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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01권, 성종 10년 2월 9일 병신 2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전 경력 이인규를 인견하여 일본의 풍속·학문·관대 등을 물어보다

후원(後苑)에 나아가 무과(武科)의 초시자(初試者)·중시자(重試者)를 모아 강서(講書)하여 중시의 양담(楊澹) 등 17인과 초시 이성달(李成達) 등 9인을 뽑았다. 또 전 경력(經歷) 이인규(李仁畦)를 인견(引見)하여 일본(日本)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계해년085) 변효문(卞孝文)이 일본으로 사신 갈 때에, 윤인보(尹仁甫)가 부사(副使)가 되고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으며, 신(臣)은 변효문의 자제 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갔습니다. 3월에 배를 띄웠는데, 삼도(三島) 사이는 풍파가 매우 험하여 산에 이르는 듯도 하고 골짜기로 떨어지는 듯도 하였으며, 지척 사이에 있는 두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접대가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섬은 생리(生利)가 매우 박(薄)하므로 비록 후하게 대접하려 하더라도 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주(島主)에게 겨우 한 섬의 씨를 뿌릴 만한 밭 밖에 없으므로, 오로지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내리는 것에 의지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삼도(三島)에서 일본까지 모두 며칠 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기도(壹岐島)에서 본국(本國)까지 모두 25일 길이며, 신 등은 6월이 되어서 평도(蓱渡)에 닿아 비로소 육로(陸路)로 갔는데, 그 나라에는 우역(郵驛)이 없었습니다. 그 풍속은 말로 밭을 갈고 모든 나르는 물건은 사람이 메며, 산골짜기 사이에 소를 놓아 먹이는데, 소는 다 살쪘습니다. 신 등이 ‘소를 잡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대 나라에서는 짐승을 먹기를 좋아하니 참으로 추악(醜惡)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왜인(倭人)은 우리를 매우 박하게 대우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절[僧舍]에 들어가 마실 물을 구하였더니 낡은 그릇에 주고는, 다 마시고 나니 곧 부숴버렸으며, 또 음식을 줄 때에는 나무 그릇을 쓰고, 다 먹으면 반드시 밟아 부수고는 ‘그대는 이[齒]에 물을 들이지 않고 얼룩무늬 옷[班衣]을 입지 않고 짐승 고기를 먹기를 좋아하니 참으로 추하다.’ 하였으며, 만나면 반드시 코를 가리고 지나갔습니다. 신이 또 7월에 황제(皇帝)의 나들이를 보았는데, 연(輦)을 타고 다녔으며, 우인(優人)086) 이 우리 나라 조관(朝官)과 부인(婦人)의 옷을 입고 그 앞에서 연희(演戲)하였습니다. 그 나라의 풍속은 불교를 심하게 믿어서, 절이 여염(閭閻)의 반이나 되고, 현달(顯達)한 관원(官員)일지라도 나이가 40을 넘으면 곧 머리를 깎으며, 신 등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도 절에서 묵었습니다. 곁에 대숲이 있는데, 도둑이 야음(夜陰)을 타서 공격하려 하므로, 신 등이 늘 막느라고 괴로와서 편히 자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대신(大臣)의 직명(職名)은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가장 높은 것이 관제(管提)이고, 다음이 좌무위(左武衛)이고, 다음이 대화수(大和守)인데, 그 나라의 토전(土田)을 나누어 관제가 그 반을 갖고 남은 두 신하가 또 나머지 반씩을 다스리며, 돈을 내어 황제를 공봉(供奉)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시사(市肆)가 있어서 교역(交易)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시사는 자못 우리 나라와 비슷하나,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무역하는 물건은 여러 가지 해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 부녀자들이 머리를 풀어 꾸미고 동백기름을 바르고서 낮에 모여 저자[市]를 이루었다가 밤이 되면 간음(姦淫)하여 생업을 돕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땅의 넓이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나라 사람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남으로는 15일 길, 북으로는 7일 길, 동으로는 40일 길이나 된다.’ 하기에, 신이 ‘너희 나라에는 역(驛)이 없는데, 어떻게 거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나그네가 묵어 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접대할 때에 앉는 순서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 등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 관제(管提)가 북쪽에 앉아서 남쪽을 향하고 사(使)·부사(副使)를 앞에 앉히므로, 사(使)가 옳지 않게 여겨 ‘나와 너는 대응하니 객(客)은 동쪽에 주인은 서쪽에 앉는 것이 예(禮)이다.’ 하니 관제가 ‘그대 나라는 예전부터 내조(來朝)하였는데, 그대만이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고 곧 한 편(編)의 책을 가져와 보이는데 ‘《고려 내조(高麗來朝)》·《신라 내조(新羅來朝)》’라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남쪽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면 서쪽에 앉아야 할 것이다.’ 하기에, 사(使)가 ‘우리 나라가 교린(交隣)을 중하게 여겨 멀리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네가 감히 거만하게 구니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하고 나가려 하니, 동쪽에 앉게 하였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잔치를 베풀어 전별하는 예(禮)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석(朝夕)으로 주는 밥에는 모래가 섞였고 파국[葱羹]을 곁들일 뿐이었으니, 어찌 잔치를 베풀어 음식을 권하여 위로하는 예가 있겠습니까? 다만 세 대신과 남선사(南仙寺)·이령사(二靈寺)·상국사(相國寺) 세 절의 중[僧]이 잇달아 음식을 권하여 위로하였으나, 또한 탕병(湯餠)087) ·냉병(冷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 황제(先皇帝)를 제사할 때에 임금의 부인이 보러 왔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랬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적송전(赤松殿)이라는 신하가 제 손으로 제 임금을 죽이고 구주(九州)로 달아났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새 황제를 세웠는데, 그때 12세였습니다. 신 등이 전 임금을 제사하고 새 임금에게 하례(賀禮)할 때에 치차(輜車)088) 를 타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의 부인이라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새 황제가 갑자기 죽어서 또 겨우 9세인 새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들었으나, 또한 참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도적(盜賊)이 많아, 불러 모아 떼를 이루어 겁탈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검(劍)을 팔러 온 자가 말하기를, ‘내 검은 어젯밤에 잇달아 두 사람을 베었으므로 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하였습니다. 또 그 들의 풍속은 부처를 숭상하므로 비록 살인(殺人)을 범한 자일지라도 절에 들어가 3일을 지내면 죄주지 않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활을 잘 쏘는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들의 풍속은 대[竹]를 합쳐서 활을 만듭니다. 신이 보니 30인이 짝지어 쏘는데 맞히는 자가 겨우 한두 사람이므로, 신이 ‘우리 나라 사람은 종일 과녁[侯]을 쏘아도 쏘면 맞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제 너희가 쏘는 것을 보니 아이들의 장난 같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성을 내어 몸을 일으켜서 칼을 뽑아 신을 찌르려 하였으나, 통사(通事)가 말려서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의 관대(冠帶)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는 상중(喪中)에 있었으므로 흰 깁으로 만든 옷을 입었고, 관(冠)은 마치 신목[靴項] 같았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용력(勇力)이 있는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과 서로 다투면 반드시 이깁니다."

하였다.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묻기를,

"황제의 딸은 하가(下嫁)하지 못한다 하는데, 그러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반드시 친족(親族)을 취택(取擇)하여 출가하며, 친족이 없으면 동기도 피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풍속은 더욱 아름답지 않다. 왜인도 학문을 알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제영(題詠)을 알 뿐이고, 경서(經書)는 배우지 않습니다. 절의 중[僧]이 시(詩)를 좋아하여 신숙주(申叔舟)에게 시를 구하였는데, 신숙주가 곧 30편(篇)을 지으니, 중이 보고서 심복(心服)하고 화답하려 하였으나 못하였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물소[水牛]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없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물산(物産)이 없으므로, 모든 물건은 흔히 남만(南蠻)에서 사서 씁니다. 다만 황금이 있는데, 그 값은 우리 나라와 다름 없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음악이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고(腰鼓)·생(笙)·관(管)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음악을 듣고 혹 일어나서 춤추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0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93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외교-왜(倭)

○御後苑。 會武科初、重試講書, 取重試楊澹等十七人、初試李成達等九人。 又引見前經歷李仁畦, 問日本之事, 對曰: "去癸亥年, 卞孝文奉使日本, (尹仁寶)〔尹仁甫〕 爲介, 申叔舟爲書狀官, 臣以孝文子弟從行。 三月發船, 三島之間風濤甚惡, 或若登山, 或若墜谷, 咫尺之間, 二舟之人不得相見矣。" 上曰: "對馬島主接待何如?" 對曰: "本島生利甚薄, 雖欲厚待, 無由也。 島主僅有田, 可種一碩, 專仰我國歲賜而已。" 上曰: "自三島至日本, 凡幾日程?" 對曰: "自一岐島至本國, 凡二十五日程。 臣等至六月泊于萍渡, 始行陸路, 其國無郵驛。 其俗耕田以馬, 凡輸物人擔之, 而放牛山谷間, 牛皆肥腯。 臣等問曰: ‘可得宰牛而食乎?’ 答云: ‘汝國好食走獸, 誠可醜惡。’ 且倭人待我甚薄。 臣偶入僧舍求飮水, 乃以故器與之, 飮畢卽破棄, 又饋食用木器, 食畢必蹴踏毁之, 乃曰: ‘汝不染齒, 不班衣, 好食獸肉, 良可醜也’, 見必掩鼻而過。 臣又於七月見皇帝出遊, 乘輦而行, 有優人着我國朝官及婦人服, 作戲於前。 國俗酷信佛敎, 寺刹半於閭閻, 雖至達官, 年踰四十, 便剃髮。 臣等始至, 亦館於寺, 傍有竹林, 盜乘夜欲攻, 臣等常苦防戍, 不能安寢。" 上又問曰: "大臣職名何如?" 對曰: "最上管提, 次左武衛, 次大和守。 分其國土田, 管提取其半, 二臣又治其半, 出錢供奉皇帝。" 上曰: "有市肆交易乎?" 對曰: "市肆頗類我國, 然土瘠民貧, 所貿之物不過海錯。 其婦女被髮爲飾, 塗以冬栢油, 晝聚爲市, 夜則淫奔, 以資生業。" 上曰: "土地之廣幾許?" 對曰: "其國人自誇云: ‘南則十五日程, 北則七日程, 東則可程四十日’, 臣問曰: ‘爾國無驛, 何以知遠近?’ 對曰: ‘以行人經宿可知矣。’" 上曰: "接待序坐何如?" 對曰: "臣等始至, 管提坐北面南, 令使、副使坐於前, 使不可曰, ‘吾與爾均敵, 客東主西, 禮也’, 管提曰: ‘爾國自古來朝, 爾何獨不然?’ 卽取一編書示之, 書曰: ‘高麗來朝, 新羅來朝。’ 乃云: ‘汝不肯坐南, 當(序)〔坐〕 於西’, 使曰: ‘我國重交隣, 遠遣使臣, 爾敢倨傲, 吾不可卽席’, 欲出, 乃令坐於東。" 上曰: "有設宴餞別之禮乎?" 對曰: "朝夕之供, 雜以沙石, 隨以葱羹耳, 豈有設宴餞慰之禮? 但三大臣與南仙二靈相國三寺住僧, 相繼餞慰, 亦不過湯餠冷餠耳。" 上曰: "嘗聞祭先皇帝時, 有君夫人來見, 然乎?" 對曰: "有臣赤松殿者, 手弑其君, 逃奔九州, 國人立新皇帝, 時年十二。 臣等祭前君, 賀新君, 有乘輜車者來觀, 號爲皇帝夫人, 然未可知也。 且聞新皇帝暴殂, 又立新君, 年甫九歲, 亦未知信否也。 國多盜賊, 嘯聚成群劫掠, 殆無虛日。 有賣劍者來言曰: ‘吾劍昨夜連斬二人, 鋩刃少缺。’ 又其俗崇佛, 雖犯殺人者, 投佛舍過三日, 則不之罪。" 上曰: "有善射者乎?" 對曰: "其俗合竹爲弓。 臣見三十人耦射, 中者僅一二人, 臣曰: ‘我國之人終日射侯, 發無不中。 今觀汝射, 有同兒戲’, 其人發怒, 挺身露刃將刺臣, 賴通事解得免。" 上曰: "皇帝冠帶何如?" 對曰: "其時方在喪中, 衣白絹衣, 冠如靴項然。" 上曰: "有勇力者乎?" 對曰: "無之。 我國人與相搏, 必勝。" 上黨府院君 韓明澮問曰: "皇帝之女, 不得下嫁然乎?" 答曰: "必擇親族而嫁之, 苟無親族, 不避同産。" 上曰: "此風尤不美也。 亦知學乎?" 對曰: "但解題詠耳, 經書則不學也。 寺僧好詩, 求詩於申叔舟, 叔舟卽賦三十篇, 僧見之心服, 欲和而未能也。" 上曰: "有水牛乎?" 對曰: "無之。 其國無物産, 凡物多貿於南蠻而用之。 只有黃金, 其直與我國無異也。" 上曰: "有樂乎?" 對曰: "但有腰鼓、笙、管。 聞我國音樂, 或有起舞者。"


  • 【태백산사고본】 16책 10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9책 693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