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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32권, 성종 20년 9월 16일 신미 2번째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함흥 사람 주맹수 등이 함흥군의 이름을 승격시킬 것을 청하다

이조(吏曹)에서 함흥인(咸興人) 주맹수(朱孟粹) 등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함흥군(咸興郡)이 비록 목조(穆祖) 이하의 네 능(陵)이 있는 곳이고, 영흥부(永興府) 또한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탄생(誕生)하신 곳이나, 준원전(濬源殿)932) 이 있는 곳은 다시 강등(降等)할 수 없으므로, 영흥(永興)에 다시 함흥(咸興)을 세운 것입니다.933) 그러나 여흥부(驪興府)와 양주부(楊州府)영릉(英陵)광릉(光陵)이 있는 곳이므로 부를 승격하여 목(牧)으로 삼았고, 고양현(高陽縣)경릉(敬陵)창릉(昌陵)이 있는 곳이므로 현(縣)을 승격하여 군(郡)으로 삼았고, 원평부(原平府)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어향(御鄕)이므로 또한 승격하여 목(牧)으로 삼았으니, 능침(陵寢)이 있는 곳과 본원(本源)의 땅은 으레 모두 이름을 승격하였습니다. 함흥이 비록 이시애(李施愛)의 역당(逆黨)인 이중화(李仲和) 등이 살던 곳이기는 하나, 이름을 강등하여 군(郡)으로 삼은 지가 지금 이미 20년이 되었으니, 네 능침(陵寢)이 있는 용비(龍飛)934) 의 어향(御鄕)을 작은 고을[小邑]에 비기는 것은 실로 미안(未安)합니다.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이름을 승격하소서."

하니,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의논하기를, "함흥 사람이 이시애와 당여(黨與)가 되어 반역(叛逆)을 하고, 이미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을 죽였으며, 또 순찰사(巡察使) 윤자운(尹子雲)을 가두었으니, 죄악(罪惡)이 매우 심하여, 이름을 강등해서 군(郡)으로 삼아 대의(大義)를 밝게 보인 것입니다. 비록 능침이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죄악이 사직(社稷)에 있으므로 가볍게 이름을 승격할 수 없으며, 또 《대전(大典)》에 주군(州郡)의 이름을 이미 정하였으니, 아직은 예전대로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23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1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사(宗社)

  • [註 932]
    준원전(濬源殿) : 환조(桓祖)의 옛집으로서, 태조(太祖)가 탄생한 곳. 태조의 초상화(肖像畫)를 모셨었음.
  • [註 933]
    영흥(永興)에 다시 함흥(咸興)을 세운 것입니다. : 세조(世祖) 13년(1467)에 함흥부의 사람이 이시애(李施愛)의 사주를 받고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성종(成宗) 원년(元年 : 1470)에 함흥을 강등하여 군(郡)을 삼고, 관찰사영(觀察使營)을 영흥부로 옮긴 것을 말함.
  • [註 934]
    용비(龍飛) : 임금이 난 곳을 뜻함.

○吏曹據咸興朱孟粹等上言啓: "咸興郡穆祖以下四陵所在, 永興府太祖大王誕生之地, 濬源殿所在, 則不可還降永興復立咸興。 然驪興楊州府英陵光陵所在陞爲牧, 高陽縣敬陵昌陵所在陞爲郡, 原平府貞熹王后御鄕亦陞爲牧, 則陵寢所在及本源之地, 例皆陞號。 咸興雖以李施愛逆黨李仲和等所居, 降號爲郡, 今已二十年。 以四陵寢所在、龍飛御鄕, 例於小邑, 實爲未安。 請依例陞號。" 命議于大臣。 李克均議: "咸興人黨李施愛爲逆, 旣殺觀察使申㴐, 又囚巡察使尹子雲, 罪惡尤甚, 降號爲郡, 明示大義。 雖陵寢所在, 罪在社稷, 不可輕易陞號。 且《大典》州郡名號已定, 姑仍舊何如?" 從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23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51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