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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130권, 성종 12년 6월 21일 갑자 1번째기사 1481년 명 성화(成化) 17년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 등이 가뭄에 대해 상소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맹현(李孟賢)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신(臣)들이 보건대, 전하께서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고, 5월 19일에 계사(癸巳)에 큰 우박이 내렸으므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찬선(饌膳)을 줄여 매우 자책(自責)하며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재변을 가져온 까닭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또 이달 18일 신유(辛酉) 밤에 손수 쓰신 분부를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이르기를,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거니와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경들은 각각 그 마음을 경계하여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시는 것이니, 이 뭇신하가 마음을 합하여 일을 삼가야 할 때에 누가 속마음을 털어 놓아 천총(天聰)에 아뢰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재변이 나타나는 것은 음양(陰陽)이 고르지 않기 때문이고, 음양이 고르지 않은 것은 임금과 신하에게 부족하고 잘못된 일이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예전부터 밝은 임금은 혹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정치의 부족한 것을 생각하여 천심(天心)에 맞추고 화기(和氣)를 가져올 방법을 찾았으므로, 이변을 그치게 하고 태평을 길이 보존할 수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허물을 인책하는 분부를 내리시기는 하였으나, 혹 하늘에 응답하는 실속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외람되게 경연(經筵)에서 모시므로 마음에 품은 것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습니다. 삼가 조목으로 아뢰어 다음에 벌여 적으니, 가려 채택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용인(用人)을 살피는 일입니다. 신들은 사람을 알아보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더욱이 사람을 쓰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한 사람이 온갖 관원의 위에 임하고, 사정(邪正)·현우(賢愚)가 그 앞에 섞여 있는데, 재지(才智)에 장단(長短)이 있는 것이 마치 조두(俎豆)497) ·준뢰(尊罍)498) 의 그릇 됨됨이와 동량(棟梁)499) ·최각(榱桷)500) 의 재목 됨됨이처럼 모나고 둥글고 크고 작은 것이 다 쓰이는 데가 있는 것과 같아 그것을 쓰는 방도가 각각 재목과 그릇에 알맞아야만 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애써 잘 다스리려고 측석(側席)501) 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고 빼어난 사람을 등용하여 여러 벼슬에 벌여 두셨으니, 인재을 얻은 아름다움이 이제 융성하나, 가리는 방도와 쓰는 방도에는 혹 한두 가지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들이 인재의 처세를 두루 보건대, 경술(經術)을 지닌 자가 혹 이재(吏才)에 모자라고, 사어(射御)를 잘하는 자가 혹 치체(治體)에 어두우며, 말을 잘하는 자가 반드시 실천(實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장이 넉넉한 자가 반드시 죄다 경세(經世)의 재목이 아니며, 재지(才智)가 민첩한 자는 사부를 감당할 수 있으나 함께 큰 교화를 이룰 수 없고, 빠르고 씩씩한 자는 심부름을 잘할 수 있으나 큰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벌 좋은 자제(子弟)가 반드시 다 어진 사람이 아닌데도 으레 높은 지위에 오르고, 초야(草野)의 미천한 선비가 반드시 변변치 못한 사람이 아닌데도 흔히 아랫자리에 엎드려 있으며, 장수(將帥)는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데도 여느 때의 버릇에 젖어 훈련이 정(精)하지 않고, 수령(守令)은 백성의 부모가 되는데도 조세를 거둬들이기에 바빠서 어루만지는 것이 도리에 어그러지며, 전형(銓衡)하여 가리는 것이 중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한갓 으레 문서의 기록에 따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자가 함께 침체하여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천거하는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한갓 사사로운 욕심을 따르므로, 뽑아 쓰고 버리는 것이 번번이 거꾸로 놓이는 걱정이 있으니, 이것은 깊이 생각하고 익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들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임관(任官)을 어렵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여겨 밝게 살피고, 잘 가리시어 재기(材器)를 헤아려서 주고, 역량(力量)을 헤아려서 맡기며, 그 장점을 취하고 그 단점을 버리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용맹과 지략이 있는 자가 군려(軍旅)를 다스리고, 분별할 줄 아는 자가 전선(銓選)을 맡으며, 너그럽고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수령의 책임을 맡고, 굳세고 바른 자가 대간의 직임을 갖게 하시며, 천거하는 법을 더욱 밝히시고 잘못 천거한 죄를 더욱 엄하게 하시어, 천거된 자가 모두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등용된 자가 각각 그 재주에 알맞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전하께서 가만히 계셔도 천지의 화기(和氣)를 넉넉히 오게 할 수 있고, 가뭄의 재변을 넉넉히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형상(刑賞)을 삼가는 일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임금이 천하를 고동(鼓動)하고 신민을 제어하기 위한 권세로는 형벌과 포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대개 공이 있는 자를 어김 없이 상주면 노고하는 신하가 권장되고, 죄가 있는 자를 어김없이 벌주면 간사한 사람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혹 어그러지면 국가의 기강이 반드시 타락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순(舜)임금고요(皐陶)502) 를 명할 때에 ‘조심하고 조심하여 형벌을 삼가라.’ 하였고, 한소후(韓昭侯)가 헌 바지를 간수하며 ‘현명한 임금은 한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낀다. 내가 반드시 공이 있는 자가 있거든 이것을 줄 것이다.’ 하였으니, 임금의 형벌과 포상을 삼가려는 뜻을 대개 알 만합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형벌과 포상의 시용(施用)은 봄이 만물을 낳고 가을이 만물을 죽이는 것처럼 한결같이 공정한 데에서 나와야 하겠는데, 요행히 얻거나 면하게 한다면, 이는 춥고 더운 계절이 서로 어그러졌는데도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한 벼슬을 임명하거나 한 일을 거행할 때에 먼저 상을 마련하여 성취를 요구하니, 이는 이익으로 꾀는 것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관아(官衙)를 설치하고, 관리를 두되 재주를 헤아려서 직임을 주는 것은 천록(天祿)을 함께 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겠습니다. 능히 그 일을 다스려서 그 벼슬에 알맞은다면 포상(褒賞)하는 법을 거행해야 마땅하겠으나, 윗사람이 상을 놓고서 아랫사람을 꾀고, 아랫사람은 그 상을 이롭게 여겨서 그 공을 바라, 조그만 공로를 쌓아도 낱낱이 상을 받아 마치 좌계(左契)503) 를 손에 들고 바꾸어 주듯이 한다면, 아마도 포상하는 법이 착한 일을 권장하지 못할 뿐더러 이욕(利欲)의 문을 열기에 알맞을 것이니, 어찌 예전에 하늘은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임명한다는 뜻에 맞겠습니까? 또 한 형벌이 마땅하지 않으면 3년 동안 크게 가문다 하였습니다. 대저 관리 중에 측달(惻怛)하고 경외(敬畏)하는 자는 적고 우매하고 잔혹(殘酷)한 자는 많아서 옥사(獄事)를 판결할 때에 애증(愛憎)에 의하여 죄수를 논하고, 의사(疑似)한 일을 가지고 옥사를 의논하여 열 가지를 심리하여 결단한 가운데에서 잘못된 것이 대여섯 가지라면, 주당(奏當)504) 이 이루어진 후에는 고요(皐陶)가 심리(審理)하더라도 억울한 일을 풀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이의 생사(生死)·득실(得失)이 사람의 뜻을 상하게 한 것이 어찌 재변의 응험(應驗)을 불러 오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형옥(刑獄)의 일에 대하여 불쌍하고 슬프게 여기시어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德)이 백성의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러나 불행히 필부 필부(匹夫匹婦)가 죄에 빠지면, 형리(刑吏)가 된 자로서 혹 정상이 불쌍히 여길 만한 것을 알더라도 반드시 법을 적용하려 하여, 승복하지 않으면 갖은 고문을 다 가하니, 이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유리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이로써 실입(失入)505) 하게 한 죄는 적고 실출(失出)506) 하게 한 죄는 많은 것입니다. 또 법이란 천하의 법이므로,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무릇 사람들에게 죄가 있으면 스스로 결단하지 않고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시니, 이는 경중을 가려서 중도(中道)에 맞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사에서 평번(平反)507) 하는 것이 없이 한결같이 전지(傳旨)에 따라 신문하여 주당(奏當)한다면, 전하께서 조심하고 돌보며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德)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혹 유사의 주당한 바가 가볍다고 생각하여 다시 무겁게 하신다면, 이는 법을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있는데도 뭇사람과 함께 하는 뜻이 아니고, 또한 예전에 차라리 불경(不經)508) 하여 실형(失刑)한 책임을 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신들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형벌과 포상을 더 삼가서 사방에 명하시되, 정상이 호종(怙終)509) 한 것이 아니고 죄가 의심스러운 것은 가볍게 죄주고, 공로가 현저하지 않거든 상을 함부로 주지 않으며, 형벌은 귀근(貴近)이라 하여 면하게 해서는 안되며, 상(賞)은 요행히 얻지 못하게 하여 포상할 만하면 포상하고 형벌할 만하면 형벌하여, 참람한 것이 없어서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넉넉히 인심을 안정시키고, 염치를 길러서 화평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세째는 풍속(風俗)을 바루는 일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남의 나라를 잘 엿보는 자는 그 형세의 성쇠(盛衰)를 보지 않고 그 풍속을 보며, 그 정치의 순자(醇疵)510) 를 살피지 않고 그 사검(奢儉)511) 을 살핀다고 합니다. 대개 풍화(風化)를 이미 잃고 유속(流俗)이 이미 이루어지면, 후한 상으로도 권장하지 못하고 엄한 벌로도 금지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정치는 풍속을 바루는 것을 앞세우거니와, 풍속이 바루어지고 나면 중등 사람 이하가 다 스스로 애써서 선한 일을 하나, 풍속이 바르지 않으면 중등 사람 이상이 다 스스로 버리고 돌보지 않아 악한 일을 하게 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서울이란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나오는 곳이므로, 사방 사람들이 모두 안에서 추향(趨向)하는 것을 보고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릇 음식·의복이 반드시 서울을 닮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루하게 여기며, 혼인(婚姻)·저택[第宅]이 반드시 서울을 닮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비하게 여기니, 이른바 성중(城中)에서 머리를 높이 트는 것을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한 자로 높인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전에 정치(政治)가 위에서 융성하고 풍속(風俗)이 아래에서 아름다왔던 까닭은 집집마다 가르쳐서 집마다 알게 한 것이 아니라, 능히 그 근본을 바루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사방은 멀기 때문에 바루는 것은 서울 뿐이고, 만민은 많기 때문에 바루는 것은 백관(百官)뿐이며, 백관은 이루 다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바루는 것은 자신뿐이니,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가 태평한 지 1백 년이므로, 인정이 오래 편안한 데 익숙하여 교만하고 사치한 버릇이 저절로 생겨 공경(公卿)·대부(大夫)의 온갖 하는 짓이 화려한 것을 다투어 숭상하고,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대저 혼인(婚姻)의 예(禮)는 만복(萬福)의 시초이니, 아들을 낳으면 장가들게 하고 딸을 낳으면 시집보내려는 부모의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가졌습니다. 지금 혼인을 의논하는 자는 사위나 며느리의 성행(性行)과 가법(家法)을 묻지 않고, 구차하게 부귀(富貴)만을 흠모하여 그 가세(家勢)가 귀(貴)를 얻을 수 있거나, 그 가재(家財)가 부(富)를 가져올 수 있다면, 혼인할 방도를 꾀하되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으려 하고, 혹시나 뒤질세라 염려합니다. 그래서 겨우 포대기를 벗어난 자식이 있으면, 사람의 부모로서의 도리를 잊고 너무 일찍이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데, 몸을 단장하는 장신구가 매우 사치하고 주어 보내는 물건이 매우 많습니다. 사라 능단(紗羅綾緞)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닌데, 이불·휘장은 반드시 이것으로 만들에 마을에서 아름다운 것을 뽐냅니다. 또 두 성(姓)이 혼인하는 날 잔치할 때에 넉넉한 것을 경쟁하느라 음식을 반드시 정(精)하게 하여 하루에 열흘 먹을 음식의 비용을 다 쓰고, 복색(服色)을 반드시 화려하게 하여 한 가지에 몇 집의 재산을 기울입니다. 사치가 절도 없이 지나침에 따라 물가가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매우 괴롭게 여기므로, 국가에서 엄하게 금하는 법을 《대전(大典)》에 갖추어 실었는데도, 심한 자는 뽐내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 함롱(函籠)을 많이 장만하여 말에 가득 실어 기일 전에 보내어서 거리낌 없이 사치를 감행(敢行)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친척이 부끄러워하고, 양가에서 서로 헐뜯음므로, 이 때문에 감히 쉽사리 시집보내거나 장가들이지 못하고, 여러 해를 보내다가 시기를 잃게 되어 마침내 생생(生生)512) 하는 도리를 방해하게 되는 일이 대개 많이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저 궁실(宮室)의 제도는 양수(陽數)가 9에서 다하므로, 천자의 집은 높이가 9척(尺)이고, 그 이하는 다 명수(命數)513) 에 따라 절도(節度)하여 2척씩 낮추는데, 이보다 지나치게 하면 군자(君子)가 외람되게 여깁니다. 지금 집을 짓는 자는 사치만을 힘쓰고 그 품등(品等)을 생각하지 않아, 들보·기둥에는 마름[藻] 모양을 새기고 두공(斗栱)에는 산(山) 모양을 새기며, 섬돌을 높인데다가 갈아서 윤을 내고 벽을 칠하고서 붉게 꾸며 궁궐과 비슷하여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데, 그 제도가 굉장하여 편전(便殿)514) 보다 더한 것이 있기도 하여 아주 차이가 없으니, 신들은 마음이 아픕니다. 그 칸수(間數)가 제도보다 넘쳐서 탄핵받아 철거한 뒤에 또 그대로 수리한 자도 있으니, 그래도 국가에서 기강(紀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조종(祖宗)께서 근검(勤儉)하게 하신 정치에 누(累)를 끼치고, 조정(朝廷)의 위아래의 분별을 어지럽히는 것이니, 사방에 보일 것이 아닙니다. 신들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심으로 ‘몸소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한가? 가르침이 지극하지 못하고 제어하는 것이 엄하지 않은가? 어찌하여 풍속을 돌이키기 어려운가?’ 하고 돌이켜 생각하여 깊이 스스로 자신을 죄책하고 다시 검소한 덕(德)을 보이소서. 한 생각이 싹트거든 반드시 삼가서 ‘이것이 검소한 것인가 사치한 것인가?’ 하고 살피어, 검소한 것이면 공경히 넓히고, 사치한 것이면 공경히 극복하소서. 마음을 바루어 서울에 보이고, 서울을 바루어 사방에 보이시며, 법을 더욱 밝혀 사치한 폐단을 엄하게 고치고, 그래도 징계되지 않은 자가 있거든 중한 법으로 처벌하여, 서울과 귀근(貴近)으로부터 시작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 풍속을 바꿀 수 있고, 순박(淳朴)한 정치를 당장에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째는 숭음(崇飮)515) 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하늘이 비로소 서직(黍稷)516) 을 내어 백성이 술을 만들게 한 까닭은 입과 배를 채워 비환(悲歡)을 술회(述懷)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하를 공양(供養)하고, 제사하여 복을 빌고, 쇠약한 자와 늙은 자를 부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주(醴酒)517) 가 맛이 좋으나, 〈제사에서 도리어〉 현주(玄酒)518) 를 숭상하는 것은 오미(五味)519) 의 근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신명(神明)을 공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군자(君子)520) 에게 술이 있으니 많고도 맛이 좋다.’ 하였으니, 이는 손님을 대접하게 위한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주례(酒醴)를 순후(淳厚)하게 하고, 황구(黃耉)521) 를 보양(報養)한다.’ 한 것은 부로(父老)를 대접하여 마시게 하는 것이고, 《예기》에 ‘읍양(揖讓)하고 올라가 〈활을 쏘고〉 내려와 마신다.’ 한 것은 활쏘기로 말미암아 마시는 것입니다. 연음(燕飮)의 예(禮)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밝히는 것이고, 향음(鄕飮)의 예는 장유(長幼)의 차서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면 군자(君子)는 마시지 않으나, 오히려 선왕(先王)의 수작(酬酌)하는 예를 절제하여 한 번 잔을 바치는 예에 손님과 주인이 백번 절하게 하여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예방하였어도 술의 말류(末流)가 재앙을 일으킨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주(紂)의 죄악을 셀 때에 주색에 빠진 것을 첫머리에 꼽았고, 풍서(酆舒)522) 의 다섯 가지 죄 가운데의 하나가 술을 즐긴 것이었으며, 백유(伯有)523) 는 술을 즐기다가 마침내 사씨(駟氏)524) 에게 쫓겼고, 진준(陳遵)525) 은 술을 즐기다가 흉노(匈奴)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진(陳)나라·수(隋)나라 이후로는 그 재앙이 더욱 참혹하여, 혹 적의 군사가 지경에 임박하여 〈자신이〉 누워 있는 상탑(床榻) 밖이 이미 자기 소유가 아닌데도 오히려 취(醉)해서 모르기도 하였으니, 이것에 의하여 술이 재앙을 빚어내는 것을 논하면, 어찌 곡식을 낭비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참으로 목숨을 잃게 하는 도끼이며, 창자를 썩히는 못된 약입니다. 위로는 나라를 망치고 아래로는 자신을 죽이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우리 나라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일도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성조(盛朝)526) 가 개국(開國)한 이래로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정교(政敎)를 닦고 밝히셨으므로 떼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영이 법전(法典)에 뚜렷하게 있고, 세종 대왕께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술의 재앙을 갖추어 서술하게 하여 중외(中外)에 경계하여 이르셨으니, 조종(祖宗)께서 술을 삼가신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때에는 보필(輔弼)하는 정승 같은 자들도 임금의 명을 받아 감히 어기지 않았을 뿐더러, 직사(職事)를 집행하는 신하들도 다 보익(輔翼)하는 공경을 다하여, 스스로 한가하고, 편안한 것도 오히려 감히 취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어찌 감히 술마시기를 좋아하였다고 하겠습니까? 근래에는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인심이 해이해지고 안일에 젖어 주색에 빠지는 것을 일삼습니다. 저 종실(宗室)의 집과 협기(俠氣)를 부리는 무리가 술에 취하여 실컷 즐기며 절도 없이 놀아서 청명(淸明)한 정치에 누를 끼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공경(公卿)·백집사(百執事)는 다 관직이 있으므로, 각각 그 직임에 이바지해야 할 터인데도, 그 직임을 버려두고 날마다 떼를 지어 마시는 것을 일삼으며, 남보다 나으려고 힘쓰느라 그 비용을 헤아리지 않고 술은 반드시 상등 술이라야 하고, 과일은 반드시 진기(珍奇)한 것이라야 하며, 음식은 반드시 가짓수가 많아야 하고, 그릇은 반드시 중국 것이라야 하며, 또 행과(行果)라 하여 온갖 맛있는 것을 많이 벌여 놓아 한 자리에 드는 비용이 걸핏하면 만전(萬錢)이나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이 또한 비루하게 여기므로, 가난한 자가 발돋음하여 남의 나쁜 버릇을 본떠 음식을 사치하게 하려면 모자라는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구하여 구차하게 얻으려는 욕심이 생기므로, 몹시 탐내어 부끄러움이 없다는 이름이 따르게 되니, 이 무슨 폐풍(弊風)이 온통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대저 예의는 음식에서 비롯하므로, 성인(聖人)이 그 큰 욕심에 따라 이에 대하여 절문(節文)527) 하였는데, 당상(堂上)에 정례(正例)로 놓일 음식 그릇이 천자(天子)는 26개, 제공(諸公)은 16개, 제후(諸侯)는 12개, 상대부(上大夫)는 8개, 하대부(下大夫)는 6개입니다. 많고 적은 수가 각각 그 지위(地位)에 맞고 본래 제도가 있으니, 재산을 믿고 함부로 분수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받들므로 수륙(水陸)의 맛있는 물건을 다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나, 천자의 음식에도 일정한 수가 있는 까닭은 참으로 천지의 생물에는 한정된 수량이 있으므로, 취(取)하는 데에 도리가 있고 쓰는 데에 절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땅이 메말라서 한 번 흉년이 들면 온 백성이 굶주림에 울부짖는데,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이것을 살피지 않습니다. 무릇 연음(宴飮)할 만한 일은 억지로 이름 붙여 한 번 제배(除拜)가 있으면 이름하여 치하(致賀)라 하고, 조금만 왕래가 있으면 이름하여 영전(迎錢)이라 하며, 누구는 선생이므로 가서 뵈는 예(禮)를 하느니, 누구는 신진(新進)이므로 신참을 면하는 예를 하느니 합니다. 이 때문에 떼를 지어 마시는 풍습이 자라나고, 밤새도록 마시는 일이 일어나며, 그 밖에 권세 있는 사람을 맞아 와서 사사로이 서로 연락(宴樂)하여 뒷날 서로 후원(後援)하는 여지를 만드는 것 등은 이루 들어 말할 수 없거니와, 심하면 주육(酒肉)을 장만하지 못하여 벼슬살이를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또 여염의 미천한 백성이 한 번 취한 끝에 문득 혐극(嫌隙)을 일으키면 물불도 가리지 않고 칼날도 밟을 수 있으니, 옥송(獄訟)의 번거로운 것이 참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고, 찬선(饌膳)을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하시며, 술을 금 하는 영(令)이 바야흐로 엄할지라도 아래에서 주색에 빠져 있는 자가 있는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장엄하고 조심스럽게 임하시고, 법사(法司)에서 곁따라서 규핵(糾劾)하여도 폐단이 이러한데, 더구나 도성(都城) 밖의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떠하겠습니까? 감사(監司)는 한 도(道) 맡고, 변장(邊將)은 한 진(鎭)을 맡으며, 수령(守令)·만호(萬戶)는 각각 한 고을이나 한 영(營)을 맡아서 분담하여 외적(外敵)을 막으므로, 직임이 중대하고 직무가 번극(煩劇)한데,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먼저 주색(酒色)으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힘써 흠뻑 취하고, 날로 심하여져서 제가 맡은 일을 멀리 버려두니, 그 마시기를 즐기는 폐해가 서울보다 더욱 심합니다. 지금의 시기를 잃고 바로잡지 않으면, 아마도 서진(西晉)의 풍속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니, 말이 여기에 이르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신 등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는 일을 몸소 행하여 이끄시고, 세종께서 술을 경계하신 분부를 다시 밝히시되, 그래도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제서 유위(制書有違)528) 로 논죄(論罪)하여 이 폐단을 엄하게 금하소서. 그렇게 하면, 재물이 낭비되지 않아서 수재(水災)·한재(旱災)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기미(幾微)를 삼가는 일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음양(陰陽)의 운행과 천지(天地)의 조화와 물리(物理)·인사(人事)의 시종(始終)이 다 희미하고 미세한 것에서 시작하여 막을 수 없는 것에 이른다 합니다. 대저 물이 작을 때에는 한줌의 흙으로 막을 수 있으나 성(盛)하여지면 목석(木石)을 떠내려 보내고 구릉(丘陵)을 가라앉히며, 불이 작을 때에는 한줌의 물로 끌 수 있으나 성하여지면 도읍(都邑)을 태우고 산림(山林)을 태우므로, 작을 때에 다스리면 힘을 적게 들여도 공효(功效)가 많고, 성할 때에 다스리면 힘을 많이 들여도 공효가 적습니다. 옛임금은 싹트기 전에 우환(憂患)을 사라지게 하고, 나타나기 전에 재화(災禍)를 그치게 하였으니, 그 염려가 매우 깊고 원대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성지(聖智)를 타고나시고 날로 학문을 성취하시어 덕(德)을 닦되 작은 행실을 삼가고 잘 다스리기를 꾀하되 미연(未然)에 방지하시며, 모든 일에 있어서 지금은 마땅한데 뒤에 해롭거나 자신에게는 편한데 백성에게 해로운지를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려서 설시(設施)하시니, 어찌 한 가지 호령이나 한 가지 정사(政事)라도 함부로 발하고 잘못 행하여 후회(後悔)가 있게 하시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요즈음 보건대, 황가(皇家)에서 한씨(韓氏) 때문에 한 나라를 한 집안처럼 대우하여, 아뢰는 것은 곧 허락하고 내리는 물건이 번번이 많으니,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히 요구하는 물건이 해마다 더하여 가서 끝이 없는데, 우리 나라는 좁아서 땅에서 나는 것에 한정이 있고 황가(皇家)에서 요구하는 것은 한이 없으므로, 요구가 많을수록 재물이 모자라고 청구가 번거로울수록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바로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되니, 어찌 매우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예전에는 천자(天子)가 사사로이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고,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금(金)을 요구하고 차(車)를 요구하는 사신이 열국(列國)에 나갔는데, 공자(孔子)가 이 일을 ‘요구하였다는 것은 천왕(天王)529) 의 실도(失道)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지금 황제가 진기한 완물(玩物)을 외국에 요구하되, 부인(婦人)·환시(宦寺)에게만 의논하여 외조(外朝)530) 에서 알지 못하게 하니, 그 밖의 일은 알 만합니다. 대저 제후(諸侯)는 천자에 대하여는 신하의 도리가 있고, 아들의 도리가 있는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그 효도를 다할 따름이고, 신하는 임금에 대하여 그 충성(忠誠)을 다할 따름입니다. 충신은 의(義)를 따르되, 임금의 그른 것을 따라서 다만 그 승낙을 순(順)하게 하려고 하지 않으며, 효자는 선(善)을 따르되 아버지의 그른 것을 따라서 다만 그 몸만을 봉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감히 얻기 어려운 재물과 이어가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구차하게 그 군부(君父)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충효(忠孝)의 이름을 매우 이지러지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이미 그런 줄 알고도 스스로 마지못하여 요구하는 대로 다 따르고 청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시는 까닭은, 어찌 군부가 요구하는 것은 신자(臣子)가 공상(供上)해야 하는 것이므로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서야 말지언정 감히 스스로 거절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를 아시는 것이겠으나, 신들이 생각하건대, 지금의 형세로는 옳지 않은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저 희완(戲玩)하는 물건과 조루(雕鏤)531) 하는 일은 재물의 힘만을 소비할 뿐이고, 쓰임에 이익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황제의 명을 거듭 어기시고는, 궐문(闕門) 안에 재료와 공장이를 모아 공사(工師)532) 를 시켜 맡게 하고 중사(中使)533) 를 시켜 감독하게 하되 패를 나누어 일을 독촉하고 그 능부(能否)를 견주어 상주고 벌주니, 온갖 공장이가 일제히 나아가 많은 일을 한꺼번에 일으키어 두드리고 불리고 갈고 줄로 쓰는 소리가 궁궐을 진동하며, 만들어낸 기구의 조수(鳥獸)·초목(草木)·인물(人物)의 형상이 모두 같지 않은데도 다 매우 정교(精巧)하니, 천자에게 바치면 어찌 눈을 기쁘게 하고 마음을 유쾌하게 하지 않겠으며, 어찌 우리 나라가 기예(技藝)에 공교(工巧)하고 일을 수행하는 데에 민첩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올해의 요구를 보면 지난해보다 훨씬 많으니, 그 장래의 폐단은 탕장(帑藏)534) 을 다하고 우리 백성의 힘을 다하더라도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며, 고려 말기의 일을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세종(世宗)조(祖)에 있어서 금은(金銀)은 본국(本國)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면제하여 주기를 두세 번 아뢰어서야 허가받아 이제껏 그 은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호(玩好)하는 물건을 별례(別例)로 바치되 금은을 많이 써서 새기고 장식하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드디어 점점 많아지게 되면 감당하지 못할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종(祖宗)께서 청하여 면제받은 뜻에는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첫째입니다.

평안도는 나라의 문호(門戶)가 되어 사신이 왕래하고 오랑캐가 엿보므로,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실어나르고 호송(護送)하는 노고와 강 연변(沿邊)에서 방어하는 노고가 다른 도에 견줄 것이 아닌데, 우리 전하께서 이 도의 폐해를 익히 아시어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백성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시는 것은 참으로 무엇이든지 다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별례로 바치는 물건이 상례(常例)로 바치는 수보다 훨씬 많아서, 크면 화폐(貨幣), 작으면 복완(服玩)으로부터 음식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백성을 징발하여 나르는 것이 해마다 수백 바리를 밑돌지 않는데다가, 중국 사신이 오지 않는 해가 없으므로, 영송(迎送)에 지공(支供)하는 비용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전에 무사할 때에는 해마다 바치는 공물(貢物)에 상수(常數)가 있고, 중국 사신이 자주 오지 않았어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으므로, 백성이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고, 관가에서 스스로 대어가지 못하여 공사(公私)가 다 곤궁(困窮)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살아갈 수 없는 백성을 몰아서 배수(倍數)의 물건을 나르게 하고, 대어갈 수 없는 관가에 맡겨서 무궁한 비용을 지응(支應)하게 하면, 관가와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일찍이 도모하지 않고, 재물의 힘이 다하여 열 집에서 아홉 집이 빈 뒤에야 전하(殿下)께서 서쪽을 돌아보고 탄식하신다면,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전하를 위하여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지세(地勢)에 의거하여 요해(要害)를 설치하는 것은 왕공(王公)이 나라를 지키는 도리이니, 의주(義州)에 성을 쌓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겠으나, 어려운 때에 과도한 일을 일으키는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것이므로, 본래 풍년이 드는 것을 보고 농사의 틈을 살펴서 부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백성의 곤고(困苦)가 저러하고 기근(饑饉)이 이러하니, 어찌 차마 생업(生業)을 잃은 백성을 모아서 때에 맞지 않는 일을 일으키겠습니까? 전하께서 중국의 탕참(湯站)에 진(鎭)을 설치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정동(鄭同)이 돌아가기 전에 돌을 줍고 기계를 설치하여 먼저 성을 쌓을 형세를 보이려 하시니, 국가의 계책에 있어서는 마땅합니다. 그러나 근일 총병관(摠兵官) 한빈(韓斌)정동을 호송하느라 부하 1천여 인을 거느리고 파사보(婆娑堡)까지 다녀갔는데, 그 보(堡)와 우리 땅은 겨우 강 하나로 막혀 있으므로, 성을 쌓는 일이 있고 없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것이 분명하며, 정동이 데려가는 두목(頭目)도 중국 사람인데, 어떻게 그 이목(耳目)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의주(義州)의 성밖은 거의 다 백성의 전지(田地)이므로 곡식이 들을 덮었으니, 돌을 모으느라 굴리고 끄는 동안에 손상(損傷)되는 것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농사를 방해하고 듣기에 놀라와서 계책에 이익이 없으니,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둘째입니다.

작명(爵名)은 임금이 세상을 격려하고 둔(鈍)한 것을 연마하기 위한 기구이니, 혁혁(赫赫)한 공로나 드러난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명기(名器)535) 를 아껴 한 자급(資級)일지라도 가볍게 사람에게 주신 적이 없는데, 이제 정동 등의 한없는 청에 못이겨 그 족친 가운데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여 반 줄의 글도 모르는 자에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높은 자급을 주어, 백도(白徒)536) 로서 3, 4품의 벼슬에까지 초수(超授)된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식한 무리가 다투어 본떠서 족친이 아니라도 말을 통역하거나 영접하고 지응(支應)한 것을 인연삼아서 청탁하여 반드시 제뜻을 수행하려 하는데, 지난해에도 이렇게 하고 올해도 이렇게 하면, 한없는 욕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정동의 무리가 말만 하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자제(子弟)를 대간(臺諫)·육조(六曹)의 직임으로 주의(注擬)할 것을 〈청한다면〉 전하께서 결코 들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들어주면 나라의 일이 그르게 될 것이고 들어주지 않으면 그 노여움을 더할 것인데, 전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 세종조(世宗朝)에 환관(宦官) 윤봉(尹鳳)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와서 제 조카 윤길생(尹吉生)에게 사옹원 별좌(司饔院別坐)를 제수(除授)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께서 쉽사리 허락하려 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에게 널리 물은 뒤에야 허락하셨는데, 지금은 정동의 조카 정효공(鄭孝恭)에 대하여 그 요청이 있기전에 전하께서 먼저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허락하셨습니다. 별좌(別坐)는 작은 벼슬인데도 세종께서 아끼셨거니와, 당상관은 높은 벼슬이므로 그가 청하더라도 거절하여 매우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이셔야 옳은데, 전하께서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세째입니다.

천자는 천하의 부(富)를 누리므로, 앞에 벌여 놓는 팔진(八珍)537) 은 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도 넉넉히 포주(庖廚)를 충족하고 부고(府庫)를 급족(給足)하게 할 수 있을 터인데도, 반드시 지존(至尊)의 위엄을 굽혀서 자질구레한 물건을 우리 나라에 요구하니,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한씨(韓氏)를 중히 여기는 까닭으로 곡진하게 사은(私恩)을 보여 특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뜻은 처음부터 우리를 침요(侵擾)하거나 곤고(困苦)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한씨를 위하는 것이 또한 우리 나라의 영화가 되리하고 생각하여, 병폐가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전하께서 우리 나라는 치우치고 비루하여 산물(産物)이 없다는 것과 일로(一路)에서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실어나르는 폐단을 공손하게 적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중국 조정에 아뢴다면, 한씨도 뉘우쳐서 조용히 황제에게 말할 것이며, 중국 조정에서도 어찌 능히 용린(龍鱗)538) 을 거스르면서 그 이해(利害)를 아뢰어 바로잡을 강직한 신하가 없겠습니까? 안에서 한씨가 청하고 밖에서 조정의 신하들이 간(諫)한다면, 황제의 마음을 돌려 병폐(病弊)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 연유를 갖추어 아뢰려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셨으니, 성산(聖算)539) 이 지극하셨는데, 의논하는 자가 ‘천자가 사사로이 요구하는 것을 조정에 드러내면 이것은 임금의 잘못을 나타내는 것이며, 뒷날의 걱정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므로 전하께서 뭇신하의 의논에 몰려 그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아서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몹시 한탄스럽습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네째입니다.

정동(鄭同)은 본래 한낱 버릇없고 간사하여 무상(無狀)한 소인(小人)인데, 천자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게 되어 모든 총애(寵愛)를 살 수 있는 방법을 다하고, 한씨를 인연하여 자못 친행(親幸)을 받았습니다. 먼저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이 가져간 작은 물건을 핍박하여 사사로이 바치도록 하여 황제의 마음을 시험하고, 따라서 토산물(土産物)을 두루 세면서 어느 물건은 입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어느 물건은 눈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어느 물건은 몸에 편리하다고 말하여 황제의 뜻을 맞추어, 의복·음식·그릇·완호(玩好) 따위의 물건을 칙명(勅命)을 내려 요구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덕(德)을 손상한 것이 심합니다. 정동이 왕년(往年)에 스스로 본국에 와서 모든 요구하는 물건을 반드시 황제의 뜻에 맞는 것으로 하여 토산물(土産物)을 모아 가지고 돌아가서 구궁(九宮)에 과시(誇示)하여 제 말을 실증하였습니다. 이제 또 와서 요구하는 물건이 전일보다 훨씬 많은데, 천자가 참으로 요구하였다면, 요구하는 칙서(勅書)를 어찌 전에만 내리고 뒤에는 아끼겠습니까? 정동이 한 말은 확인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죄다 믿고서 삼가 봉행하겠습니까? 정동이 처음에는 한씨의 말이하고 하면서 전하께 아뢰기를, ‘북경에 갈 때마다 족친을 사신으로 충차(充差)하여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갑자기 고쳐서 말하기를, ‘이것은 한씨의 말이 아니라 황제의 분부입니다.’ 하였으니, 그 말을 뒤집었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또 요구하는 물건이 과연 황제의 명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신이 한씨의 족친이 아닌들 무슨 안될 것이 있기에 반드시 그렇게 하려 하겠습니까? 그 뜻은 한씨를 미끼로 삼아서 사사로이 바치는 물건을 낚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씨의 족친을 아직 사신으로 충차하지 말게 하고, 황제의 명이 어떠한지를 기다려 보면, 정동의 말의 진위(眞僞)는 주문(奏聞)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동은 본래 우리 나라의 비천한 자인데, 전하께서 우대(優待)하는 까닭은 정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조정을 공경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동도 사람이므로 전하께 한결같이 공경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은 뜻을 보여야 옳을 터인데, 유념하지 않고서 조금만 마음에 유쾌하면 기뻐서 날뛰며 망령된 말이 샘솟듯 하고, 조금만 마음에 유쾌하지 않으면 감히 공손하지 않은 말을 하였습니다. 또 청연(請宴)하던 날에 어선(御扇)을 몰래 훔쳐서 전하를 깔보았으니, 신들은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다섯째입니다.

예전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협곡(峽谷)에서 제후(諸侯)와 모였을 때 공자(孔子)가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였는데, 제(齊)나라의 배우(俳優)·주유(侏儒)540) 가 앞에 나아가 희롱하는 것을 보고 베어 죽이게 하였습니다. 대저 갈고리를 삼키고 불을 토하며 익살부리고 희롱하는 것은 다 눈을 속이고 협잡하는 요술이므로, 쫓아서 멀리해야만 할 것인데, 전하께서 번번이 청연(請宴)하던 날에 정동의 두목(頭目)이 앞에서 잡희를 벌이도록 허가하고, 혹 그 요술을 다시 부려 보게 하시며 즐겁게 구경하는 빛을 짐짓 보이고 상으로 베[布]를 넉넉히 주십니다. 그래서 그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고 상이 후한 것을 이롭게 여기니, 기희(技戲)가 날마다 늘어가고 상도 많아집니다. 저들이 어찌 전하께서 실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나 억지로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임을 알겠습니까? 장차 그 요술을 자랑하고 그 얻은 것을 뽐내어 중국에 가서 말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뒷날 환시(宦寺)가 와서 무엇을 꺼려서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지금보다 심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禮義)가 있는 것으로 중국에 알려졌는데, 중국의 유식(有識)한 선비가 이런 일을 들으면 반드시 ‘조선에서 중관(中官)을 이렇게 대우하고, 환술(幻術)541) 을 이렇게 좋아한다.’ 할 것이니, 어찌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옳지 않은 까닭의 여섯째입니다.

신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지나간 잘못은 뒤미칠 수 없으니, 앞으로 올 책망을 다시 생각하여 물이 졸졸 흐를 때에 멈추고, 불이 솔솔 탈 때에 꺼서 후회를 끼치는 일이 없으면 다행하겠습니다. 신들이 또 보건대, 근년(近年)에 중국 조정에서 사신이 오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조관(朝官)은 절의(節義)와 염치(廉恥)로 스스로 경계하나, 환관(宦官)은 거의 다 이처럼 탐욕합니다. 우리 나라의 환관은 권세를 잡지 못하므로, 그 형세가 성한 것이 중국에 견줄 것은 아니나, 사방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면 정동과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무니, 이것도 전하께서 아셔야 할 일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하늘에 응답하는 것은 실질(實質)로 하고 겉치례로 하지 않으며, 백성을 감동시키는 것은 행동으로 하고 말로 하지 않는다 합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천재(天災)를 사라지게 하시려면 겉치례를 버리고 실질을 도탑게 하며, 재능(才能)을 헤아리고 공상(功狀)을 살펴서 어진 사람에게 맡기는 실질이 있게 하시고, 덕이 있는 사람을 상주고 죄가 있는 사람을 죄주어 권장(勸奬)하고 징계(懲戒)하는 실질이 있게 하시어, 기강(紀綱)을 가다듬고 떨쳐서 이미 이루어진 풍습을 고치시고, 길게 생각하고 멀리 꾀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우환(憂患)을 없애소서. 그렇게 하면 성교(聖敎)542) 에 이른바 풍우(風雨)가 시기에 맞아서 화곡(禾穀)이 잘되며, 재앙을 바꾸어 상서가 되게 하고 화(禍)를 돌려서 복(福)이 되게 하는 일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하께서 규벽(圭璧)543) 을 다하여 신기(神祇)를 제사하고 덕음(德音)을 내려 민폐를 물으시더라도, 겉치례가 될 뿐이고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보이도록 명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홍응(洪應)·노사신(盧思愼)이 의논하기를,

"홍문관(弘文館)의 소(疏) 안에 말한 용인(用人)·형상(刑賞)과 풍속을 바루고 사치를 없애는 일은 지금 성상께서 강구(講究)하셔야 할 일이니, 다시 더 유의(留意)하소서. 정동(鄭同)의 일로 말하면 다 성지(聖旨)를 빙자(憑藉)하였으므로 그만둘 수 없는 형세이나, 관직을 청하는 것은 조금 억제(抑制)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3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식생활-주류(酒類)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외교-명(明) / 주생활-가옥(家屋) / 윤리-강상(綱常)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광업-광산(鑛山)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註 497]
    조두(俎豆) : 제기(祭器).
  • [註 498]
    준뢰(尊罍) : 주기(酒器).
  • [註 499]
    동량(棟梁) : 마룻대와 들보.
  • [註 500]
    최각(榱桷) : 서까래.
  • [註 501]
    측석(側席) : 어진 이를 존대하기 위하여 상석(上席)을 비워 놓고 옆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함.
  • [註 502]
    고요(皐陶) : 순(舜)임금 때의 신하로, 옥관(獄官)의 장(長)을 지냈음.
  • [註 503]
    좌계(左契) : 둘로 나눈 부신(符信) 가운데 왼쪽이 것. 하나를 자기 손에 두어 좌계로 하고, 다른 것을 상대방에게 주어 우계(右契)로 함.
  • [註 504]
    주당(奏當) : 죄인에게 적용한 법 조문을 아룀.
  • [註 505]
    실입(失入) : 죄인을 판결할 때에 법 조문보다 지나치게 무겁게 벌을 잘못 과하는 것을 말함.
  • [註 506]
    실출(失出) : 죄는 무거우나 벌은 가벼운 것을 말함.
  • [註 507]
    평번(平反) : 재심하여 죄를 가볍게 함.
  • [註 508]
    불경(不經) : 상법(常法)을 시행하지 않음.
  • [註 509]
    호종(怙終) : 믿는 것이 있어 재범함.
  • [註 510]
    순자(醇疵) : 독실함과 부실함.
  • [註 511]
    사검(奢儉) : 사치함과 검소함.
  • [註 512]
    생생(生生) : 만물이 끊임없이 생기는 모양.
  • [註 513]
    명수(命數) : 관등(官等).
  • [註 514]
    편전(便殿) : 임금이 상시 거처하는 곳.
  • [註 515]
    숭음(崇飮) : 술마시는 것을 좋아함.
  • [註 516]
    서직(黍稷) : 차기장과 메기장.
  • [註 517]
    예주(醴酒) : 단 술.
  • [註 518]
    현주(玄酒) : 물의 별칭.
  • [註 519]
    오미(五味) : 짠맛·쓴맛·신맛·매운맛·단맛.
  • [註 520]
    군자(君子) : 주인을 지칭함.
  • [註 521]
    황구(黃耉) : 노인.
  • [註 522]
    풍서(酆舒) :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국(潞國)의 정승.
  • [註 523]
    백유(伯有) : 춘추 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
  • [註 524]
    사씨(駟氏) : 사대(駟帶).
  • [註 525]
    진준(陳遵) : 한(漢)나라 애제(哀帝) 때 사람.
  • [註 526]
    성조(盛朝) : 조선을 가리킴.
  • [註 527]
    절문(節文) : 적절하게 마름질하여 꾸밈.
  • [註 528]
    제서 유위(制書有違) : 임금의 교지(敎旨)와 세자의 영지(令旨)를 위반하는 자를 다스리는 율. 《대명률(大明律)》 이율(吏律) 제서 유위조에, "무릇 제서(制書)를 받들어 시행하는 데 위반하는 자는 장(杖) 1백 대에 처하고, 황태자의 영지를 어기는 자도 죄가 같다." 하였음.
  • [註 529]
    천왕(天王) : 주(周)나라의 천자를 가리킴.
  • [註 530]
    외조(外朝) : 바깥 조정(朝廷).
  • [註 531]
    조루(雕鏤) : 조각하고 보석을 박아서 장식함.
  • [註 532]
    공사(工師) : 공장이를 맡는 벼슬.
  • [註 533]
    중사(中使) : 내시(內侍).
  • [註 534]
    탕장(帑藏) : 내탕고(內帑庫)에 보관된 재물.
  • [註 535]
    명기(名器) : 관작(官爵).
  • [註 536]
    백도(白徒) :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
  • [註 537]
    팔진(八珍) : 여덟 가지 진미(珍味).
  • [註 538]
    용린(龍鱗) : 황제를 지칭함.
  • [註 539]
    성산(聖算) : 임금이 계책.
  • [註 540]
    주유(侏儒) : 재주 부리는 난장이.
  • [註 541]
    환술(幻術) : 요술.
  • [註 542]
    성교(聖敎) : 임금의 분부.
  • [註 543]
    규벽(圭璧) : 옛날 제후(諸侯)가 천자를 알현할 때에 갖는 옥. 제사지낼 때도 썼음.

○甲子/弘文館副提學李孟賢等上疏曰:

臣等伏覩殿下, 以自春徂夏, 亢陽不雨, 五月癸巳大雨雹, 避殿省膳, 深自刻責, 敷求讜言, 欲聞致災之由。 又於本月辛酉夜, 下手敎于議政府曰: "咎實在予, 萬姓奚辜? 卿等各警乃心, 以答天譴。" 是則殿下承祖宗大業, 畏天勤民, 日昃不倦, 達朝不寐, 此群臣同寅協恭之日, 孰不披忠瀝懇, 上達天聽? 臣等聞災沴之應, 由陰陽之不和, 陰陽不和, 由君臣上下之闕失。 自昔明王, 或遇災變, 必省躬之過, 思政之闕, 求所以當天心致和氣, 故能消弭變異, 長保隆平, 殿下雖有引咎之敎, 而或未有應天之實。 臣等忝侍經幄, 心之所懷, 不敢自隱。 謹條陳列于左, 伏惟財幸。 一曰, 審用人。 臣等竊謂 ‘莫難於知人, 尤莫難於用人。’ 夫以一人, 臨于百官之上, 邪正、賢愚, 雜然於前, 才智有長短, 譬猶俎豆、尊罍之爲器, 棟樑(攘)〔榱〕 桷之爲材, 方圓大小, 皆有所施, 而用之之道, 當各適材與器而已。 恭惟我殿下, 孜孜爲治, 側席求賢, 登崇俊良, 布列庶位, 得人之美, 於斯爲盛, 然所以擇之之道, 用之之方, 容或有一二可言者。 臣等歷觀人材之處於世也, 抱經術者, 或乏於吏; 能善射御者, 或昧於治體; 敏於辯給者, 未必有實踐之行; 富於詞藻者, 未必盡經世之材; 才智通敏者, 可以辦事務, 而不可與成大化; 便健趣走者, 可以給使令, 而不可以屬大事。 閥閱子弟, 未必皆賢, 而例躡其高位; 草茅賤士, 未必不肖, 而多屈於下僚; 將帥爲國藩垣, 而狃於尋常, 訓鍊不精; 守令作民父母, 而急於科斂, 撫字乖方; 銓衡之選, 非不重也, 而徒用例薄。 賢愚未免於同滯, 薦擧之法, 非不嚴也, 而徒徇私欲, 取舍每憂於倒置, 此不可不深思, 而熟慮之也。 臣等願殿下, 其難其愼, 明察而審擇之, 度材而授, 量力而任, 責其所長, 舍其所短。 使有勇略者, 治軍旅; 有藻鑑者, 掌銓選; 寬仁慈愛者, 任牧養之責; 剛方正直者, 持風憲之職, 而申明薦擧之法, 益嚴謬擧之律, 使所所薦無非賢能, 而所用各適其才。 則殿下可以垂拱無爲, 而天地之和, 不足致, 旱乾之災, 不足弭矣。 二曰, 愼刑賞。 臣等竊謂 ‘人主所以鼓動天下, 制馭臣民之柄, 莫大於刑賞。’ 蓋賞不失有功, 則勞臣勸; 刑不失有罪, 則姦人懼。 二者或失, 國家之綱紀必墜, 可不懼歟? 昔大之命皋陶也曰: "欽哉欽哉, 惟刑之恤哉。" 韓昭侯藏敝袴曰: "明主愛一嚬一笑。 吾必有待有功者, 而與之。" 其帝王所以謹愼刑賞之意, 蓋可想已。 臣等竊思之, 刑賞之用, 如春生秋殺, 一出於公, 使幸而得之, 幸而免之, 則是猶寒暑相違, 而望歲功之可成也。 今者命一官擧一事也, 先設賞以責成效, 是以利誘之也。 臣等以爲, 張官置吏, 量才授任, 所以共天祿、治天職也。 苟能治其事, 而稱其職, 則褒賞之典, 在所當擧, 若上之人, 餌其賞以誘其下; 下之人, 利其賞以邀其功, 積錙銖之勞, 而一一取賞, 如持左契, 交手相付, 則將恐褒賞之典, 非徒不能勸善, 適以開利欲之門耳, 豈古者天命有德之意歟? 且云: "一刑不當, 三年大旱。" 大抵官吏惻怛敬畏者少, 愚昧殘酷者多, 當折獄之時, 以愛惡, 而論囚, 以疑似, 而議獄, 聽斷十事, 差失者五六, 奏當之成, 雖皋陶聽之, 莫能理雪矣。 其間死生、得失, 傷人之情者, 寧不召災沴之應耶? 殿下於刑獄一事, 哀矜惻怛, 好生之德, 洽于民心。 不幸有匹夫、匹婦陷于罪辜, 爲吏者雖或知情在可矜, 必欲致法, 如其不服, 榜掠隨之, 無所不至者, 非利人之死傷也。 蓋由失入之罪少, 而失出之罪多也。 且法者, 天下之法, 非一人之所得私也。 故殿下於凡人有罪, 不自斷之, 必付有司, 是將欲辨其輕重, 而協于中也。 有司無所平反, 一依傳旨, 訊鞫奏當, 則非殿下欽恤好生之意。 而殿下, 亦或以有司之當爲輕, 而更重之, 是法可以輕重, 而非與衆共之之意也, 亦非古者寧失不經之意也。 臣等願殿下, 更愼刑賞, 示信四方, 情非故終, 罪疑惟輕; 功無顯效, 賞不妄加, 刑不使貴近而免, 賞不使僥倖而得, 可賞則賞之, 可刑則刑之, 無所僭濫, 而有以勸懲。 則足以安人心, 養廉恥、召和平矣。 三曰, 正風俗。 臣等竊聞, 善覘人之國者, 不視其勢之盛衰, 而視其風俗, 不察其政之醇疵, 而察其奢儉。 蓋風化已失, 而流俗已成, 則重賞不能勸也, 嚴刑不能禁也。 故帝王之治, 必先正風俗, 風俗旣正, 中人以下, 皆自免而爲善; 風俗不正, 中人以上, 皆自棄而爲惡; 可不愼歟? 夫京師者, 禮樂文物之所自出, 四方之人, 環視內向, 而以爲標準。 凡飮食、衣服, 必擬京師, 不爾則以爲鄙焉; 婚姻、第宅, 必擬京師, 不爾則以爲野焉, 所謂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者此也。 古之治隆於上, 俗美於下者, 非家喩而戶曉, 能正其本而已。 以四方爲遠, 故所正者惟京師, 以萬民爲衆, 故所正者惟百官, 以百官爲不可勝治, 故所正者惟其身, 所謂治天下有本, 身之謂也。 我國家昇平百年, 人情習於久安, 驕侈不期而至, 公卿大夫凡百所爲, 競尙華靡, 以不若人爲恥。 夫婚姻之禮, 萬福之始也, 男子生而願爲之有室, 女子生而願爲之有家, 父母之心, 人皆有焉。

今之議婚姻者, 無問壻與婦之性行家法, 而苟慕富貴, 其勢可以取貴, 其財可以致富, 則圖所以婚姻者, 將不遺餘力, 惟恐或後。 有子僅免襁褓, 未知爲人父母之道, 而嫁娶太早, 粧具甚侈, 贈遺甚厚。 紗羅綾段, 非吾土所産, 而衾裯帳幔, 非此莫可, 誇美於閭里, 爭優於二姓, 合巹之日, 宴會之時, 膳品必精, 一日而兼十日之食; 服色必華, 一物而傾數家之産。 奢泰無度, 因而物價翔貴, 細民甚苦, 國家嚴加糾禁, 備載《大典》, 而甚者嫌其不能誇示, 多備函籠, 盛粧鞍馬, 而先期以送, 敢行奢侈, 無所畏憚。 不如是, 親戚羞之, 兩家相詬, 是故不敢容易嫁娶, 而經營有年, 以致失時, 竟妨生生之道者, 蓋多有之, 非細故也。 夫宮室之制, 陽數窮於九, 故天子之堂九尺, 自是以下, 皆以命數爲節, 而降殺以兩, 過是, 則君子以爲濫焉。 今之起第舍者, 惟務奢侈, 不計其品, 樑柱則雕之以藻, 斗(拱)〔栱〕 則刻之以山, 階峻而加以磨礱, 壁圬而飾以丹堊, 僭擬宮闕, 不以爲怪, 而其制度宏壯, 則過於便殿者, 容或有之, 至爲無等, 臣等痛心。 其間閣過制, 被劾撤去之後, 從而葺之者, 亦有之, 猶爲國家有綱紀耶? 累祖宗勤儉之治, 紊朝廷上下之分, 非所以示四方也。 臣等願殿下, 誠反而思之, 其躬行之未得耶, 抑敎之未至, 而制之不嚴耶, 何風俗之難回也, 深自罪己, 更示儉德。 一念之萌, 必謹而察之, 此爲儉耶爲奢耶, 儉也則敬以廣之, 奢也則敬而克之。 正心以示京師, 正京師以示四方, 申明令甲, 痛革侈靡之弊, 猶有不懲者, 重置於法, 自京師貴近始, 則此風可變, 而淳朴之治, 可立而待也。

四曰, 戒崇飮。’ 臣等竊謂, 天之始生黍稷, 俾民爲酒者, 非爲充口腹, 暢敍悲歡也, 所以頤養天下, 享祀祈福, 扶衰養老者也。 《記》曰: "醴酒之美, 玄酒之尙, 貴五味之本," 所以養神明也。 《詩》云: "君子有酒, 多且旨。" 所以燕賓客也。 其曰: "酒醴維醹, 以祈黃耉。" 者, 燕父老而飮也, 其曰: "揖讓而升, 下而飮。" 者, 因射而飮也。 燕飮之禮, 明君臣之義也; 鄕飮之禮, 明長幼之序也。 非此族也, 君子不飮, 然猶先王節之以酬酢之禮, 一獻之禮, 賓主百拜, 使之終日飮酒, 而不得醉焉, 以此坊之, 酒之流生禍久矣。 武王之惡, 以沈湎爲首, 酆舒五罪, 其一嗜飮, 伯有酣飮, 而終奔於駟氏, 陳遵嗜酒, 而遇害於凶奴以下, 其禍尤慘, 或敵兵臨境, 臥榻之外, 已非己有, 而猶醉不知。 以此而論酒之釀禍, 豈特糜穀而已? 實喪性之斧斤, 腐腸之狂藥。 上焉亡國, 下焉殺身, 瀆亂綱常, 毁敗風俗者, 不可殫錄, 吾東方三國之事, 亦可鑑已。 盛朝開國以來, 列聖相承, 修明政敎, 群飮之禁, 著在令甲, 世宗大王, 命儒臣備述酒禍, 戒諭中外, 祖宗所以謹毖于酒者至矣。 時則有如輔相, 不惟稟上之命, 而不敢違也, 治事之臣, 亦皆盡輔翼之敬, 而雖自暇自逸, 且猶不敢, 矧曰其敢崇飮乎? 近來時平日久, 人心解弛, 狃於逸豫, 惟沈湎是務。 彼宗室之家, 任俠之徒, 酣飮般樂, 游蕩無度, 以累淸明之治, 固非美也, 而公卿、百執事, 則皆有官守, 各供其職可也, 荒廢厥職, 日以群飮爲事, 務勝於人, 不計其費, 酒必醇酎, 果必珍異, 膳羞必多品, 器皿必漢物, 又稱行果, 錯陳百味, 一席之費, 動至萬錢。 不如是, 人亦鄙之, 貧者企而效尤, 欲侈其羞, 則不能無不足。 於是乎妄求苟得之欲生焉, 窮貪無恥之名隨之, 是何弊風, 一至於此? 夫禮義始於飮食, 聖人因其大欲, 而寓之以節文, 堂上正羞之豆, 天子則二十有六焉, 諸公則十六, 而諸侯則十二焉, 上大夫則八, 而下大夫則六焉。 多寡之數, 各稱其位, 而自有制度, 不可恃財僭越也。 以天下奉一人, 窮水陸之味, 非不能也, 而天子之豆, 尙有數者, 誠以天地之生物, 有大數, 取之有道, 用之有節故也。 況我國土地瘠薄, 一有凶災, 萬姓啼飢, 而崇飮之家, 曾莫之省。 凡可以宴飮之事, 强而名之, 一有除拜, 則名之曰致賀, 小有往返, 則名之曰迎(錢)〔餞〕 , 某爲先生, 往拜禮也, 某爲新進, 免新禮也。 由是而群飮之風長焉, 長夜之飮興焉, 其餘邀致權勢, 私相宴樂, 以爲後日相援之地者, 難以枚擧。 甚者, 未辦酒肉, 不能入仕者有之。 且閭巷小民, 一醉之餘, 遽生嫌隙, 水火可入, 白刃可蹈, 獄訟之煩, 實由於此。 雖殿下遇災修省, 減膳避殿, 禁酒之令方嚴, 而下之沈湎者有焉, 殿下安得而知之? 殿下莊敬以臨之, 法司從旁而劾之, 弊尙如此, 況輦轂之外, 耳目所不及者乎? 監司主一道, 邊將主一鎭, 守令、萬戶, 各主一邑, 一營, 分爲禦侮, 任重事劇, 而一見賓旅, 先以酒色, 務悅其心, 一醉日富, 而遐棄厥司, 其酣飮之弊, 視京師尤甚。 失今不救, 臣等恐西晋之俗, 復起於今日, 言之至此, 誠可寒心。 臣等願殿下節用愛人, 躬行以率之, 申明世宗戒酒之敎, 而猶有犯禁者, 論以制書有違, 痛革此弊。 則財不妄費, 而可以備水旱之災矣。 五曰, 謹幾微。 臣等竊聞, 陰陽之運, 天地之和, 物理人事之始終, 皆自芒忽毫釐, 而至不可禦。 夫水之微也, (奉)〔拳〕 土可塞, 及其盛也, 漂水石、沒陵丘; 火之微也, 勺水可滅, 及其盛也, 焦都邑、燔山林, 故治之於微, 則用力寡, 而功多, 治之於盛, 則用力多, 而功寡。 古昔帝王, 皆消患於未萌, 弭禍於未形, 其慮至深遠矣。 我殿下天縱聖智, 日就學問, 修德而矜細行, 圖治而憂未然, 凡事之宜於今, 而妨於後, 便於己, 而害於民者, 必深思遠計, 而爲之設施, 安有一號令、一政事, 妄動謬擧, 而致有後悔哉? 臣等近觀皇家以韓氏之故, 待一國如一家, 所奏輒準, 而錫賚便蕃, 可謂榮矣。 然其別求之物, 年增歲益, 無有紀極, 以我國褊小, 地産有限, 而皇家之誅責無厭, 求愈多, 而財愈不給, 請愈煩, 而力愈不逮。 其所以榮之, 適所以病之也, 豈不深可慮也? 古者, 天子不私求財, 至於春秋之時, 始有求金求車之使於列國, 而孔子書之曰: "求者, 所以著天王之失道也。" 今皇帝求珍怪奇玩之物於外國, 而獨謀諸婦、寺, 不使外朝知之, 其他可知矣。

夫諸侯之於天子, 有臣道焉, 有子道焉, 子之於父, 盡其孝而已矣, 臣之於君, 盡其忠而已矣。 忠臣則從義, 而不從君, 非直順其然諾也; 孝子則從善, 而不從父, 非直養其口體也, 況敢以難得之貨, 難繼之事, 苟悅其君父之心, 而重虧忠孝之名乎? 我殿下旣知其然, 而猶不能自已, 求無不從, 請無不聽者, 豈不以君父之所索, 臣子所當供, 寧力不逮而後已, 不敢自辭而然乎? 其知以小事大, 畏天保國之道乎? 然臣等竊思, 方今之勢, 有不可者非一。 夫戲玩之具, 雕鏤之事, 徒費財力, 而無益於用。 殿下重違皇帝之命, 乃於闕門之內, 鳩材若匠, 俾工師主之, 中使董之, 分耦督擧, 校其能否, 而爲之賞罰焉, 百工齊赴, 衆技竝作, 皷鑄磨鑢之聲, 殷動宮闕, 所造器用鳥獸、草木、人物之狀, 有萬不同, 而皆極精巧, 其歸獻天子, 豈不悅於目, 而快於心哉? 豈不以我國爲工於技, 而敏於趨事者哉? 然觀今年之求, 倍蓰去年, 則其流之弊, 雖罄帑藏之, 有竭吾民之力, 而將不能充其求者, 季之事, 當復見於今日矣。 且在我世宗朝, 以金銀非本國所産, 陳奏請免, 至于再三, 乃得蒙準, 至今受其賜。 今者別獻玩好之物, 多用金銀鐫飾, 若此不已, 遂至於滋息, 則非但有不堪之弊, 於祖宗請免之意, 又如何耶? 此其不可者一也。 平安一路, 爲國門戶, 使命往來, 胡虜覬覦, 騎駄護送之勞, 沿江防戍之苦, 非他道之比。 我殿下宿知此道之弊, 蠲除徭役, 勤恤民隱者, 誠無所不至矣。 然今別獻之物, 倍於常貢之數, 大而貨幣, 小而服玩, 以至飮食細碎之物, 簽民轉輸者, 歲不下數百駄, 加以皇華之來, 殆無虛歲, 迎送供頓之費, 不可殫記。 向者無事之時, 歲貢有常數, 華使不數來, 而猶且不堪, 民不能自存, 官不能自給, 公私俱困者, 蓋已久矣。 今驅不能存之民, 以輸倍數之物, 委不能給之官, 以應無窮之費, 則官民其能當乎? 今不早圖, 而至於財力殫竭, 十室九空, 然後殿下西顧而嘆, 雖有智者, 不能爲殿下謀矣。 且據地設險, 王公守國之道, 則義州築城之擧, 在所不得已也, 然時屈擧贏, 聖人所戒, 固當視其豐稔, 候其農隙而役之。 今者民之困苦如彼, 饑饉如此, 其忍聚失業之民, 而興不時之役乎? 殿下聞中朝置鎭湯站, 要及鄭同未還, 拾石設械, 以示先有築城之勢, 於國家之計得矣。 然近日摠兵官韓斌, 因護送鄭同, 率手下千餘人, 至婆娑堡而還, 堡與我土, 纔隔一江, 其目覩功築之有無審矣, 而之帶行頭目, 亦是中朝人也, 安可掩其耳目乎? 況義州城外, 率皆民田, 禾稼被野, 其鳩石輾曳之間, 能無損傷乎? 妨農駭聽, 而無益於計, 此其不可者二也。 爵命, 人主所以礪世磨鈍之器, 非有赫赫之功, 顯顯之能者, 莫宜加也。 我殿下卽位以來, 愛惜名器, 雖一資一級, 未嘗輕以與人, 今迫於鄭同等無厭之請, 其族黨之庸愚無狀, 不識半行書者, 授之高資, 不少濡滯, 至有以白徒, 超授三四品之職者非一。 以故無識之徒, 爭效慕之, 雖非族黨, 或以譯傳言語, 或以迎接應辦, 因緣請囑, 期於得遂, 前年如是, 今年如是, 溪壑之欲, 寧有窮已? 設使輩, 自以爲無言不從, 而擬子弟以臺諫、台曹之任, 則殿下決不可從。 從之則國事非矣, 不從則秪益其怒, 未審殿下將何以處之乎? 昔在世宗朝, 宦官尹鳳, 銜命到國, 請授其姪子吉生司饔別坐, 世宗不肯輕許, 廣咨廷臣, 然後許之, 今者鄭同姪子孝恭, 不待其請, 而殿下先許以堂上之職。 別坐小職也, 世宗猶惜之, 堂上官高秩也, 彼雖請之, 猶當爲之辭, 以示重難之意可也, 而殿下之不少靳惜何也? 此其不可者三也。

天子享四海之富, 羅八珍於前, 雖非外國之産, 亦足以充庖廚、給府庫矣, 而必屈至尊之威, 下求細碎之物於我國, 豈有他哉? 誠以重韓氏之故, 曲示私恩, 以寵異之耳。 其志則初未嘗侵擾我也, 困苦我也, 爲韓氏者, 亦必以此爲我國之榮, 而不知爲病之至於此也無疑矣。 殿下若將本國僻陋無産, 一路駄載之弊, 卑辭抗表, 陳奏天庭, 則韓氏亦當悔悟, 從容爲帝言之, 而朝廷之上, 豈無骨鯁之臣, 能批逆龍鱗, 陳其利害, 而爲之糾正者乎? 內有韓氏之請, 外有廷臣之諫, 則天心可回, 而病根可祛矣。 殿下初欲具由陳奏, 謀及廷臣, 聖算至矣, 議者以爲: "天子之私求, 布露於朝廷, 則是彰君過也, 啓後患也。" 殿下迫於群議, 事竟不行, 以至於此, 可勝嘆哉。 此其不可者四也。 鄭同本一狎邪奸猾無狀小人, 昵侍天子左右, 凡可以市寵之術, 無所不爲, 因緣韓氏, 頗見親幸。 先以赴京使臣所齎些少之物, 逼令私獻, 以試帝心, 從而歷數土産曰, 某物可以悅於口, 某物可以悅於目, 某物可以便於身體也, 以中帝意, 至以服、食、器、用、玩好之物, 降勅求之, 其損穢帝德甚矣。 於往年, 躬到本國, 凡有所求, 必稱聖旨, 掊取土産而歸, 誇示九宮, 以實己言。 今又來也, 所求之物, 倍於前日, 如曰天子誠有是求, 則求之之勅, 豈獨降於前, 而靳於後乎? 鄭同所言, 質之無由, 安可盡信, 而奉之彌謹乎? 初以韓氏之言, 白于上曰: "每次赴京, 請令族親, 充使以遣。" 而卒然改曰: "此非韓氏, 實乃聖旨也。" 其言之反覆難信類此。 且所求之物, 果出帝命, 則使者雖非韓氏之族, 有何不可, 而必欲爾也? 其意不過以韓氏爲餌, 而釣取私獻之物耳。 韓氏族親, 今姑勿令充使, 以俟帝命之如何, 則言之眞贗, 不待敷奏, 而可知矣。 本我國賤竪, 而殿下優待之者, 非爲也, 乃所以敬朝廷也。 亦人耳, 當爲殿下恭敬無二, 以示不忘父母之邦可也, 而曾不以爲念, 一快於心, 則躍躍而喜, 妄辭泉湧, 少有不快, 則敢爲不遜之語。 又於請宴之日, 潛偸御扇, 以慢殿下, 臣等痛心。 此其不可者五也。 昔 定公, 與諸侯會於夾谷, 孔子攝行相事, 之俳優、侏儒戲於前, 孔子斬之。 夫呑鉤吐火, 滑稽調戲, 皆變幻淫巧之術, 所當放斥, 而遠之者也, 殿下每於請宴之日, 許令之頭目, 陳雜戲於前, 或令再試其術, 假以樂觀之色, 優給布子以賞。 於是乎喜其術之得售, 而利其賞之厚也, 技戲日增, 而賞亦倍焉。 彼安知殿下實不喜其事, 而强慰其心也? 將矜其術, 誇其所得語上國, 則異日宦寺之來, 何憚而不爲此乎? 殆必有甚焉者矣。 我國素以禮義聞, 朝廷有識之士, 若聞此等事, 則必將曰: "朝鮮之待中官如是, 朝鮮之好幻術如是。" 則豈不爲聖德之累耶? 此其不可者六也。 臣等以謂 ‘旣往之失, 不可追,’ 更思將來之責, 止水於涓涓, 撲火於焰焰, 無貽後悔, 幸甚。 臣等且觀近歲朝廷使命之來也非一, 而朝官, 則以節義廉恥自飭, 宦官, 則類皆貪饕如是。 我國宦官, 不操權柄, 其勢焰, 雖非中朝之比, 使於四方, 則不爲鄭同之所爲者幾希, 此亦殿下之所當知也。 臣等聞應天以實不以文, 動民以行不以言。 殿下誠欲消復天災, 宜去浮文, 敦本實量才能課功狀, 使之有任賢之實; 賞有德刑有罪使之有勸懲之實, 頓紀振綱, 而變已成之風, 長慮遠圖, 而銷未萌之患。 則聖敎所謂風雨時, 禾穀登, 變災爲祥轉禍爲福, 可得以致也。 不然, 殿下雖殫圭璧以祀神祇, 降德音以求民瘼, 徒爲浮文, 而不能答上天之戒矣。

疏上, 命示領敦寧以上。 鄭昌孫韓明澮尹士昕洪應盧思愼議: "弘文館疏內用人、刑賞、正風俗、去奢華, 當今聖上所當講究, 更加留意。 若之事, 皆憑聖旨, 勢不得不已, 但所請官職, 少加裁抑何如?"


  • 【태백산사고본】 19책 13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23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식생활-주류(酒類)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외교-명(明) / 주생활-가옥(家屋) / 윤리-강상(綱常)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광업-광산(鑛山)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