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환의 일에 대해 영돈녕 이상이 의논한 결과, 증거에 의해 죄를 정하기로 결정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한환(韓懽)이 장인[妻父]을 구타(毆打)한 일을 불복(不服)하니, 청컨대 형신(刑訊)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사증(辭證)이 명백하니, 의금부(義禁府)에서 형신(刑訊)을 청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한환(韓懽)은 의친(議親)469) 의 재상(宰相)이므로, 형문(刑問)할 수 없으며, 또한 증거(證據)대로 죄를 정하기도 어렵다. 그것을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또 조지산(趙智山)이 아뢴 것을 물으니, 조지산이 와서 아뢰기를,
"지금 5월 초1일에 한환(韓懽)이 신의 집에 이르러 그 처(妻)와 서로 힐문(詰問)하다가 갔는데, 신이 마침 광릉 헌관(光陵獻官)으로서 제사(祭祀)를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한환(韓懽)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환이 신을 따라 신의 집에 이르러 성을 내어 사랑채[翼廊]의 장지[障子]를 발로 차서 부수고 그 처(妻)를 꾸짖으며 큰 소리로 싸우므로, 신이 제지(制止)하니, 한환이 신을 조 첨지(趙僉知)라고 부르며 언사(言辭)가 자못 패만(悖慢)하였습니다. 또 초3일 인정(人定)470) 때 신이 한환(韓懽)의 처(妻)와 함께 앉아 있는데, 한환이 술이 취하여 와서 횃불[炬]을 들고 뜰안으로 들어오므로, 신이 한환에게 이르기를, ‘자네의 벼슬이 봉군(封君)되기에 이르렀는데, 무엇 때문에 몸소 횃불을 들었으며, 또 무엇 때문에 나를 조 첨지(趙僉知)라고 부르는가?’ 하니, 한환이 대답하기를, ‘조(趙)는 성(姓)이요, 첨지(僉知)는 벼슬이라, 조 첨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찌 불가(不可)함이 있다는 것이오?’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한 나머지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밤 삼경(三更)이 되어 한환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진실로 신을 구타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을 살펴본 후에 처치(處置)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한환이 장인[妻父]을 구타(毆打)할 때 증견(證見)한 사람이 없고, 단지 조지산(趙智山)이 우는 소리만 들었으며, 장지[障子]가 부서진 것을 보았을 뿐이니, 구타한 것으로 논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장인을 능욕(陵辱)하고 장지를 차서 부서뜨렸으니, 어찌 사위[子壻]의 도리이겠습니까? 한환이 비록 자복(自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증거(證據)에 의하여 조율(照律)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한환은 재상(宰相)인데다가 또 의친(議親)이니, 형신(刑訊)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장인을 능욕(陵辱)한 실상(實相)이 여러 사람의 초사(招辭)에서 명백(明白)해 졌으니, 비록 증거에 의거하여 죄(罪)를 정한다 하더라도 애매하지 않습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한환의 일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륜(人倫)을 업신여겨 내버린 것이고, 크게는 성치(聖治)의 누(累)가 되니, 재상(宰相)으로 대우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형신(刑訊)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단지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박소(薄昭)를 죽여 모후(母后)의 마음을 상하게 하니471) , 옛사람이 그릇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비록 형신(刑訊)하더라도 죽이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또한 대비(大妃)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환의 광패(狂悖)함은 모든 사람이 함께 아는 바이니, 증거(證據)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한환이 장인을 능욕(陵辱)한 것이 매우 명백(明白)하니, 다시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실제로 구타(毆打)하였다 하더라도 죄가 사형(死刑)에 이르지는 않으니, 시추(時推)로 조율(照律)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홍응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24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07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왕실-비빈(妃嬪)
- [註 469]의친(議親) : 팔의(八議)의 하나. 즉 임금의 단문 이상친(袒免以上親), 왕대비(王大妃)·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왕비의 소공 이상친(小功以上親), 세자빈(世子嬪)의 대공 이상친(大功以上親)을 말함. 범죄자를 처벌할 때 형(刑)의 감면을 하였음.
- [註 470]
인정(人定) : 오후 10시경.- [註 471]
단지 한(漢)나라문제(文帝)가 박소(薄昭)를 죽여 모후(母后)의 마음을 상하게 하니 :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박소(薄昭)로 하여금 자살하게 한 일을 말함. 박소는 문제의 어머니인 박희(薄姬)의 동생임.○丙申/義禁府啓: "韓懽不服歐妻父事, 請刑訊。" 傳曰: "辭證明白, 義禁府請刑訊當矣。 然懽議親宰相, 不可刑問, 亦難據證定罪。 其議于領敦寧以上。" 又問于趙智山以啓, 智山來啓曰: "去五月初一日, 韓懽到臣家, 與其妻相詰而出, 適臣以光陵獻官行祭而還路遇懽。 懽隨臣至臣家, 發怒踢破翼廊障子, 叱罵其妻, 高聲喧鬨。 臣止之, 懽呼臣曰: ‘趙僉。’ 言辭頗(勃)〔悖〕 慢。 又初三日人定時, 臣與懽妻同坐, 懽乘醉而來, 執炬入庭中。 臣謂懽曰: ‘子官至封君, 何親執炬爲, 又何呼我爲趙僉知?’ 懽答曰: ‘趙姓也, 僉知爵也, 呼爲趙僉知有何不可?’ 臣聞之痛心哭泣。 至夜三更, 懽乃還家, 固無歐臣事。" 傳曰: "觀群議後, 當處置。" 沈澮議: "韓懽歐妻父時, 無證見者, 但聞智山哭泣聲, 見障子破落而已, 不可以歐打論。 然陵辱妻父, 打破障子, 豈子壻之道? 懽雖不服, 據證照律爲當。" 尹弼商議: "懽宰相, 且議親也, 不可刑訊。 但其陵辱妻父之狀, 諸人招辭明白, 雖據證定罪, 不爲暖昧。" 洪應議: "懽事, 口不可道, 蔑棄人倫, 大爲聖治之累, 不可以宰相待之。 雖刑訊何傷? 但漢 文殺薄昭, 傷母后之心, 古人非之。 今加刑訊, 雖不至於殺, 不亦傷大妃之心乎。 懽之狂悖, 衆所共知, 據證定罪何如?" 盧思愼、尹壕議: "懽陵辱妻父明甚, 不須更問。 雖實歐打, 罪不至死, 以時推, 照律定罪何如?" 從洪應議。
- 【태백산사고본】 37책 24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07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왕실-비빈(妃嬪)
- [註 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