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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8일 기묘 4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영안도에서 돌아온 도승지 정경조에게 북정군의 상황과 민폐의 원인 등에 대해 묻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도승지(都承旨) 정경조(鄭敬祖)영안도(永安道)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내 듣건대, 북정군(北征軍)이 돌아올 때 동상(凍傷)에 걸린 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러하던가?"

하니, 정경조가 말하기를,

"신이 길에서 군사를 보니, 혹은 얼굴이 얼어서 마치 옻[漆]빛 같이 된 자가 있어 겨우 말을 타곤 하였는데, 만약 풍설(風雪)을 만나게 되면, 어찌 살아서 돌아오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백성에게 폐단과 고통을 주는 일들을 물으니, 정경조가 말하기를,

"육진(六鎭)의 군사들이 장기간 번(番)에 들어 방어하면서도 거의 쉬는 날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몹시 괴로와하여 신에게 이르기를, ‘남쪽의 백성을 옮겨 변방을 채워서 사람과 물자가 번성하게 하면, 서로 번갈아 번에 들고 쉬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역(各驛)의 사람들이 또 말하기를, ‘양전 순찰사(量田巡察使) 이극증(李克曾)이 본역(本驛)이 소로(小路)라 하여 그 위전(位田)011) 과 말의 수효를 감축하였기 때문에 각역이 이로 말미암아 매우 쇠잔해졌는데 방어 군관(防禦軍官)은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있으므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으니, 만약 근처에 사는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를 알맞게 헤아려서 각역에 주면 거의 조금은 소생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각역을 보니, 몹시 쇠잔해 있는데도 얼음이 얼기에 이르면 역리(驛吏)들이 말을 가지고 장구한 날을 절도사(節度使)의 행영(行營)에 있게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또 강원도(江原道)의 길을 경유하였는데, 역리들이 이르기를, ‘각역에 공수전(公需田)이 있으나, 그 수입이 심히 적기 때문에 여러 사객(使客)을 지공(支供)할 수 없으므로 역리들이 사곡(私穀)을 가지고 이어 가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전일에는 어염(魚鹽)의 세금으로 각역에 지급하여 공궤(供饋)의 수요(需要)에 보충하게 하였는데, 한 역리가 법을 범한 일이 있어, 이로 인해 드디어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만약 다시 이를 준다면 소생하여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영안북도(永安北道)는 겨울철이면 눈이 쌓여 길을 덮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다니기 어려우므로 방어가 몹시 긴급한데 이르지는 않으나, 만약 2월에 이르면 쌓인 눈이 비로소 녹고 얼음이 점차 풀리므로 말이 다녀도 넘어지지 않아서 도적들이 오기가 몹시 용이하여 그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방 군사(赴防軍士)를 얼음이 풀리기 전에는 바꿀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 군량(軍糧)이 지금은 고갈되지 않았으나, 혹시 그 수효를 헛되게 과장한 것이 아닌가 염려되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각관(各官)의 군량을 모두 오랫동안 묵혀 두고 쓰지 않고 있었는데, 온성(穩城)에서는 1만 3천여 섬[石]을 땅에 쌓아 둔 지 이미 50여 년이 되어, 비록 개나 말까지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이 곡식은 비록 비축해 둔다 하여도 쓰는데 유익함이 없을 듯합니다. 청컨대 해마다 민간에 흩어 주고, 그 반액만 징납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상의(商議)해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정경조가 또 말하기를,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을 오로지 무신(武臣)으로 임명하게 되면, 절도사(節度使)와 군관(軍官) 등이 모두 한때의 비슷한 무리이므로 요구하는 것이 많이 있어서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기 때문에 문신(文臣)과 교차(交差)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신이 비록 활을 능히 쏜다 하더라도 어찌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서 화살과 돌이 날라오는 사이를 출입하겠습니까? 만일 사변(事變)이 있게 되면, 아마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사변이 있으면 마땅히 권도(權道)로 오로지 무신에게 맡길 것이다."

하였다. 정경조가 또 말하기를,

"신이 경흥(慶興)에 이르러서 사로잡혔던 사람 김귀정(金貴精)을 만나보니 그 지형(地形)을 그려서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서쪽에는 니마차(尼麻車)가 있었고, 동쪽에는 우미거(亐未車)가 있었으며, 도골(都骨)은 그 북쪽에 있었고, 남눌(南訥)은 그 남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귀정이 말하기를, ‘도골수주(愁州)올적합(兀狄哈)이 조산(造山)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노략(擄掠)해 갈 때에, 3일 동안을 가서 남눌에 도착하였고, 드디어 도골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산에 침입한 자가 분명히 니마차라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니마차가 일찍이 무이(撫夷) 등지에 침입하여 노략질한 바가 있었고 성저(城底)의 야인(野人)도 또한 말하기를, ‘항상 침입해 오는 자는 니마차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산(造山)의 도적이 니마차가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1면
  • 【분류】
    과학-지학(地學) / 정론-간쟁(諫諍)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농업-양전(量田) / 농업-전제(田制)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외교-야(野)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천인(賤人) / 교통-육운(陸運)

  • [註 011]
    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가 제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御夕講。 都承旨鄭敬祖回自永安道。 上引見, 問曰: "予聞北征軍還, 多有凍傷, 然乎?" 敬祖曰: "臣路見軍士, 或有面凍如漆, 僅能騎馬, 如遇風雪, 豈得生還?" 上又問民間弊瘼, 敬祖曰: "六鎭軍士, 長番防禦, 殆無休日, 民甚苦之, 謂臣曰徙南民實塞, 使人物繁盛, 則可以相遞番休。 各驛之人又曰, 量田巡察使李克增, 以本驛爲小路, 減其位田與馬數, 各驛由是彫殘, 而防禦軍官絡繹不絶, 人不堪其苦, 若以近居各司奴婢量給各驛, 則庶可小蘇。 臣觀各驛甚淍殘, 及其氷合也, 驛吏持馬, 長在節度使行營, 其苦不可勝言。 臣又路經江原道, 驛吏等謂, 各驛有公需田, 然所收甚少, 凡大小使客, 無以支供, 則驛吏收合私穀以繼之, 何以支當? 向以魚鹽之稅, 給各驛以補供饋之需, 有一驛吏犯法, 因此遂廢, 今若復給, 可以蘇息。 臣又聞永安北道, 冬月積雪擁路, 人馬難行, 防禦不至甚緊, 若至二月, 積雪始消, 氷面漸瀜, 馬行不跌, 賊來甚易, 防禦不可踈虞。 赴防軍士, 解氷前未可遞也。 且軍糧今雖不竭, 然恐虛張其數, 臣又聞各官軍糧, 皆久陳不用, 而穩城則一萬三千餘石, 積地已五十餘年, 雖犬馬不食。 臣恐此穀雖畜無益於用, 請逐年散給民間而徵納其半。" 上曰: "其令該司商議施行。" 敬祖又曰: "六鎭守令, 專任武臣, 則節度使軍官等皆一時儕輩, 多有求請, 貽弊於民, 故交差文臣。 然文臣雖能射, 豈能被甲帶劎, 出入矢石之間, 萬有事變, 則恐不可用也。" 上曰: "若有事變, 則當以權宜專任武臣。" 敬祖又曰: "臣到慶興, 見被擄人金貴精, 圖其地形以示臣。 西有尼麻車, 東有亏未車, 都骨在其北, 南訥在其南。 貴精曰: ‘都骨愁州 兀狄哈, 來寇造山擄去之時, 行三日到南訥, 遂至都骨。’ 然則入寇造山者未可的指爲尼麻車也, 然尼麻車嘗寇于撫夷等處, 城底野人亦曰: ‘常時來寇者尼麻車也。’" 上曰: "造山之賊, 安知非尼麻車乎?"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1면
  • 【분류】
    과학-지학(地學) / 정론-간쟁(諫諍)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농업-양전(量田) / 농업-전제(田制)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외교-야(野)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천인(賤人) / 교통-육운(陸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