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725) 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726) 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727) 은 죄가 없는데도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14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375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법(兵法)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의약-약학(藥學)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725]기해년 : 1479 성종 10년.
- [註 726]
발호(跋扈) : 세력이 강해져 제어하기 힘듦.- [註 727]
구익 부인(鉤弋夫人) :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궁녀 조첩여(趙婕妤)로서 소제(昭帝)의 생모임. 무제가 자신은 늙고 소제는 어리므로 후일 자신이 죽은 뒤에 어린 임금을 끼고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죽였음.○壬子/上幸慕華館閱武, 遂詣景福宮, 問安于三殿, 還宮。 命召領敦寧以上議政府、六曹、臺諫, 御宣政殿, 引見謂曰: "尹氏, 凶險惡逆, 不可勝言。 當初固宜罪之, 姑忍之以待自新。 至己亥年, 罪惡貫盈, 然後廢爲庶人, 然不忍置之於法。 今元子漸長, 人心如此未定, 在今日雖無可慮, 後日之患, 可勝言哉? 卿等其各陳爲社稷之計。" 鄭昌孫曰: "後日必有跋扈之患, 不可不預爲之圖。" 韓明澮曰: "臣常與昌孫共坐, 則未嘗不以此事爲言。" 昌孫曰: "但有元子爲難耳。" 上曰: "予若不定大計, 元子何以爲之? 後日宗社或至傾危, 則罪在於予。" 沈澮、尹弼商曰: "宜斷以大義, 早定大計。" 李坡曰: "臣於己亥年, 未及與議, 大抵臣妾挾毒而去忌, 立幼而自專, 罪不容於天地。 昔鉤弋夫人無罪, 而漢 武殺之, 爲萬世計也。 今宜早定大計。 臣有此心久矣, 但無緣未啓耳。" 上曰: "後日彼爲跋扈, 其患豈不大哉? 武后之多殺朝臣, 自知罪大天下不服, 欲示威嚴耳。" 仍問左右曰: "何如?" 宰相、臺諫同辭以啓曰: "衆議皆以爲然。" 卽命左承旨李世佐, 賜死于其第, 命右承旨成俊, 以此意啓于三大妃殿。 世佐啓曰: "臣不識面, 請與內官偕往。" 命曺疹隨去。 世佐出招內醫宋欽問曰: "何藥可以殺人?" 欽曰: "無如砒礵。" 令注書權柱, 馳往典醫監, 取砒礵而去。 當夕, 傳曰: "世佐勿來, 留宿其第。"
【史臣曰: "明澮言: ‘常與昌孫共坐, 未嘗不以此事爲言。’ 是則似爲後日之慮也。 前日上因權景祐之啓顧問, 而明澮乃云: ‘人君所御, 雖賤者, 不可置之於外, 況國母乎?’ 是則似以褻處爲嫌, 非爲後慮也。 何前後之相悖耶? 大臣爲國, 慮不宜如是也。"】
- 【태백산사고본】 21책 14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375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법(兵法)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의약-약학(藥學)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