背本主者、官奴之規免本役者, 爭賂興守, 紛紜投托, 一錄於案, 則雖有契券, 不得辨理, 故等言之。 洪應鄭佸, 大臣中最有名望, 而亦有度量, 見推於時輩。"】


  • 【태백산사고본】 40책 26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44면
  • 【분류】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인물(人物) / 사법-법제(法制) / 역사-편사(編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재정-상공(上供) / 신분-천인(賤人) / 공업-관청수공(官廳手工) / 왕실-경연(經筵)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