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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2월 8일 임신 1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그대로 치사(致仕)한 황희(黃喜)가 졸(卒)하였다. 황희장수현(長水縣) 사람인데, 자(字)는 구부(懼夫)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이다. 출생해서 신기(神氣)가 보통 아이와 달랐는데, 고려(高麗) 말기에 과거(科擧)에 올라서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시매 선발되어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 감찰(司憲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어떤 일로써 경원 교수관(慶源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 태종(太宗)이 사직(社稷)을 안정시키니 다시 습유(拾遺)의 벼슬로써 불러 돌아왔는데, 어떤 일을 말하였다가 파면되었는데, 조금 후에 우보궐(右補闕)에 임명되었으나 또 말로써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파면되었다. 형조(刑曹)·예조(禮曹)·병조(兵曹)·이조(吏曹) 등 여러 조(曹)의 정랑(正郞)을 역임(歷任)하였다. 이때 박석명(朴錫命)이 지신사(知申事)로서 오랫동안 기밀(機密)을 관장(管掌)하고 있었는데, 여러 번 사면(辭免)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卿)이 경과 같은 사람을 천거해야만 그제야 대체(代遞)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박석명황희를 천거하여서 갑자기 도평의사 경력(都評議司經歷)과 병조 의랑(兵曹議郞)으로 천직(遷職)되었다. 그가 아버지 상사(喪事)를 만나니, 태종은 승추부(承樞府)가 군무(軍務)를 관장하고, 또 국가에 사고가 많은 이유로써 무관(武官)의 백일(百日)에 기복 출사(起復出仕)시키는 제도를 권도(權道)로 따르게 하여 대호군(大護軍)에 임명하고, 승추부 경력(承樞府經歷)을 겸무하게 하였다.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승진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좌부대언(左副代言)에 발탁되고 마침내 박석명(朴錫命)을 대신하여 지신사(知申事)에 임명되었다. 후하게 대우함이 비할 데가 없어서 기밀 사무(機密事務)를 오로지 다하고 있으니, 비록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임금을 뵙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러서 뵙도록 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나와 경(卿)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卿)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하였다. 훈구 대신(勳舊大臣)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그 간사함을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다. 이때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등이 권세(權勢)가 크게 성하여 종지(宗支)052) 를 모해(謀害)하니, 황희이숙번(李叔蕃)·이응(李膺)·조영무(趙英茂)·유양(柳亮) 등과 더불어 밀지(密旨)를 받아 이들을 도모하였는데,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만약 신중히 하여 빈틈이 없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더니, 여러 민씨(閔氏)들이 마침내 실패하였다. 무자년053)목인해(睦仁海)의 변고가 일어나니 황희가 마침 집에 있었으므로, 태종이 급히 황희를 불러 말하기를,

"평양군(平壤君)이 모반(謀反)하니, 계엄(戒嚴)하여 변고에 대비(待備)하라."

하였다. 황희가 아뢰기를,

"누구가 모주(謀主)입니까?"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조용(趙庸)이다."

하였다. 황희가 대답하기를,

"조용의 사람된 품이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弑害)하는 일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후에 평양군(平壤君)이 옥(獄)에 나아가므로 황희목인해(睦仁海)를 아울러 옥에 내려 대질(對質)하도록 청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는데, 과연 목인해의 계획이었다. 그 후에 김과(金科)가 죄를 얻으니, 조용(趙庸)도 또한 공사(供辭)054) 에 관련되었다. 태종이 대신(大臣)들을 모아 놓고 친히 분변하니 정직한 것이 조용에게 있었다. 태종황희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목인해의 변고에 경(卿)이 말하기를, ‘조용은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弑害)하는 짓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더니, 과연 그렇다."

하니, 조용이 비로소 그 말뜻을 알고 물러가서는 감격하여 능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기축년055) 가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발탁되고, 겨울에는 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발탁되었다. 다음해 3월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고 대사헌(大司憲)에 천직(遷職)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천직(遷職)되었다가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옮겨졌으나 병을 얻어 매우 위급하니, 태종이 내의(內醫) 김조(金慥)·조청(曹聽) 등에게 명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고, 안부(安否)를 물은 것이 하루에 3, 4번이나 이르게 되어 병이 나았었다. 태종김조(金慥) 등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니 참으로 재상(宰相)이다. 그대들이 능히 병을 치료했으니,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긴다."

하고는, 마침내 후하게 상을 주었다. 얼마 후에 어떤 일로써 파면되었다가 을미년056) 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으며,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과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歷任)하고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신년057) 에 세자(世子) 이제(李禔)가 덕망을 잃어서, 태종황희이원(李原)을 불러서 세자(世子)의 무례(無禮)한 실상을 말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세자(世子)는 경솔히 변동시킬 수 없다고 여겨, 이에 아뢰기를,

"세자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된 것이니, 큰 과실은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황희가 일찍이 여러 민씨(閔氏)들을 제거할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세자에게 붙어서 민씨의 원한을 풀어주고 후일의 터전을 삼으려 한다는 이유로써 크게 성내어 점점 멀리 하여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하였다가 다음해에는 평안도 도순문사(平安道都巡問使)로 내보내었다. 무술년058) 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불러서 돌아왔으나, 세자가 폐위(廢位)되니 황희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교하(交河)에 폄출(貶黜)시키고는 모자(母子)를 함께 거처하도록 허가하였다. 대신(大臣)과 대간(臺諫)들이 죄 주기를 청하여 그치지 않으니, 태종황희의 생질(甥姪) 오치선(吳致善)을 폄소(貶所)에 보내어 말하기를,

"경(卿)은 비록 공신(功臣)이 아니지마는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므로,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 보아서 하루라도 나의 좌우에서 떠나 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 대신(大臣)과 대간(臺諫)들이 경(卿)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양경(兩京)059) 사이에는 거처시킬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경(卿)을 경의 향관(鄕貫)인 남원(南原)에 옮겨 두니, 경(卿)은 어미와 더불어 편리할대로 함께 가라."

하고는, 또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압송(押送)하지 말도록 하였다. 오치선(吳致善)이 복명(復命)하므로,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오치선이 아뢰기를,

"황희의 말이, ‘살가죽과 뼈는 부모(父母)가 이를 낳으셨지마는, 의식(衣食)과 복종(僕從)은 모두 성상의 은덕이니, 신(臣)이 어찌 감히 은덕을 배반하겠는가? 실상 다른 마음은 없었다.’고 하면서, 마침내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니, 태종이,

"이미 시행하였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였다. 황희남원(南原)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고 빈객(賓客)을 사절(謝絶)하니 비록 동년(同年) 친구일지라도 그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태종이 그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서 임인년060) 2월에 불러서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다. 황희태종을 알현(謁見)하고 사은(謝恩)하니, 세종(世宗)이 곁에 뫼시고 있었다.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풍양(豊壤)061) 에 있을 적에 매양 경(卿)의 일을 주상(主上)062) 에게 말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경(卿)이 서울에 오는 날이로다."

하고는, 명하여 후하게 대접하도록 하고,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돌려주게 하고, 세종(世宗)에게 부탁하여 임용하도록 하였다. 10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명되고, 예조 판서에 전직(轉職)되었다. 강원도(江原道)에서 기근(饑饉)이 있었는데, 관찰사(觀察使) 이명덕(李明德)이 구황(救荒)의 계책을 잘못 썼으므로 황희로써 이를 대체(代遞)시켰더니, 황희가 마음을 다하여 진휼(賑恤)하였다. 세종(世宗)이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우군 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승진 임명하고 그대로 관찰사(觀察使)로 삼았다. 다음해 6월에 불러 와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에 임명하고 대사헌(大司憲)을 겸무하게 하였으며, 이조 판서로 천직(遷職) 하였다가 마침내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무하게 하였다. 세종이 어느 날 황희를 불러 일을 의논하다가, 황희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폄소(貶所)에 있을 적에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의 사단(史丹)063) 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셨다."

하고는, 좌의정(左議政)과 세자사(世子師)에 승진시켰다. 황희평안도(平安道)의 순문사(巡問使)가 되었을 적에 행대(行臺)064) 이장손(李長孫)이 대등(對等)한 예(禮)로써 황희를 모욕하고, 황희와 더불어 서로 글장을 올려 논핵(論覈)하므로 태종(太宗)이 양편을 화해(和解)시켰었는데, 후에 황희가 정권을 잡으니 이장손(李長孫)은 통진 수령(通津守令)으로서 교대(交代)를 당하게 되었다. 황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名聲)이 있었다."

하고는, 천거하여 헌납(獻納)으로 삼았고, 또 천거하여 사인(舍人)으로 삼았었다. 황희는 어머니 상사(喪事)를 당하여 불사(佛事)를 행하지 않고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때마침 임금이, 세자(世子)를 장차 북경(北京)에 입조(入朝)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황희를 기복(起復)시켜 보행(輔行)065) 을 삼으려고 하므로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황희가 동파 역리(東坡 驛吏)의 뇌물 주는 것을 받았다고 탄핵하므로 황희가 또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겨울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가 되어 약산(藥山)의 성터[城基]를 정했는데, 황희약산(藥山)이 요충(要衝)에 있으므로 영변 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를 설치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황희가 하혈(下血)하는 병을 앓아 치료하기가 어렵게 되자 세종은 내의(內醫) 노중례(盧重禮)를 보내어 포백(布帛)을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서 명의(名醫)에게 묻도록 하였다. 경술년066) 12월에 태석균(太石鈞)의 일로써 파면되었으나, 신해년067) 9월에 이르러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임명되었다. 임자년068) 에는 나이 70세가 되자 전문(箋文)을 올려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있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또 겨울 날씨가 따뜻하고 얼음이 얼지 않아, 음양(陰陽)을 조화시키는 직책에 면목(面目)이 없다는 이유로써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무오년069) 겨울에는 또 천둥이 일어난 변고로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신유년070) 에는 세종께서 황희가 연로하니, 다만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朝會)하도록 명하니, 황희가 파직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계해년071) 겨울에 또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을축년072) 에는 또 큰 일 외에 보통 행하는 서무(庶務)는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기사년073) 에 본직(本職)으로써 치사(致仕)하니, 명하여 2품의 봉록(俸祿)을 주어 그 평생을 마치도록 하고,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가서 묻도록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단치 않은 병으로 졸(卒)하니, 조회를 3일동안 폐지하고 관청에서 장사(葬事)를 다스렸다. 조정과 민간에서 놀라 탄식하여 서로 조문(弔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이서(吏胥)와 여러 관사(官司)의 복례(僕隷)들도 모두 전(奠)을 베풀어 제사를 지냈으니,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었다. 일찍이 유서(遺書)를 지어 자손(子孫)들에게 보이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상장(喪葬)의 예절은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하되, 본토(本土)에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능력과 분수의 미치는 대로 집의 형세(形勢)에 따라 알맞게 할 뿐이며, 허식(虛飾)의 일은 일체 행하지말라. 가례(家禮)의 음식(飮食)에 관한 절차는 질병(疾病)을 초래할까 염려되니, 존장(尊長)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죽을 먹도록 하라. 이미 시행한 가법(家法)에 따라 불사(佛事)는 행하지 말고, 빈소(殯所)에 있은 지 7일 동안은 요전(澆奠)074) 하는 것은 《가례(家禮)》에 없는 바인데, 부처에게 아첨하는 사람이 꾀를 내어 사사로이 하는 것이니 행할 수 없다."

하였다.

황희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豊厚)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이 중년(中年) 이후에는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니, 황희는 생각하기를,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

하고,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으니, 비록 다 따르지 않았으나,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으므로 옛날 대신(大臣)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옥사(獄事)를 의정(議定)할 적에는 관용(寬容)으로써 주견(主見)을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차라리 형벌을 경(輕)하게 하여 실수할지언정 억울한 형벌을 할 수는 없다."

하였다. 비록 늙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 시력(視力)을 기르고, 비록 잔 글자라도 또한 읽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재상(宰相)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늙었는데도 기력(氣力)이 강건(剛健)하여 홍안 백발(紅顔白髮)을 바라다보면 신선(神仙)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송(宋)나라 문 노공(文潞公)075) 에 비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簠簋]는 비난이 있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076) 에서 나왔다고 글을 올려 변명하여 구(救)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 주려고 하여 또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여 조(趙)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졸(卒)한 지 5일 만에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강맹경(姜孟卿)을 보내어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기를,

"황희세종(世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허후(許詡) 등이 아뢰기를,

"황희는 수상(首相)이 된 지 20여년 동안에 비록 전쟁에서 세운 공로[汗馬之勞]는 없지마는, 임금을 보좌한 공로는 매우 커서 대신(大臣)의 체통(體統)을 얻었으니 선왕(先王)에게 배향(配享)시킨다면 사람들의 청문(聽聞)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시키게 하고 익성(翼成)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翼)이고 재상(宰相)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아들은 황치신(黃致身)·황보신(黃保身)·황수신(黃守身)이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62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

  • [註 052]
    종지(宗支) : 종파와 지파.
  • [註 053]
    무자년 : 1408 태종 9년.
  • [註 054]
    공사(供辭) :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
  • [註 055]
    기축년 : 1409 태종 9년.
  • [註 056]
    을미년 : 1415 태종 15년.
  • [註 057]
    병신년 : 1416 태종 16년.
  • [註 058]
    무술년 : 1418 태종 18년.
  • [註 059]
    양경(兩京) : 한성(漢城)과 개성(開城).
  • [註 060]
    임인년 : 1422 세종 4년.
  • [註 061]
    풍양(豊壤) : 이궁(離宮)이 있는 곳.
  • [註 062]
    주상(主上) : 세종(世宗).
  • [註 063]
    사단(史丹) : 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으로 있던 명신(名臣).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으로 후사를 삼고자 하므로, 사단(史丹)이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아니하였음.
  • [註 064]
    행대(行臺) : 행대 감찰(行臺監察).
  • [註 065]
    보행(輔行) : 세자의 행차를 보좌하는 임무.
  • [註 066]
    경술년 : 1430 세종 12년.
  • [註 067]
    신해년 : 1431 세종 13년.
  • [註 068]
    임자년 : 1432 세종 14년.
  • [註 069]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 [註 070]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071]
    계해년 : 1443 세종 25년.
  • [註 072]
    을축년 : 1445년 세종 27년.
  • [註 073]
    기사년 : 1449 세종 31년.
  • [註 074]
    요전(澆奠) : 산소에 차려 놓은 제물(祭物).
  • [註 075]
    문 노공(文潞公) : 문언박(文彦博).
  • [註 076]
    풍문(風聞) : 관리의 부정(不正)이나 부녀자의 비행(非行)을 소문만 듣고 대간(臺諫)에서 사실을 조사하던 일. 폐단이 많았으므로 나라에서 국법으로 금지하였음. 풍문 공사(風聞公事).

○壬申/領議政府事, 仍令致仕黃喜卒。 長水縣人, 字懼夫, 判江陵府事君瑞之子。 生而神氣, 異凡兒, 高麗末登第, 補成均學官。 我太祖開國, 被選兼世子右正字, 俄直藝文春秋館, 轉司憲監察右拾遺, 以事貶慶源敎授官。 太宗定社, 復以拾遺召還, 以言事罷, 尋拜右補闕, 又以言忤旨罷。 歷刑、禮、兵、吏諸曹正郞。 時朴錫命, 以知申事, 久掌機密, 屢請免, 太宗曰: "卿進如卿者乃可代。" 錫命薦, 驟遷都評議司經歷兵曹議郞。 其丁父憂也, 太宗以承樞府掌軍務, 且國家多故, 權從武官百日起復之制, 除大護軍, 兼承樞府經歷。 陞右司諫大夫, 未幾擢左副代言, 遂代錫命知申事。 眷待無比, 專摠機務, 雖一二日不見, 必召賜見。 嘗曰: "此事予與卿獨知之, 若泄非卿卽予。" 勳舊大臣不悅, 或有言其奸者。 時閔無咎無疾等, 權勢大熾, 謀害宗支, 李叔蕃李膺趙英茂柳亮等, 承密旨圖之, 太宗嘗謂曰: "若不愼密, 噬臍無及。" 諸竟敗。 戊子睦仁海之變作, 適在家, 太宗急召曰: "平壤君謀反, 戒嚴待變。" 曰: "誰爲謀主?" 太宗曰: "趙庸也。" 對曰: "之爲人, 弑父與君, 必不爲也。" 及平壤就獄, 請幷下仁海獄置對, 太宗從之, 果仁海之謀也。 其後金科得罪, 亦辭連。 太宗會大臣, 親辨之, 直在太宗曰: "昔仁海之變, 卿云: ‘趙庸弑父與君, 必不爲也。’ 果然矣。" 始知其言, 退而感激, 不能言。 己丑秋, 擢嘉靖參知議政府事, 冬又擢刑曹判書。 明年三月, 知議政府事, 遷大司憲。 又明年, 遷兵曹判書, 移禮曹判書, 得疾甚劇, 太宗命內醫金慥曺聽等治疾, 問候者日至三四, 病愈。 太宗等曰: "此人忠直宰相也。 汝輩能療治, 予甚喜焉。" 遂厚賞之。 尋以事罷, 乙未拜吏曹判書, 歷議政府參贊、戶曹判書, 復拜吏曹判書。 丙申世子失德, 太宗李原, 言世子無禮狀, 以爲國儲不可輕動, 乃曰: "世子年少致然, 非大過也。" 太宗嘗主議除諸, 欲附世子, 解冤閔氏, 爲後日地, 大怒浸踈之, 除工曹判書, 明年出爲平安道都巡問使。 戊戌以判漢城府事召還, 及世子廢, 廢爲庶人, 貶于交河, 許母子同居。 大臣、臺諫請罪不已, 太宗吳致善于貶所曰: "卿雖非功臣, 予待以功臣, 一二日不見, 則必召見之, 不欲使一日離左右, 今大臣、臺諫, 請卿罪, 以爲不可居兩京間。 故移置卿鄕貫南原, 卿其與母, 任便俱往。" 又命憲府, 勿押行。 致善復命, 太宗問: "何言?" 致善啓: "言: ‘皮骨則父母生之, 衣食僕從, 皆上恩, 臣敢背德? 實無他心。’ 遂涕泣罔知所爲。" 太宗曰: "業已行之, 無及也。" 南原, 杜門謝客, 雖同年親舊, 罕得見其面。 太宗知其非實, 壬寅二月, 召還京師。 太宗謝恩, 世宗侍側。 太宗曰: "予在豊壤, 每言卿事於主上, 今日乃卿來京之日也。" 命厚饋之, 還給科田告身, 囑世宗用之。 十月拜議政府參贊, 轉禮曹判書。 江原道饑, 觀察使李明德, 救荒失策, 以代之, 盡心賑恤。 世宗嘉之, 進拜崇政判右軍都摠制府事, 仍爲觀察使。 明年六月, 徵拜議政府贊成兼大司憲, 遷吏曹判書, 遂拜議政府右議政兼判兵曹事。 世宗一日召議事, 謂曰: "卿之在貶也, 太宗嘗謂予曰: ‘黃喜史丹, 有何罪焉?" 陞左議政世子師。 之巡問平安也, 行臺李長孫抗禮辱, 與互上章論覈, 太宗兩和之, 及執政, 長孫通津守當代。 曰: "此人居官有聲。" 薦爲獻納, 又薦爲舍人。 丁母憂, 不作佛事, 一從家禮。 適上以世子, 將朝京, 起爲輔行, 再三辭, 不允。 憲府劾東坡驛吏賂遺, 又辭, 不允。 冬爲平安道都體察使, 定藥山城基, 藥山在要衝, 置寧邊大都護府, 爲都節制使本營。 患下血難治, 世宗遣內醫盧重禮, 齎布往遼東, 問于名醫。 庚戌十二月, 以太石鈞之事罷, 辛亥九月, 起拜領議政府事。 壬子以年滿七十, 上箋乞退, 不允, 賜几杖。 又以冬暖無氷, 爕理無狀, 辭不允。 戊午冬, 又以雷變, 辭不允。 辛酉, 世宗老, 命只朝朔望, 乞罷, 不允。 癸亥冬, 又乞骸, 不允。 乙丑, 又命大事外, 常行庶務, 勿以相煩。 己巳以本職致仕, 命給二品祿, 以終其身, 國有大事, 則就而問之。 至是以微恙卒, 輟朝三日, 官庀葬事。 朝野莫不驚歎相弔, 吏胥及諸司僕隷, 皆設奠以祭, 前古所無也。 嘗作遺書, 示子孫曰: "吾死之後, 喪葬之禮, 一依《家禮》, 若本土難行之事, 不必强從。 力分所及, 稱家有無而已, 虛文之事, 一切勿行。 《家禮》飮食一節, 恐致疾病, 不待尊長之命, 勉强食粥。 依已行家法, 不作佛事, 在殯七日澆奠, 《家禮》所無, 侫佛者用智自私, 不可行。" 寬厚沈重, 有宰相識度, 豐姿魁偉, 聰明絶人。 治家儉素, 喜怒不形, 論事正大, 務存大體, 不喜煩更。 世宗中年以後, 多立新制, 以爲: "祖宗舊制, 不可輕變。" 獨駁議, 雖不能盡從, 多所止遏, 有古大臣風議。 獄以寬爲主, 嘗謂人曰: "寧失於輕, 不可枉刑。" 雖老手不釋卷, 常互閉一眼, 以養目力, 雖細字亦讀之不憚。 爲相二十四年, 中外仰望, 皆曰: ‘賢宰相也。’ 老而氣力剛健, 紅顔白髮, 望之如神仙, 世比文潞公云。 然性過於寬, 短於齊家, 乏廉介之操, 久典政柄, 頗有簠簋之誚。 妻兄弟楊修楊治不法事發, 以出於風聞, 上書營救。 又欲易其子致身沒官科田, 亦上書請之。 又以黃仲生者爲孽子, 出入於家, 及仲生犯死罪, 乃以爲非己子, 變姓爲, 人多惜之。 卒之五日, 上遣都承旨姜孟卿, 議于政府曰: "欲以配享世宗廟庭, 何如?" 金宗瑞鄭苯許詡等曰: "爲首相二十餘年, 雖無汗馬之勞, 贊襄之功甚大, 得大臣體, 配享先王, 足人聽聞。" 命配享世宗廟庭, 謚翼成: 思慮深遠翼, 爲相克終成。 子致身保身守身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62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