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 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좌찬성(左贊成) 박종우(朴從愚)·우찬성(右贊成)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을 불러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에게 명령하여 의논하게 하기를,
"대행왕(大行王)께서 병인년220) 부터 비로소 신미(信眉)의 이름을 들으셨었는데, 금년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精勤)221) 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優待)하신 것은 경(卿)들이 아는 바이다. 전일에 현등사(懸燈寺)에 거주할 적에 의금부(義禁府)에서 설정(雪正)과 도명(道明)을 체포하는 일 때문에 군사를 내어 몹시 놀라게 하였으며, 또 청계사(淸溪寺)에 거주할 때에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영구(李英耉)가 또한 이 중을 잡으려고 군사를 내어 몹시 놀라게 하였으니, 이영구는 진실로 잡아다가 죄상(罪狀)을 심문해야 되겠지마는, 지금 아직 이를 정지하게 한다. 신미(信眉)는 평소부터 질병이 있는데 어떻게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거주하게 하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현등사(懸燈寺)에서 군사를 내어 중을 잡게 하였으며, 청계사(淸溪寺)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한 것은 사세(事勢)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마음을 두고서 이를 한 것이겠습니까? 그의 거주하는 곳에 따라 그 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보살펴 주고 구휼(救恤)하게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신미(信眉)에게 판선교종(判禪敎宗)을 제수(除授)하려고 하여 일의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마침 신미(信眉)가 질병이 있어 그대로 되지 못하였으니, 금일에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각처(各處)에서 정근(精勤)하고 기와를 굽는 중들에게도 또한 금일에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아뢰기를,
"이것은 기한에 맞추어 할 일이 아니니, 졸곡(卒哭) 후에 관직을 제수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미(信眉)에게 관직을 제수(除授)하는 것은 선왕(先王)께서 외신(外臣)222) 에게 명령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아직 이를 정지하겠는데, 정근(精勤)한 중에게는 금일에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이 덕수궁(德壽宮)223) ·인덕궁(仁德宮)224) 양궁을 한 곳에 모아서 모시고자 하였으니, 지금 한 곳에 모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신빈 김씨(愼嬪金氏)가 영응 대군(永膺大君)에게는 유모(乳母)와 같았으므로, 대행왕께서 한 집안에 함께 거처하기를 명하였으니,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매, 하연(河演)은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함께 거처하게 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등은 아뢰기를,
"명호(名號)225) 가 지극히 중대한데, 이것은 곧 사사집[私第]이므로 마땅히 함께 거처할 수가 없으며, 또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자손(子孫)들이 번성하여 펴진다면 더욱 옳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연은 또 아뢰기를,
"신빈(愼嬪)의 자손(子孫)들이 이 집에 드나드는 것도 또한 불편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를 알고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29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상-불교(佛敎) /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 [註 220]병인년 : 1446 세종 28년.
- [註 221]
정근(精勤) :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빔.- [註 222]
외신(外臣) : 임금이 자기 자신을 일컫는 말, 또는 신하가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 [註 223]
○上召領議政河演、左議政皇甫仁、右議政南智、左贊成朴從愚、右贊成金宗瑞、左參贊鄭苯、右參贊鄭甲孫, 令都承旨李思哲議曰: "大行王, 自丙寅年始知信眉名, 今年移御孝寧第, 精勤之時, 接見優待, 卿等所知也。 前住懸燈寺, 義禁府以捕雪正、道明, 發軍驚駭, 又住淸溪寺, 廣州判官李英耉, 亦捕此僧, 發軍驚駭, 英耉固宜拿問, 今姑停之。 信眉素有疾, 病何以使之安心住在?" 僉議啓曰: "懸燈寺發軍捕僧, 淸溪寺亦如之, 事勢適然, 豈有心而爲之? 隨其住處, 令其道監司, 存恤爲便。" 又議曰: "先王欲以信眉, 判禪敎宗, 事計已定, 適信眉有疾未遂, 今日除授何如? 且各處精勤及燔瓦僧, 亦於今日, 授職何如?" 僉曰: "此非及期事, 卒哭後除授未晩。" 上曰: "信眉授職, 先王不命于外臣, 今姑停之, 精勤僧, 今日授職何如?" 僉曰: "然。" 又議曰: "大行王, 欲令德壽、仁德兩宮, 會居一處, 今令會處何如?" 僉曰: "然。" 又議曰: "愼嬪 金氏於永膺, 有同乳母, 大行王命同居一家。 卿等之議何如?" 演曰: "先王之志如此, 同居爲便。" 仁等曰: "名號至重, 此乃私第, 不宜同居。 且永膺子孫蕃衍則, 尤爲不可。" 演又曰: "愼嬪子孫, 出入此家亦不便。" 上曰: "予已知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29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상-불교(佛敎) /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 [註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