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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60권, 성종 14년 11월 12일 신축 2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정희 왕후 상제(喪制)에 대해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공덕(功德)이 지극히 성(盛)하기 때문에 특별히 3년의 상제(喪制)를 하였으나, 상제는 모름지기 《예경(禮經)》에 의할 것이고 더하고 덜할 수 없으며,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禮)는 감히 지나치지 못하며 또한 감히 미치지 아니할 수도 없습니다. 신은 아마도 후세(後世)에서 이에 의거하여 예(例)를 삼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의 몸을 보호하여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은 모두 정희 왕후의 덕인데, 일국(一國)의 신서(臣庶)로서 누가 공덕의 성(盛)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상제를 처음 의논할 때를 당하여 기년(期年)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내가 바야흐로 슬프고 병든 중에 있어서 감히 어기지 아니하였었다. 이제 이르러 되풀이해 생각하니, 반드시 3년의 제도를 정한 뒤에야 망극(罔極)한 은혜를 거의 보답하겠다."

하였다. 지사(知事)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정희 왕후의 공덕이 성대(盛大)하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어찌 3년으로써 넘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낮추어 줄이는 의논은 차마 신하의 입에서 나올 수 없으나 다만 상제(喪制)의 큰 일은 만세에 바뀌지 아니하는 떳떳한 법이기 때문에, 은(殷)나라는 하(夏)나라 예(禮)에 인하였는데 덜고 보탠 것을 알 수 있고, 주(周)나라는 은나라 예를 인하였는데 덜고 보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질 삼통(文質三統)1266) 은 덜고 보탤 수 있으나 삼강 오상(三綱五常)1267) 은 고칠 수 없습니다. 상제(喪制)의 기(紀)1268) 는 이것이 삼강 오상이 아닙니까? 근자에 상제를 다시 의논할 때 신이 허종(許琮)과 더불어 그 옳고 그름을 서로 힐난하였는데, 허종이 말하기를, ‘비록 《예경(禮經)》에는 근거할 바가 없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3년을 더하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무방하다고 하는 말은, 동쪽으로도 할 수 있고 서쪽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가하거니와 이 상제(喪制)의 큰 기강은 한때의 권의(權宜)로써 무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여러 의논을 널리 채택하여 정론(正論)을 취할 것이며,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써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근거가 없는 말은 듣지 말라.’고 하였는데, 허종의 말은 진실로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성인(聖人)의 바르고 떳떳한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고서 근거가 없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3년을 입는데, 기년(期年) 후에 여러 신하는 길례(吉禮)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진현(進見)할 때에는 천담복(淺淡服)1269) 으로 바꾸니, 이것도 권도(權道)에 따르는 것이다. 만약 상제(喪制)는 권도에 따를 수 없다고 한다면 진현할 때에 변복(變服)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파(李坡)가 말하기를,

"한집안에서 그 아들은 부모(父母)를 위하여 비록 3년을 입을지라도 그 밑에 노예(奴隷)의 무리는 복(服)이 없습니다. 또 《예(禮)》에 이르기를, ‘임금이 기년(期年)을 입으면 여러 신하는 복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정(情)이 박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강쇄(降殺)1270) 하는 예(禮)가 그러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그 선조(先祖)에 비하면 그 정(情)이 두터울 것이나, 예(禮)를 넘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 이르기를, ‘전사(典祀)1271) 는 친근한 이에게 풍족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상제(喪制)는 더욱 한때의 인정(人情)의 후박(厚薄)으로써 낮추거나 높일 수 없습니다. 만약 수렴 청정(垂簾聽政)1272) 의 공(功)으로써 특별히 상제를 더하면, 수렴 청정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신은 두렵건대, 만세(萬世) 후에 이에 의거하여 예(例)를 삼으면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을 이룰 듯합니다. 송(宋)나라 고후(高后)1273)조후(曹后)1274) 는 공덕(功德)이 심히 많아서 역사에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라고 일컬었으나 당시에 상제를 넘치게 하자는 논의가 없었습니다. 이제 3년 제도의 복(服)을 입는 것은 비록 후(厚)하게 하는 데 따르는 것 같으나 또한 예(禮)에 어긋나므로 도리어 박(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조(祖)는 공(功)이 있고 종(宗)은 덕(德)이 있는 것이며, 문세실(文世室)·무세실(武世室)이 있다.’는 논의는 본래 왕후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건의(建議)한 것은 바로 간사한 의논입니다. 신의 구구(區區)한 마음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일체 예문(禮文)에 따르시고 신 등의 말을 받아들이소서."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종직(金宗直)은 아뢰기를,

"예전에 구양수(歐陽修)복왕(濮王)1275) 의 의논을 주창하였는데, 후세 사람이 비난하여 간사한 의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3년의 제도를 정하고자 건의한 것은 정당한 논의가 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세에 어찌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공덕(功德)과 같은 이가 있어서 예(例)로 삼겠는가? 가령 다시 정희 왕후의 공덕과 같은 이가 있다고 하면 비록 이 예에 의거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또 염습(斂襲)과 장의(葬儀)는 일체 대왕의 예에 비겼으나 그 때에 경 등은 일체 말한 바가 없었는데, 홀로 상(喪)을 입는 일에는 어찌하여 말을 이처럼 하는가?"

하였다. 이파가 말하기를,

"의금(衣衾)·관곽(棺槨)은 다만 장구(葬具)의 한 가지 일일 뿐인데 어찌 바꿀 수 없는 상기(喪紀)와 같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종직은 말하기를,

"옛사람이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의(信義)로 하여, 염장(斂葬)하는 일을 마땅히 후한 데 따를 것이나, 상제(喪制)에 이르러서는 인정의 후박(厚薄)으로써 어지럽게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짐작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장령(掌令) 곽은(郭垠)과 헌납(獻納) 양면(楊沔)이 아뢰기를,

"날씨가 추울 때에 수리 도감(修理都監)에 부역(赴役)하는 군사가 진실로 가엾으니, 빌건대 잠시 역사(役事)를 정지하였다가 봄에 따뜻하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요즘 몹시 추운 아침을 만나면 부역하는 군사뿐만 아니라 파수[把直] 군졸에 이르기까지 추위에 얼 것을 염려하여, 이미 승지(承旨)로 하여금 깊숙한 곳에 있도록 하였으나, 사졸(士卒)이 많으므로 진실로 사람마다 구제할 수가 없다. 또 이 역사(役事)는 다른 영선(營繕)의 예(例)가 아니고 부득이한 형편에 있으며, 이미 시작한 것이므로 중지할 수 없는데, 만약 봄에 따뜻하기를 기다리면 역사를 날로 물리게 되어 명년에도 마치지 못할까 두렵다. 이제 일하는 것은 진흙을 바르는 일이 아니고 창호(窓戶)를 수장(修粧)하는 것뿐이다. 공장(工匠)은 또한 노는 무리가 아니고 항상 연장으로 깎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자인데, 늠식(廩食)1276) 을 주어서 공사에 나아가게 하면 무엇이 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16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4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공업-장인(匠人) / 군사-중앙군(中央軍)

  • [註 1266]
    문질 삼통(文質三統) :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정사(政事)를 이름. 곧 문질(文質)은 하(夏)나라는 충(忠)을, 은(殷)나라는 질(質)을, 주(周)나라는 문(文)을 숭상하는 것이고, 삼통(三統)은 하나라는 인월(寅月)로 정월을 삼으니 인통(人統), 은나라는 축월(丑月)로 정월을 삼으니 지통(地統), 주나라는 자월(子月)로 정월을 삼으니 천통(天統)임.
  • [註 1267]
    삼강 오상(三綱五常) :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 [註 1268]
    기(紀) : 기한.
  • [註 1269]
    천담복(淺淡服) : 제사 때에 입는 엷은 옥색의 옷.
  • [註 1270]
    강쇄(降殺) : 등급을 아래로 낮춤.
  • [註 1271]
    전사(典祀) : 나라에서 정한 제사.
  • [註 1272]
    수렴 청정(垂簾聽政) :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던 일.
  • [註 1273]
    고후(高后) : 송나라 영종(英宗)의 후(后)인 고 황후(高皇后).
  • [註 1274]
    조후(曹后) : 송나라 인종(仁宗)의 후(后)인 조 황후(曹皇后).
  • [註 1275]
    복왕(濮王) : 송나라 영종(英宗)의 생부(生父).
  • [註 1276]
    늠식(廩食) : 나라에서 받는 부조미(扶助米).

○御經筵。 講訖, 侍讀官閔師騫啓曰: "貞熹王后, 功德極盛, 故別爲三年之制, 然喪制須倣《禮經》, 不可增損, 先王制禮, 不敢過, 亦不敢不及也。 臣恐後世據此爲例也。" 上曰: "調護寡躬, 式至今休, 皆貞熹之德也。 一國臣庶, 誰不知功德之盛乎? 當喪制初議之時, 定爲朞年之制, 予方在疚, 未敢違異。 到今, 反覆思之, 必以三年定制, 然後庶酬罔極之恩。" 知事李坡啓曰: "貞熹功德盛大, 於臣子之心, 豈以三年爲有餘乎? 降殺之論, 不可忍出於臣子之口。 但喪制大事, 萬世不易之常經, 故因於禮, 所損益可知, 因於禮, 所損益可知。 文質三統, 可以損益, 三綱五常, 不可改也。 喪制之紀, 玆非三綱五常乎? 近者更議喪制之時, 臣與許琮, 相與詰其是非。 許琮以爲: "雖於《禮經》, 無所可據, 然臣之意, 雖加三年, 似亦無妨。" 夫所謂無妨之言, 於可東可西之事, 則可矣, 如此喪制之大紀, 不可以一時權宜謂無妨也。 且博採群議, 以取正論, 不可以位之高卑, 而取舍之也。 古云: "無稽之言, 勿聽。" 許琮之言, 實乃無稽之言也。 不從聖人經常之制、聽納無稽之言, 未穩。" 上曰: "予則服三年, 而期年之後, 群臣當從吉禮, 進見之時, 變以淺淡服, 此亦從權也。 若曰: ‘喪制不可從權’, 則進見之時, 不必變服也。" 曰: "一家之內, 其子爲父母, 雖服三年, 其下奴隷之屬, 無服。 且《禮》曰: ‘君服朞年, 則群臣無服。’ 此非情薄, 實乃降殺之禮, 然也。 子之於父, 其視先祖, 其情應亦益厚, 然禮不可踰越。 故古云: ‘典祀無豐于昵’。 況喪制尤不可以一時情意之厚薄, 爲之低昻。 若以垂簾聽政之功, 特加喪制, 則垂簾出於不得已, 誠非美事。 臣恐萬世之下, 據此爲例, 以成難救之弊。 , 功德甚盛, 史稱女中, 然當時喪制, 未有踰越之論。 今之服三年之制, 雖若從厚, 然亦違禮, 反以爲薄也。 議者謂: ‘祖有功、宗有德、文世室、武世室’ 之論, 本非指爲王后言也。 建爲此議者, 正爲邪論。 臣區區之心, 願殿下一遵禮文, 聽納臣等之言。" 右副承旨金宗直啓曰: "昔(歐陽脩)〔歐陽修〕 唱爲濮王之議, 後人非之, 以爲邪論。 今之建議, 定爲三年之制者, 似未爲正論也。" 上曰: "後世安有如貞熹之功德者, 而以爲之例? 假使復有如貞熹之功德者, 則雖據此例, 何害之有? 且斂襲、葬儀, 一擬大王之例, 而其時卿等一無所言, 獨於服喪之事, 何言之若是?" 曰: "衣衾、棺槨, 特葬具之一事耳, 豈可與不易之喪紀等論哉?" 宗直曰: "古人必誠必信, 斂葬之事, 固當從厚。 至如喪制, 不可以情意之厚薄, 而紛更之也。" 上曰: "當斟酌施行。" 掌令郭垠、獻納楊沔啓曰: "時氣寒冱, 修理都監赴役之軍, 誠可矜恤。 乞暫停役, 以待春和。" 上曰: "予豈不思? 近日遇嚴寒之朝, 則非徒赴役之軍, 至如把直軍卒, 無不慮其寒凍。 已令承旨, 置諸奧處, 然士卒衆多, 固不得人人而濟之。 且此役非他營繕之例, 在所不得已, 業已始之不可中止。 若待春和, 則役事日退, 恐明年猶未畢就。 今所役非泥塗之事, 特窓戶修粧耳。 工匠且非遊手之徒, 常以斤斲爲業者也, 給廩食, 使之就工, 何害之有?"


  • 【태백산사고본】 24책 16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54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공업-장인(匠人) / 군사-중앙군(中央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