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56권, 성종 6년 6월 21일 무술 1/3 기사 /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영의정 신숙주의 졸기
국역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가 졸(卒)하였으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신숙주의 자(字)는 범옹(泛翁)이고 고령현(高靈縣) 사람인데, 공조 우참판(工曹右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 신장(申檣)의 아들로서, 영락(永樂)정유년549) 6월 정유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량(氣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정통(正統)무오년550) 에 세종(世宗)이 비로소 시부 진사(詩賦進士)를 두었는데, 신숙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연이어 장원을 하였고, 또 생원(生員)에 합격하였으며, 기미년551) 에 문과(文科)에 제 3인으로 뽑히어 처음에는 전농 직장(典農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조(吏曹)에서 신숙주를 제집사(祭執事)에 임명하였는데, 관원이 잊어버리고 첩(牒)을 주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을 궐하게 되었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관원이 죄를 얻어 파역(罷役)을 당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이를 민망히 여기어 곧 스스로 거짓 복죄(服罪)하여 이르기를, ‘관원은 실제로 첩(牒)을 전했지마는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원은 온전할 수 있었으나 신숙주는 파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후덕(厚德)함을 추앙하였다. 신유년552) 가을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553) 에 국가(國家)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日本)과 교빙하게 되자,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신숙주가 마침 병들었다가 처음으로 나았는데 세종(世宗)이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들으니 네가 병으로 쇠약하다고 하는데,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이미 나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차 떠나려고 하자 친척(親戚)과 고구(故舊)들은 사별(死別)하는 것이라고 여겨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나, 신숙주는 온화하여 조금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사람들이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시(詩)를 써 달라고 구(求)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나 신숙주는 붓을 잡고 즉석에서 써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돌아올 때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가 도주(島主)와 더불어 세견선(歲遣船)의 수(數)를 약정(約定)하려고 하는데 도주가 아랫사람들에 오도(誤導)되어 의위(依違)554) 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듣고, 신숙주가 도주에게 말하기를,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갈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며, 수를 정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도주에게 의뢰하겠느냐? 그 이롭고 해로움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뒷날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도주가 드디어 약속을 정하였다. 우리 나라로 향할 때 구풍(颶風)555) 을 만나서 여럿이 모두 얼굴 빛이 변하였으나, 신숙주는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여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556) 에 경박(經泊)하여 예악 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떤 본국(本國)의 여자가 일찍이 왜적(倭賊)에게 사로잡혔다가 임신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같은 배로 오게 되었다. 배 가운데에서 모두 말하기를, ‘아이 밴 여자는 배가 가는 데에 꺼리는 바인데, 오늘의 폭풍(暴風)은 이 여자의 탓이라.’라고 하면서 바다에 던지고자 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말하기를, ‘남을 죽이고 삶을 구(求)하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바람이 자게 되어서 일행이 모두 무사하였다. 정묘년557) 가을의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에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경태(景泰)경오년558) 에 조사(詔使)559) 예겸(倪謙)·사마순(司馬恂)이 본국(本國)에 이르렀는데, 세종이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교유(交遊)하도록 명하였더니, 신숙주와 성삼문(成三問)이 예겸 등을 따라 창화(唱和)560) 하였으므로 크게 칭상(稱賞)을 받았고 예겸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짓자 신숙주가 바로 그 자리에서 보운(步韻)561) 으로 이에 화답하였다. 예겸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갈 때 시(詩)에 붙여 이르기를, ‘사부(詞賦)는 일찍이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문단(文壇)에 올라 명성이 전해져 조단(朝端)562) 에 가득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에게 탄복한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임신년563) 에 세조(世祖)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중국 서울에 갈 때에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다. 계유년564) 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고, 세조의 정난(靖難)에 책훈(策勳)565) 되어 수충 협책 정난 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갑술년566) 에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을해년567) 에 세조가 즉위(卽位)하자 동덕 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자헌 대부(資憲大夫)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졌다. 주문사(奏聞使)가 되어서는 고명(誥命)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서 돌아왔으므로 토지와 노비[臧獲]·안마(鞍馬)·의복(衣服)을 하사받았다. 병자년568)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전임(轉任)되어 판병조사를 겸했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문형(文衡)569) 을 맡았다.
천순(天順)무인년570) 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나아가고, 기묘년571) 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북로(北虜)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므로 세조가 매양 정토(征討)하고자 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분운(紛紜)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계책을 세워 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경진년572) 에 신숙주를 강원도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道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첩(勝捷)이 들리자 표리(表裏)·토전(土田)·노비를 하사하였다. 임오년573) 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성화(成化)병술년574) 에 사면하고, 고령군(高靈君)으로 개봉(改封)하였다. 무자년575) 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세조의 유명(遺命)으로써 원상(院相)을 설치하여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남이(南怡)의 난을 참정(參定)하고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기축년576) 에 예종이 승하(升遐)하자 중외(中外)가 황황(遑遑)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신숙주가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품(稟)하여 대책(大策)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신묘년577)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또 영의정에 제수되자 신숙주가 여러 번 사면하기를 상서(上書)하니, 대왕 대비가 전지(傳旨)하기를, ‘세조께서 경(卿)을 일컬어 위징(魏徵)578) 이라 하였는데, 이제 이를 잊었느냐? 어찌하여 사양하느냐?’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였다. 부음이 들리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내가 깊이 의지하던 대신(大臣)들이 근래에 많이 죽었는데, 이제 영의정이 또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처롭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고 관후(寬厚)하면서 활달(豁達)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미치고 의논(議論)에 항상 대체(大體)를 지녀서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579) 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오랫동안 예조(禮曹)를 관장하여 사대 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소임을 삼아 사명(詞命)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정음(正音)을 알고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였으며, 한음(漢音)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이에 힘입었다.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그 산천(山川)·관제(官制)·풍속(風俗)·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지어 올렸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하였으나 아직 반포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하여 간정(刊定)하여 이를 인행(印行)하게 하였다. 문장(文章)을 만드는 것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각삭(刻削)580) 을 일삼지 않았으며, 스스로 호(號)를 보한재(保閑齋)라 하고 그 집(集)581) 이 있어 세상에 인행되었다. 친척(親戚)을 은혜로써 위무(慰撫)하였고, 요우(寮友)를 성심으로 대접하였으며, 비록 복례(僕隷)와 같이 천한 자라도 모두 은의(恩義)로써 대우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듣는 자가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유명(遺命)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부도(浮屠)582) 의 법을 쓰지 말게 하였으며 서적(書籍)을 함께 묻도록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도덕(道德)을 지키고 문장에 박학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신숙주는 증 영의정 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여덟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長男)은 신주(申澍)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은 신면(申㴐)인데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만나 죽었으며, 다음은 신찬(申澯)인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고, 다음은 신정(申瀞)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다음은 신준(申浚)인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신정과 신준은 모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다. 다음은 신부(申溥)이고, 다음은 신형(申泂)이며, 다음은 신필(申泌)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신숙주는 일찍이 중한 명망이 있어, 세종이 문종(文宗)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를 조우(遭遇)583) 하여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져,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고, 매양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 임금으로 즉위함에 미쳐서는 보양(輔養)하고 찬도(贊導)하는 공이 많았다. 그러나 세조를 섬김에는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584) 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은권(恩眷)이 바야흐로 성하였으나 자신이 유설(縲絏)585) 의 욕(辱)을 만났고, 죽은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신정도 또한 베임을 당했으니, 슬퍼할진저!" 하였다.
- [註 549] 정유년 : 1417 태종 17년.
- [註 550]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551] 기미년 : 1439 세종 21년.
- [註 552]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553] 계해년 : 1443 세종 25년.
- [註 554] 의위(依違) : 결정하지 못하는 모양.
- [註 555] 구풍(颶風) : 회오리 바람.
- [註 556] 금릉(金陵) : 중국의 지명.
- [註 557]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558]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559] 조사(詔使) : 중국 사신.
- [註 560] 창화(唱和) : 시를 서로 주고받음.
- [註 561] 보운(步韻) : 다른 사람의 시의 운을 써서 화답하여 시를 지음.
- [註 562] 조단(朝端) : 조신(朝臣)의 수위(首位).
- [註 563]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564]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565] 책훈(策勳) : 공을 책에 기록함.
- [註 566]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567]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568]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569] 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
- [註 570]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571] 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572]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573]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57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575] 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
- [註 576]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577] 신묘년 : 1471년 성종 2년.
- [註 578] 위징(魏徵) : 당나라 태종 때의 명신.
- [註 579] 강하(江河) : 양자강과 황하.
- [註 580] 각삭(刻削) : 남에게 가혹하게 함.
- [註 581] 집(集) : 《보한재집》.
- [註 582] 부도(浮屠) : 불교(佛敎).
- [註 583] 조우(遭遇) : 현신(賢臣)이 명군(明君)을 만나 마음이 맞음.
- [註 584] 광구(匡救) : 악한 일을 못하게 구원함.
- [註 585] 유설(縲絏) : 검은 포승으로 죄인을 묶음.
원문
○戊戌/領議政申叔舟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叔舟字泛翁, 高靈縣人, 工曹右參判贈領議政檣之子也, 永樂丁酉六月丁酉生。 自少氣度異凡兒, 讀書一覽輒記。 正統戊午, 世宗始設詩賦進士, 叔舟連魁初、覆試, 又中生員, 己未, 擢文科第三人, 初授典農直長。 吏曹差叔舟祭執事, 吏忘不授牒。 因而闕事, 憲府劾之, 吏當得罪罷役。 叔舟悶之, 乃自誣服曰: "吏實傳牒, 我自不進。" 由是吏得全, 而叔舟罷, 人推其厚德。 辛酉秋, 授集賢殿副修撰, 癸亥, 國家遣使聘日本, 以叔舟爲書狀官。 叔舟適病初愈, 世宗引見便殿, 問曰: "聞爾病羸, 可遠行乎?" 對曰, "臣病已愈, 何敢辭?" 將行, 親戚、故舊以爲死別, 有泣下者, 叔舟怡然略無難色。 及至日本國, 人持筆牋, 求詩者坌集, 叔舟操筆立就, 人皆歎服。 回至對馬島, 聞我國與島主約定歲遣船數, 島主爲群下所誤, 依違未定, 叔舟言於島主曰: "船數定, 則權歸島主, 而群下無所利, 不定數, 則人可自行, 何賴島主? 其利害, 不待智者, 而後可知", 島主遂定約。 行遇颶風, 衆皆失色, 叔舟神色自若, 言曰: "丈夫當遠遊四方, 今我旣見日本國, 又因此風, 經泊金陵, 得見禮樂文物之盛, 不亦快乎?" 有本國女, 曾爲倭賊所擄有娠, 至是同舟而來。 舟中皆曰: "孕婦行舟所忌, 今日惡風, 此女爲祟也", 欲投之海, 叔舟獨曰: "殺人求活, 所不忍也。" 俄而風定, 一行皆完。 丁卯秋, 中重試, 超授集賢殿應敎, 景泰庚午, 詔使倪謙、司馬恂到本國, 世宗命選能文者從遊, 叔舟與成三問從謙等唱和, 大被稱賞, 謙作雪霽登樓賦, 叔舟卽於座上步韻和之。 及謙還朝, 寄時曰: "詞賦曾乘屈、宋壇, 爲傳聲譽滿朝端", 蓋服之也。 歷司憲掌令、執義、集賢殿直提學, 壬申, 世祖爲謝恩使赴京, 叔舟以書狀官從行。 癸酉, 陞通政承政院同副承旨, 世祖 靖難策勳, 賜輸忠協策靖難功臣之號。 甲戌, 陞(陞)都承旨, 乙亥, 世祖卽位, 賜同德佐翼功臣之號, 陞資憲藝文館大提學, 封高靈君。 充奏聞使, 請誥命, 蒙準而還, 賜土田、臧獲、鞍馬、衣服。 丙子, 陞正憲兵曹判書, 俄陞崇政判中樞院事, 兼判兵曹事, 轉議政府右贊成兼判兵曹事, 成均館大司成主文衡也。 天順戊寅, 進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高靈府院君, 己卯, 陞左議政。 先是, 北虜屢犯邊, 世祖每欲征討, 朝議紛紜, 叔舟獨建策請討。 庚辰, 命叔舟爲江原、咸吉道都體察使, 往討之, 捷聞, 賜表裏、土田、臧獲。 壬午, 陞領議政, 成化丙戌, 辭免, 改封高靈君。 戊子, 睿宗卽位, 以世祖遺命, 設院相, 叔舟與焉。 參定南怡之亂, 賜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之號。 己丑, 睿宗升遐, 中外遑遑, 罔知所爲, 叔舟稟于大王大妃, 首定大策。 辛卯, 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之號, 又拜領議政, 叔舟累上書辭免, 大王大妃傳曰: "世祖稱卿爲魏徵, 今忘之歟? 何辭也?" 至是卒, 年五十九。 訃聞, 上震悼, 謂左右曰, "予所倚重大臣, 近來多逝, 今領議政又亡, 予甚痛惜。" 叔舟天資高邁, 寬厚豁達, 博洽經史, 議論常持大體, 不爲苛細, 處大事斷大義, 如江河之決, 朝野倚以爲重。 久掌禮曹, 以事大交隣爲己任, 詞命多出其手。 解正音通漢語, 翻譯《洪武正韻》, 學漢音者多賴之。 親涉日本, 凡其山川、官制、風俗、族系靡不周知, 作《海東諸國紀》以進。 世宗撰《五禮儀》, 未頒, 上命叔舟, 刊定行之。 爲文章, 皆出胸中, 不事刻削, 自號保閑齋, 有集行于世。 撫親戚以恩, 待寮友以誠, 雖僕隷之賤, 待之皆有恩義。 及卒, 聞者莫不惜之, 至有掩涕者。 遺命薄葬, 不作浮屠法, 殉以書籍。 諡文忠, 道德博文文, 危身奉上忠。 叔舟娶贈領議政府事尹景淵之女, 生八子, 長澍先死, 次㴐咸吉道都觀察使, 遭李施愛之亂死之。 次澯 黃海道觀察使, 次瀞吏曹參判, 次浚兵曹參議, 瀞、浚皆參佐理功臣。 次溥, 次泂, 次泌。
【史臣曰: "叔舟夙有重望, 世宗嘗謂文宗曰: ‘叔舟可付國事者’, 遭遇世祖, 計行言聽, 世祖嘗曰: ‘卿是我之魏徵’, 每遇大事, 必咨之。 及上卽位, 輔養贊導之功爲多。 然事世祖務爲承順, 睿宗朝, 刑政失中, 而無所匡救, 此其短也。 恩眷方盛, 身遭縲絏之辱, 身歿未幾, 瀞亦見誅, 悲夫!"】
성종 6년 (1475) 6월 21일
성종실록56권, 성종 6년 6월 21일 무술 1/3 기사 /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영의정 신숙주의 졸기
국역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가 졸(卒)하였으므로, 조회를 정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대로 하였다. 신숙주의 자(字)는 범옹(泛翁)이고 고령현(高靈縣) 사람인데, 공조 우참판(工曹右參判) 증 영의정(贈領議政) 신장(申檣)의 아들로서, 영락(永樂)정유년549) 6월 정유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량(氣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 정통(正統)무오년550) 에 세종(世宗)이 비로소 시부 진사(詩賦進士)를 두었는데, 신숙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연이어 장원을 하였고, 또 생원(生員)에 합격하였으며, 기미년551) 에 문과(文科)에 제 3인으로 뽑히어 처음에는 전농 직장(典農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조(吏曹)에서 신숙주를 제집사(祭執事)에 임명하였는데, 관원이 잊어버리고 첩(牒)을 주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을 궐하게 되었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관원이 죄를 얻어 파역(罷役)을 당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이를 민망히 여기어 곧 스스로 거짓 복죄(服罪)하여 이르기를, ‘관원은 실제로 첩(牒)을 전했지마는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원은 온전할 수 있었으나 신숙주는 파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후덕(厚德)함을 추앙하였다. 신유년552) 가을에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553) 에 국가(國家)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日本)과 교빙하게 되자,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신숙주가 마침 병들었다가 처음으로 나았는데 세종(世宗)이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들으니 네가 병으로 쇠약하다고 하는데,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병이 이미 나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차 떠나려고 하자 친척(親戚)과 고구(故舊)들은 사별(死別)하는 것이라고 여겨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나, 신숙주는 온화하여 조금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사람들이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시(詩)를 써 달라고 구(求)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나 신숙주는 붓을 잡고 즉석에서 써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돌아올 때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가 도주(島主)와 더불어 세견선(歲遣船)의 수(數)를 약정(約定)하려고 하는데 도주가 아랫사람들에 오도(誤導)되어 의위(依違)554) 하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듣고, 신숙주가 도주에게 말하기를, ‘배의 수가 정해지면 권한이 도주에게 돌아갈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며, 수를 정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도주에게 의뢰하겠느냐? 그 이롭고 해로움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뒷날에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도주가 드디어 약속을 정하였다. 우리 나라로 향할 때 구풍(颶風)555) 을 만나서 여럿이 모두 얼굴 빛이 변하였으나, 신숙주는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여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556) 에 경박(經泊)하여 예악 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떤 본국(本國)의 여자가 일찍이 왜적(倭賊)에게 사로잡혔다가 임신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같은 배로 오게 되었다. 배 가운데에서 모두 말하기를, ‘아이 밴 여자는 배가 가는 데에 꺼리는 바인데, 오늘의 폭풍(暴風)은 이 여자의 탓이라.’라고 하면서 바다에 던지고자 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말하기를, ‘남을 죽이고 삶을 구(求)하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바람이 자게 되어서 일행이 모두 무사하였다. 정묘년557) 가을의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에 뛰어넘어 제수되었고, 경태(景泰)경오년558) 에 조사(詔使)559) 예겸(倪謙)·사마순(司馬恂)이 본국(本國)에 이르렀는데, 세종이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교유(交遊)하도록 명하였더니, 신숙주와 성삼문(成三問)이 예겸 등을 따라 창화(唱和)560) 하였으므로 크게 칭상(稱賞)을 받았고 예겸이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를 짓자 신숙주가 바로 그 자리에서 보운(步韻)561) 으로 이에 화답하였다. 예겸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갈 때 시(詩)에 붙여 이르기를, ‘사부(詞賦)는 일찍이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문단(文壇)에 올라 명성이 전해져 조단(朝端)562) 에 가득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에게 탄복한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임신년563) 에 세조(世祖)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중국 서울에 갈 때에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다. 계유년564) 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고, 세조의 정난(靖難)에 책훈(策勳)565) 되어 수충 협책 정난 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갑술년566) 에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을해년567) 에 세조가 즉위(卽位)하자 동덕 좌익 공신(同德佐翼功臣)의 칭호를 하사 받았으며, 자헌 대부(資憲大夫)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졌다. 주문사(奏聞使)가 되어서는 고명(誥命)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서 돌아왔으므로 토지와 노비[臧獲]·안마(鞍馬)·의복(衣服)을 하사받았다. 병자년568) 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전임(轉任)되어 판병조사를 겸했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문형(文衡)569) 을 맡았다.
천순(天順)무인년570) 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나아가고, 기묘년571) 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북로(北虜)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므로 세조가 매양 정토(征討)하고자 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분운(紛紜)하였으나, 신숙주가 홀로 계책을 세워 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경진년572) 에 신숙주를 강원도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道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첩(勝捷)이 들리자 표리(表裏)·토전(土田)·노비를 하사하였다. 임오년573) 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성화(成化)병술년574) 에 사면하고, 고령군(高靈君)으로 개봉(改封)하였다. 무자년575) 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세조의 유명(遺命)으로써 원상(院相)을 설치하여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남이(南怡)의 난을 참정(參定)하고 보사 병기 정난 익대 공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기축년576) 에 예종이 승하(升遐)하자 중외(中外)가 황황(遑遑)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신숙주가 대왕 대비(大王大妃)에게 품(稟)하여 대책(大策)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신묘년577) 에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또 영의정에 제수되자 신숙주가 여러 번 사면하기를 상서(上書)하니, 대왕 대비가 전지(傳旨)하기를, ‘세조께서 경(卿)을 일컬어 위징(魏徵)578) 이라 하였는데, 이제 이를 잊었느냐? 어찌하여 사양하느냐?’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9세였다. 부음이 들리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내가 깊이 의지하던 대신(大臣)들이 근래에 많이 죽었는데, 이제 영의정이 또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애처롭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고 관후(寬厚)하면서 활달(豁達)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미치고 의논(議論)에 항상 대체(大體)를 지녀서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아니하였으며,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579) 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오랫동안 예조(禮曹)를 관장하여 사대 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소임을 삼아 사명(詞命)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정음(正音)을 알고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였으며, 한음(漢音)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이에 힘입었다.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그 산천(山川)·관제(官制)·풍속(風俗)·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지어 올렸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하였으나 아직 반포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하여 간정(刊定)하여 이를 인행(印行)하게 하였다. 문장(文章)을 만드는 것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각삭(刻削)580) 을 일삼지 않았으며, 스스로 호(號)를 보한재(保閑齋)라 하고 그 집(集)581) 이 있어 세상에 인행되었다. 친척(親戚)을 은혜로써 위무(慰撫)하였고, 요우(寮友)를 성심으로 대접하였으며, 비록 복례(僕隷)와 같이 천한 자라도 모두 은의(恩義)로써 대우하였다. 졸(卒)하게 되자 듣는 자가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유명(遺命)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부도(浮屠)582) 의 법을 쓰지 말게 하였으며 서적(書籍)을 함께 묻도록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는데, 도덕(道德)을 지키고 문장에 박학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신숙주는 증 영의정 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여덟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長男)은 신주(申澍)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은 신면(申㴐)인데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만나 죽었으며, 다음은 신찬(申澯)인데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고, 다음은 신정(申瀞)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다음은 신준(申浚)인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신정과 신준은 모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다. 다음은 신부(申溥)이고, 다음은 신형(申泂)이며, 다음은 신필(申泌)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신숙주는 일찍이 중한 명망이 있어, 세종이 문종(文宗)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를 조우(遭遇)583) 하여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져,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고, 매양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 임금으로 즉위함에 미쳐서는 보양(輔養)하고 찬도(贊導)하는 공이 많았다. 그러나 세조를 섬김에는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584) 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은권(恩眷)이 바야흐로 성하였으나 자신이 유설(縲絏)585) 의 욕(辱)을 만났고, 죽은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신정도 또한 베임을 당했으니, 슬퍼할진저!" 하였다.
- [註 549] 정유년 : 1417 태종 17년.
- [註 550]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551] 기미년 : 1439 세종 21년.
- [註 552]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553] 계해년 : 1443 세종 25년.
- [註 554] 의위(依違) : 결정하지 못하는 모양.
- [註 555] 구풍(颶風) : 회오리 바람.
- [註 556] 금릉(金陵) : 중국의 지명.
- [註 557]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 [註 558]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559] 조사(詔使) : 중국 사신.
- [註 560] 창화(唱和) : 시를 서로 주고받음.
- [註 561] 보운(步韻) : 다른 사람의 시의 운을 써서 화답하여 시를 지음.
- [註 562] 조단(朝端) : 조신(朝臣)의 수위(首位).
- [註 563]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564]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565] 책훈(策勳) : 공을 책에 기록함.
- [註 566] 갑술년 : 1454 단종 2년.
- [註 567] 을해년 : 1455 세조 원년.
- [註 568]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569] 문형(文衡) : 대제학(大提學).
- [註 570]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571] 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572] 경진년 : 1460 세조 6년.
- [註 573]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57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575] 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
- [註 576]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577] 신묘년 : 1471년 성종 2년.
- [註 578] 위징(魏徵) : 당나라 태종 때의 명신.
- [註 579] 강하(江河) : 양자강과 황하.
- [註 580] 각삭(刻削) : 남에게 가혹하게 함.
- [註 581] 집(集) : 《보한재집》.
- [註 582] 부도(浮屠) : 불교(佛敎).
- [註 583] 조우(遭遇) : 현신(賢臣)이 명군(明君)을 만나 마음이 맞음.
- [註 584] 광구(匡救) : 악한 일을 못하게 구원함.
- [註 585] 유설(縲絏) : 검은 포승으로 죄인을 묶음.
원문
○戊戌/領議政申叔舟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叔舟字泛翁, 高靈縣人, 工曹右參判贈領議政檣之子也, 永樂丁酉六月丁酉生。 自少氣度異凡兒, 讀書一覽輒記。 正統戊午, 世宗始設詩賦進士, 叔舟連魁初、覆試, 又中生員, 己未, 擢文科第三人, 初授典農直長。 吏曹差叔舟祭執事, 吏忘不授牒。 因而闕事, 憲府劾之, 吏當得罪罷役。 叔舟悶之, 乃自誣服曰: "吏實傳牒, 我自不進。" 由是吏得全, 而叔舟罷, 人推其厚德。 辛酉秋, 授集賢殿副修撰, 癸亥, 國家遣使聘日本, 以叔舟爲書狀官。 叔舟適病初愈, 世宗引見便殿, 問曰: "聞爾病羸, 可遠行乎?" 對曰, "臣病已愈, 何敢辭?" 將行, 親戚、故舊以爲死別, 有泣下者, 叔舟怡然略無難色。 及至日本國, 人持筆牋, 求詩者坌集, 叔舟操筆立就, 人皆歎服。 回至對馬島, 聞我國與島主約定歲遣船數, 島主爲群下所誤, 依違未定, 叔舟言於島主曰: "船數定, 則權歸島主, 而群下無所利, 不定數, 則人可自行, 何賴島主? 其利害, 不待智者, 而後可知", 島主遂定約。 行遇颶風, 衆皆失色, 叔舟神色自若, 言曰: "丈夫當遠遊四方, 今我旣見日本國, 又因此風, 經泊金陵, 得見禮樂文物之盛, 不亦快乎?" 有本國女, 曾爲倭賊所擄有娠, 至是同舟而來。 舟中皆曰: "孕婦行舟所忌, 今日惡風, 此女爲祟也", 欲投之海, 叔舟獨曰: "殺人求活, 所不忍也。" 俄而風定, 一行皆完。 丁卯秋, 中重試, 超授集賢殿應敎, 景泰庚午, 詔使倪謙、司馬恂到本國, 世宗命選能文者從遊, 叔舟與成三問從謙等唱和, 大被稱賞, 謙作雪霽登樓賦, 叔舟卽於座上步韻和之。 及謙還朝, 寄時曰: "詞賦曾乘屈、宋壇, 爲傳聲譽滿朝端", 蓋服之也。 歷司憲掌令、執義、集賢殿直提學, 壬申, 世祖爲謝恩使赴京, 叔舟以書狀官從行。 癸酉, 陞通政承政院同副承旨, 世祖 靖難策勳, 賜輸忠協策靖難功臣之號。 甲戌, 陞(陞)都承旨, 乙亥, 世祖卽位, 賜同德佐翼功臣之號, 陞資憲藝文館大提學, 封高靈君。 充奏聞使, 請誥命, 蒙準而還, 賜土田、臧獲、鞍馬、衣服。 丙子, 陞正憲兵曹判書, 俄陞崇政判中樞院事, 兼判兵曹事, 轉議政府右贊成兼判兵曹事, 成均館大司成主文衡也。 天順戊寅, 進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高靈府院君, 己卯, 陞左議政。 先是, 北虜屢犯邊, 世祖每欲征討, 朝議紛紜, 叔舟獨建策請討。 庚辰, 命叔舟爲江原、咸吉道都體察使, 往討之, 捷聞, 賜表裏、土田、臧獲。 壬午, 陞領議政, 成化丙戌, 辭免, 改封高靈君。 戊子, 睿宗卽位, 以世祖遺命, 設院相, 叔舟與焉。 參定南怡之亂, 賜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之號。 己丑, 睿宗升遐, 中外遑遑, 罔知所爲, 叔舟稟于大王大妃, 首定大策。 辛卯, 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之號, 又拜領議政, 叔舟累上書辭免, 大王大妃傳曰: "世祖稱卿爲魏徵, 今忘之歟? 何辭也?" 至是卒, 年五十九。 訃聞, 上震悼, 謂左右曰, "予所倚重大臣, 近來多逝, 今領議政又亡, 予甚痛惜。" 叔舟天資高邁, 寬厚豁達, 博洽經史, 議論常持大體, 不爲苛細, 處大事斷大義, 如江河之決, 朝野倚以爲重。 久掌禮曹, 以事大交隣爲己任, 詞命多出其手。 解正音通漢語, 翻譯《洪武正韻》, 學漢音者多賴之。 親涉日本, 凡其山川、官制、風俗、族系靡不周知, 作《海東諸國紀》以進。 世宗撰《五禮儀》, 未頒, 上命叔舟, 刊定行之。 爲文章, 皆出胸中, 不事刻削, 自號保閑齋, 有集行于世。 撫親戚以恩, 待寮友以誠, 雖僕隷之賤, 待之皆有恩義。 及卒, 聞者莫不惜之, 至有掩涕者。 遺命薄葬, 不作浮屠法, 殉以書籍。 諡文忠, 道德博文文, 危身奉上忠。 叔舟娶贈領議政府事尹景淵之女, 生八子, 長澍先死, 次㴐咸吉道都觀察使, 遭李施愛之亂死之。 次澯 黃海道觀察使, 次瀞吏曹參判, 次浚兵曹參議, 瀞、浚皆參佐理功臣。 次溥, 次泂, 次泌。
【史臣曰: "叔舟夙有重望, 世宗嘗謂文宗曰: ‘叔舟可付國事者’, 遭遇世祖, 計行言聽, 世祖嘗曰: ‘卿是我之魏徵’, 每遇大事, 必咨之。 及上卽位, 輔養贊導之功爲多。 然事世祖務爲承順, 睿宗朝, 刑政失中, 而無所匡救, 此其短也。 恩眷方盛, 身遭縲絏之辱, 身歿未幾, 瀞亦見誅, 悲夫!"】
원본
성종 6년 (1475)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