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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 10월 18일 갑자 1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동부승지 이공이 의금부에서 삼복한 어을우동의 죄안을 가지고 아뢰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공(李拱)이 의금부(義禁府)에서 삼복(三覆)한 어을우동(於乙宇同)의 죄안(罪案)을 가지고 아뢰기를,

"어을우동이 전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의 처(妻)가 되었을 때 수산수(守山守) 기(驥) 등과 간통한 죄는,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의(比擬)하여, 교부대시(絞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의 죄는 혹 비율(比律)449) 하여 논단(論斷)할 수 있지만, 사형(死刑)에 이르러서 어찌 비율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조(太宗朝)에 이와 같이 음탕한 자가 있어서 간혹 극형에 처하였으나, 이것은 특별히 율(律) 밖의 형벌이었는데, 어찌 후세(後世)에서 법(法)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지만, 인주(人主)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好生]으로써 덕(德)을 삼아 율 밖의 형벌을 써서는 안됩니다."

하고, 도승지 김계창(金季昌)은 아뢰기를,

"어을우동은 다른 음탕한 자와 비할 수 없습니다. 종실(宗室)의 처(妻)로서 종실의 근친(近親)과 간통을 하고, 또 지거비(知巨非)는 일찍이 종의 남편이었는데도 그와 간통을 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순명(金順命)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극기(李克基)는 아뢰기를,

"인주(人主)가 형벌을 쓰는 것은 마땅히 정률(正律)을 써야 하고, 비율(比律)하여 죽여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풍속(風俗)이 아름답지 못하여, 여자(女子)들이 음행(淫行)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懲戒)되는 바가 없을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루어지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을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전(重典)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사형수에 대하여〉 복심(覆審)하여 아뢰는 까닭은 죄수를 위하여 살릴 길을 구하는 것이니, 한때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경솔히 율 밖의 중전(重典)을 써서는 옳지 못합니다. 또 풍속이 어찌 형벌로써 갑자기 변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벌하는 까닭은 교화(敎化)를 돕고자 함인데, 만약에 풍속을 고칠 수 없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찌 반드시 형벌을 쓰겠는가? 어을우동의 음행이 이와 같은데, 지금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고려[前朝] 말세(末世)의 음란(淫亂)한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까 두렵다."

하였다. 김계창이 곧 아뢰기를,

"형벌이란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하는 것입니다. 어을우동은 음란하기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계창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깨닫고 힘써 영합(迎合)하기만 하였다. 소위(所謂)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한다.’는 것이 율(律) 밖의 형벌을 말함이겠는가? 감히 이 말을 속여서 인용하여 중전(重典)을 쓰도록 권(勸)하였으니,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22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6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풍속-풍속(風俗) / 역사-사학(史學)

  • [註 449]
    비율(比律) : 죄에 맞는 정조(正條)가 없을 때 비슷한 조문(條文)을 비의(比擬)함.

○甲子/受常參視事。 同副承旨李拱, 將義禁府三覆於乙宇同罪案, 啓曰: "於乙宇同, 前爲泰江妻時, 奸守山等罪, 比《大明律》背夫在逃, 因而改嫁, 絞不待時。" 上問左右, 領議政鄭昌孫對曰: "笞杖之罪, 或可比律論斷, 至於死刑, 安可比律也? 太宗朝, 有如此淫奔者, 或置極刑, 然此特律外之刑, 豈可爲後世法乎? 今於乙宇同之罪, 雖不容誅, 人主以好生爲德, 不可律外用刑也。" 都承旨金季昌曰: "於乙宇同, 非他淫奔者比也。 以宗室妻, 奸宗室近親, 且知巨非, 曾爲婢夫, 而又奸之, 宜置極刑。" 禮曹參判金順命、漢城府左尹李克基曰: "人主用刑, 當用正律, 不可比律而殺之。" 上曰: "今風俗不美, 女多淫恣。 若不痛繩以法, 則人無所懲, 風俗何由正乎? 古云: ‘怙終賊刑。’ 於乙宇同, 恣行如此, 不置重典而何?" 昌孫曰: "覆奏所以爲囚求生也, 不宜以一時之怒, 輕用律外重典。 且風俗, 豈以刑罰遽變乎?" 上曰: "刑罰所以弼敎, 若不能變俗, 則治國, 何必用刑? 於乙宇同, 淫行如此, 今不痛懲, 則前朝季世淫亂之風, 恐從此興矣。" 季昌卽曰: "刑罰, 世輕世重。 於乙宇同, 淫亂如此, 宜置重典。" 上曰: "然。"

【史臣曰: "季昌揣知上意, 務爲迎合。 所謂世輕世重者, 律外之刑云乎哉? 敢誣引, 勸用重典, 時議非之。"】


  • 【태백산사고본】 18책 122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0책 16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윤리-강상(綱常) / 풍속-풍속(風俗)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