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군 김겸광의 졸기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을 전례(前例)와 같이하였다. 김겸광의 자(字)는 휘경(撝卿)이요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경태(景泰)640) 계유년641) 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뽑혀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쳤고, 천순(天順)642) 경진년643) 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야인 정벌(野人征伐)에 종군하여 공이 있어서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뛰어 올랐고,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우승지(右承旨)에 이르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올랐다. 성화(成化)을유년644) 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다가 병술년645) 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옮겼는데, 이때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의 자리가 비자 세조(世祖)가 특별히 불러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올려서 제수하였고, 곧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정해년646) 에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옮기었고, 무자년647) 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기축년648) 에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금상(今上)649) 이 즉위하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광성군(光城君)으로 봉(封)하여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에 옮겼다. 계묘년650) 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이듬해〉 갑진년에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하여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고 정미년651) 에 다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는데,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2세였다. 김겸광은 천성(天性)이 순후(純厚)하고 일을 처리함이 주밀(周密)하였다. 시호(諡號)는 공안(恭安)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좋아하고 화(和)하여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 안(安)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겸광은 재물을 탐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집 재산이 대단히 많았다. 하루는 집에 불이 나서 재물이 모두 탔는데, 김자행(金自行)이 가서 위로하기를, ‘영공(令公)은 한스러워하지 마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 티끌일세[百年貪物一朝塵]」라고 한 것이 있오.’라고 하여 자못 기풍(譏諷)652) 하는 뜻이 있었는데, 김자행도 역시 청렴하지 못한 이름이 있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임기가 차서 돌아오려고 할 적에 관중(官中)의 재물을 모두 취하여 짐을 다 꾸려가지고 장차 실으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미워하여 불을 질러 모두 불태우니, 어떤 사람이 기롱하기를, ‘6년 동안 탐한 물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六年貪物一朝灰]’라고 하였으니, 이때 사람들이 명담(名談)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24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2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註 640]경태(景泰) : 명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 [註 641]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642]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註 643]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644]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註 645]
병술년 : 1446 세조 12년.- [註 646]
정해년 : 1467 세조 13년.- [註 647]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註 648]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註 649]
금상(今上) : 성종(成宗).- [註 650]
○光城君 金謙光卒。 輟朝、弔祭、禮葬如例。 謙光字撝卿, 光山人也。 景泰癸酉, 中文科, 選補藝文館檢閱, 歷司憲府監察, 司諫院正言、兵曹佐郞ㆍ正郞。 天順庚辰, 司憲掌令, 從征野人有功, 超拜軍器寺正, 遷知兵曹事, 尋拜承政院同副承旨, 轉至右承旨, 陞嘉善平安道觀察使。 成化乙酉, 拜戶曹參判, 丙戌, 遷開城府留守。 時平安道節度使缺, 世祖, 特召陞嘉靖授之, 尋陞資憲。 丁亥, 以事罷, 俄拜知中樞府事, 轉禮曹判書, 戊子, 出爲慶尙道觀察使, 己丑, 還拜禮曹判書。 上卽位,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封光城君, 遷判漢城府尹。 癸卯, 拜議政府(右贊參)〔右參贊〕 , 甲辰, 加正憲授左參贊, 丁未, 復封光城君。 至是卒, 年七十二。 謙光天性純厚, 處事周密。 諡恭安: 敬事供上恭, 好和不爭安。
【史臣曰: "謙光貪財無恥, 家累鉅萬。 一日家失火, 財物盡燒, 金自行往慰之曰: ‘令公勿恨也。 昔人有云: 「百年貪物一朝塵。」’ 頗有譏諷意, 自行亦有不廉之名。 爲羅州牧使, 秩滿將還, 盡取官中財物, 治任將載, 州人惡而火之盡燒, 有人譏之曰: ‘六年貪物一朝灰。’ 時人以爲名言。"】
- 【태백산사고본】 37책 24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2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註 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