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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1월 18일 임자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친히 하천의 제방과 관개의 긴요함에 대한 유서를 지어 내리다

임금이 친히 유서(諭書)를 지어 황해도·평안도 감사(黃海道平安道監司)에게 내리기를,

"내가 들으니, 중국은 관개(灌漑)를 성(盛)하게 이용하는데, 흔히 수차(水車)로써 성공을 거두는 예가 많다고 한다. 또 들으니, 왜(倭)나라에서도 또한 관개(灌漑)를 이용하므로, 그 때문에 비록 조그마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있어도 실농(失農)함이 적으니 백성의 식량이 항상 넉넉하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그전부터 또한 하천(河川)의 제방(堤防)에 물을 저장하는 것이 많이 있었으나 이익을 줄 만한 곳이 많은 까닭에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만나면 백성이 흩어져 유망(流亡)한다. 선왕(先王)께서 이를 염려하여 수차(水車)1568) 의 법(法)을 세웠다. 그러나 본국(本國)은 토양(土壤)의 성분이 푸석하여 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수차의 법은 마침내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여 보니, 천지(天地) 사이에는 생의(生意)가 널리 행(行)하여, 비는 적시어 주고 해는 말리어 주는 것이 자상(仔詳)하고 은근하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크지만 반드시 유감이 있어서 혹은 큰 물을 내기도하고 혹은 가뭄을 일으키기도 하여 인위(人爲)와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반드시 사람에게 손을 벌리어서 사람이 능히 재량하여 만들고 도와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극진히 하고서 하늘에 기대하면 천은(天恩)을 바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왕(先王)이 수차(水車)에 유의(留意)하시던 뜻을 생각하고 또 금년에는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므로, 밤낮으로 뜻을 계승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이 되는 소이를 생각하니, 일로서는 하천의 제방과 관개와 같이 급한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 나라는 개벽(開闢)한 이래 나라를 세운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만약 관개할 만한 곳이 있었으면 옛날 사람들이 이미 다하여 지금은 반드시 새로 이용할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일찍이 이미 경기(京畿)에 제방한 곳을 시험하였으나 모두 물 때문에 무너져서 단지 백성의 노력만을 허비하고 결국 이익되는 바는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옛 사람들이 모두 다 이미 하였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두지 않는다면, 즉 면화(綿花) 같은 것도 우리 나라에서 심은 것이 이제 오래 되지 아니하고, 화약(火藥)이 그 이용을 자세하고 극진하게 한 것은 을축년1569) 부터였다. 이 같은 부류(部類)가 하나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말과 같다면 이 같은 일들은 모두 오늘날에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경기(京畿)에 시험하였으나 이익이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대개 또한 사람의 한 일이 미진한 것이지 어찌 하천(河川) 제방(堤防)의 죄이겠는가? 무릇 수리(水利)를 다스리는 것은 옛날부터 어렵게 여겼다. 요(堯)임금 때에 곤(鯀)1570) 이 공적(功績)을 쌓았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징계하고, 다시 대우(大禹)1571) 를 임용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중민(衆民)이 어찌 쌀밥을 먹는 공이 있었겠느냐? 지금은 다만 인력의 다소와 물[水]을 쓸 만한지의 여부를 논하여 그 경중(輕重)과 이해(利害)를 살필 뿐이요, 그 방축(防築)이 견고한지의 여부는 사람이 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체 동에서도 할 수 있고 서에서도 할 수 있으며, 별로 커다란 폐단이 없는 일이라면 마땅히 옛날의 관례대로 하고 고쳐 만들 필요는 없으나 농사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삼도(下三道) 같은 곳은 본래 수전이 많고 민속(民俗)도 농사에 힘쓰니 이제 고치어 확장하지 않더라도 또한 가(可)하다고 하겠으나, 평안도·황해도는 근년에 계속하여 흉년이 들어서 태반(太半)이 유망(流亡)하니, 만약에 구제할 만한 일만 있다면 마땅히 급급하게 하여야 할 일이지 어찌 늦출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모든 농사는 물이 나면 한전(旱田)이 상하고 가물면 수전이 상하는데, 수재(水災)의 피해는 구할 도리가 없지만, 한재(旱災)의 피해는 하천을 제방하고 물을 저장하여서 구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병인년1572) ·정묘년1573) 간에 평안도황해도에 기근(飢饉)이 더욱 심하였던 것은 수전을 만든 곳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금년에도 두 도는 또한 실농(失農)하는 데 이르렀으나 수전을 만든 곳은 아주 심한 데에 이르지는 아니하였다. 이것이 내가 관개에 급급하고 수전을 만드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소탈한 선비 한두 사람을 택하여 수리의 책임을 오로지 위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춘추(春秋)로 순찰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순순(諄諄)히 수전의 이익을 가르치고 타이르며 백성들의 진정한 바람에 따라 혹은 하천을 막기도 하고, 혹은 못을 파기도 하여 혹은 진펄[沮洳]에 샘이 있는 땅을 개간하게 한다. 이와 같으면 새로 개간한 첫해에는 비록 결실이 무성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수년 뒤에는 이익을 얻는 것이 자연히 배나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백성들이 만약 떨쳐 일어나서 새로운 수전을 많이 개간할 때 첫해와 2년에는 그 세(稅)를 전면(全免)하고, 3년째와 4년째에는 그 조세를 반납(半納)하게 하고, 5년째 뒤에는 그 전량의 조세를 거두면 대체로 또한 백성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도의 감사에게 유서(諭書)를 내려서 수전을 권장하여 만들게 하면 됩니다.’ 하나, 내가 다시 이를 생각해 보니, 과연 대신들의 의논과 같이 바야흐로 민간에 일이 많고, 또 사람을 보내어 새 일을 일으킨다면 고식적(姑息的)인 백성들은 먼날의 이익을 헤아리지 못하고 시끄럽게 수심과 원망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니, 그 도(道)에는 진펄[沮洳]의 땅이 많이 있지만 수전 만드는 일을 백성들이 기꺼이 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경은 이 뜻을 알고, 나의 뜻을 가지고 두루 촌백성들을 깨우쳐 주고, 인도하기를 이익으로서 한다면 그 중에 아는 백성이 있어서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이에 응할 자가 있을 것이다. 경은 찾아서 묻고 그들과 논의하여 수전을 많이 만들되, 혹은 샘이 있는 곳에 의거하고, 혹은 하천과 못을 막아서 민력(民力)에 해롭게 하지 말고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지 말고, 이 일을 한다면 반드시 견고하게 할 것이요, 그 수세(水勢)로 하여금 스밀것은 스미게 하고, 저수(貯水)할 것은 저수하게 하여, 모름지기 타인으로 하여금 간언(間言)이 없게 하라.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하천은 모두 험하고 커서 막을 수 없다.’ 하니, 경은 이 뜻을 아울러 알고, 마음을 다하여 포치(布置)를 적당하게 하고, 행할 만한지의 여부와 민정이 원하고 싫어하는지를 추후에 자세하게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54면
  • 【분류】
    농업-농업기술(農業技術) /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재정-전세(田稅)

  • [註 1568]
    수차(水車) : 물을 대는 기구의 하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관개(灌漑)에 이를 써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실패하였음.
  • [註 1569]
    을축년 : 1445 세종 27년.
  • [註 1570]
    곤(鯀) : 우(禹)의 아버지. 요(堯)·순(舜) 때 9년이나 황하를 다스렸음.
  • [註 1571]
    대우(大禹) : 우(禹)임금. 하(夏)나라의 시조.
  • [註 1572]
    병인년 : 1446 세종 28년.
  • [註 1573]
    정묘년 : 1447 세종 29년.

○上親製諭書, 下黃海平安道監司曰:

予聞, 中國盛用灌漑, 多以水車爲功。 又聞, 邦亦利灌漑, 以故雖小有水旱, 鮮有失農, 民食恒足。 我國自來, 亦多有川防貯水, 而遺利之處多, 故若遇水旱, 民散流亡。 先王念此, 立水車之法。 然本國土性浮踈, 不能載水, 故水車之法, 終不見利。 予嘗思之, 天地之間, 生意流行, 雨潤日烜, 委曲慇懃。 然天地之大, 必有所憾, 或澇或旱, 不如人爲。 故天必假手于人, 而人能栽成輔相, 然後事以成焉。 故盡人之爲以待天, 則天恩可以望矣。 故予念先王留心水車之志, 且遇今年北道民生之艱, 日夜思所以繼志, 救民之術, 莫若事於川防灌漑之爲急。 或者以爲: ‘我國自開闢以來, 立國已久, 若有可以灌漑之處, 則古之人已爲之, 今必無新利之處。 且嘗已驗於京畿所防之處, 皆爲水所毁, 但費民力, 終無所利。’ 予則以爲不然。 若以爲古人皆已爲之, 不復致慮, 則如綿花之種於我國, 今不久矣, 火藥之精盡其利, 在於乙丑。 如此之類非一。 若如或人之說, 則如此等事, 皆不得利用於今日。 至於驗之京畿, 而不利者, 蓋亦人事之未盡, 豈川防之罪哉? 凡治水利, 自古爲難。 當之時, 懲於之績用不成, 不復更任大, 則天下蒸民, 豈有粒食之功哉? 今但當論人力之多少, 水之可用與否, 審其輕重利害而已, 其防築之牢固與否, 在人爲之如何。 大抵可東可西, 別無巨弊之事, 則當仍舊貫, 不必改作, 若農務則不可緩也。 如下三道, 則本多水田, 民俗力農, 今不更張, 亦云可也, 平安黃海道, 則近來連荒, 太半流亡, 若有可救之事, 則當急急爲之, 何可緩也? 大凡農事, 水則旱田傷, 旱則水田傷, 而水災之害, 無有救理, 旱災之害, 川防貯水, 可能救之。 故丙寅、丁卯年間, 平安黃海道, 饑饉尤甚, 水田之處少故也。 至於今年, 兩道亦失農, 而水田之處, 不至太甚。 此予所以汲汲於灌漑, 而作水田也。 故予欲擇勤敏寬簡之士一二人, 專委水利之任。 春秋巡省, 勸民農桑, 諄諄敎諭, 水田之利, 因民情願, 或防川或築淵, 或墾沮洳有泉之地。 如此則新墾初年, 雖不秀實, 數年之後, 得利自倍。 如此而民若興起, 多墾新水田, 則初年二年, 全免其稅, 三年四年, 半納其租, 五年之後, 乃收其全租, 則蓋亦救民之一術也。 予以此意, 議諸大臣, 僉曰: ‘不必遣人。 下諭其道監司, 勸作水田可也。’ 予更思之, 果若大臣之論, 方今民間多事, 而又遣人興作新事, 姑息之民, 不計遠利, 騷然愁怨, 故寖其事。 然詮聞, 其道多有沮洳之地, 而作水田之事, 民不肯爲, 卿知此意, 以予之意, 徧曉村民, 導之以利, 則其中有知之民, 必有相率而應者。 卿可與訪問論議, 多作水田, 或因有泉, 或防川澤, 不害民力, 不起民怨爲之, 則必使堅固, 使其水勢, 可以洩可以蓄, 須使他人, 無有間言。 或者又以爲: ‘平安道川, 皆險大, 不可防之。’ 卿其幷悉此意, 盡心布置, 得宜可行與否, 民情願厭, 隨後詳悉啓達。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54면
  • 【분류】
    농업-농업기술(農業技術) /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재정-전세(田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