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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연안 도호부 우봉현

지리지 / 황해도 / 연안 도호부 / 우봉현

우봉현(牛峯縣)

본래 고구려우잠군(牛岑郡)인데, 【우령(牛嶺)이라 하기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 하기도 한다. 】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현종(顯宗) 9년에 평주(平州) 임내에 붙였고,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 개성부(開城府)에 직속시켰다가, 예종(睿宗)병술301) 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을해(乙亥)302) 에 현령관(縣令官)으로 고쳤다. 별호는 삼주(三州)이다.

구룡산(九龍山) 【현의 남쪽에 있는데, 고려 국조(高麗國祖) 성골 장군 호경 대왕(聖骨將軍虎景大王)의 사당이 있으므로 성거산(聖居山)이라 한다. 혹은 이르기를, "신라 때 도(道)를 깨달은 중 의상(義相)이 살고 있었으므로 산 이름을 ‘성거’라 하였다." 하고, 또 호경(虎景)이 사냥꾼 9사람으로 더불어 이 산에 들어가 짐승을 잡다가, 마침 해가 저물어 바윗굴에 들어가 자는데, 별안간 호랑이가 굴앞에 이르러 크게 소리지르니, 9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 먹으려 하니,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제 운에 맞는 자가 있으리니, 각기 갓을 호랑이 앞에 던져, 호랑이가 무는 것이 곧 그 사람이다." 하고, 모두 〈갓을〉 호랑이 앞에 던졌는데, 호랑이가 마침내 호경의 갓을 물었다. 호경이 곧 나가 호랑이와 싸우려 하는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서, 9사람이 모두 치어죽고, 호경만 혼자 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구룡’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지내게 한다. 】 원중포(源中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토산(兎山) 비라천(非羅川)에 이르기 25리, 서쪽으로 평산(平山)에 이르기 25리, 남쪽으로 송림(松林)에 이르기 65리, 북쪽으로 신은(新恩) 원적천(原積川)에 이르기 55리다.

호수가 7백 78호요, 인구가 2천 1백 8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백 17명이요, 영진군이 45명이요, 선군이 1백 13명이다.

토성(土姓)이 1이니, 이(李)요, 망성(亡姓)이 3이니, 최(崔)·황(黃)·태(太)요, 속성(續城)이 2이니, 김(金)·박(朴)이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

땅이 메마르고 산이 높으며, 풍속이 산전(山田)을 일구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힘쓴다. 간전(墾田)이 6천 8백 20결이요, 【논이 겨우 55결이다. 】 토의는 기장·피·콩·보리·조·수수·팥·메밀·잇·참깨·삼이다. 토공은 노루가죽·사슴가죽·삵괭이가죽·꿀·밀[黃蠟]·종이·칠(漆)·지초·느타리·애끼찌[弓幹木]이요, 약재는 승검초뿌리·삿갓나물·북나무진[安息香]·삽주덩이뿌리[白朮] 【가장 좋다. 】 ·검산풀뿌리·대추·가위톱[白莢]이다. 석철(石鐵)이 현의 서쪽 10리 구시산(仇時山) 및 13리 관음점(觀音岾)에서 난다. 【시우쇠로 불려서 바친다. 】 청색 여석(靑色蠣石) 【현의 북쪽 25리 별아압현(別兒鴨峴)에서 난다. 】 참(站)이 1이니, 흥의(興義)이다. 【옛 이름은 연파(延波)인데, 〈고려〉 현종(顯宗) 10년에 원수(元帥) 강감찬(姜邯贊) 등이 글안 군사를 몰아내고 돌아올 때, 왕이 이 역에 거둥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영접하고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

이상한 일[靈異]. 박연(朴淵) 【이규보(李奎報)가 이르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자가 있어, 피리를 못 위에서 부니, 용녀(龍女)가 감동하여, 그 남편을 죽이고 〈박 진사를〉 데려다 남편을 삼았으므로, 박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위·아래 못이 있는데, 모두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개성(開城)의 한우물[大井]과 임진(臨津)의 덕진(德津)과 함께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하여, 가물 때 비를 빌면 응험이 있으므로, 지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위 못 가운데 반석(盤石)이 있는데, 일을 좋아하는 이들이 간혹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구경한다. 고려 문종(文宗)이 일찍이 그 〈반석〉 위에 올랐는데, 별안간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며, 반석이 진동하여, 문종이 〈몹시〉 놀랐다. 담양(潭陽) 사람 이영간(李靈幹)이 모시고 있다가, 칙서(勅書)를 지어 못에 던지고, 용의 죄를 들어 꾸짖으니, 용이 감동하여 그 등[脊]을 드러내매, 〈영간이〉 장(杖)으로 치니, 못물이 모두 붉어졌다 한다. 폭포가 있어서 아래 못으로 날아 흐르는데, 사람들이 여산(廬山)보다 〈훨씬〉 낫다 한다. 이제현(李齊賢)의 박연사(朴淵詞)에 이르기를, "흰 폭의 깁이 천 척에 날으니, 파란 물이 만 길에 맑았다. 옛 임금이 이곳에 올랐다 하니, 반석이 못 가운데 있음이라." 한 것은 곧 이를 가리킨 것이다. 】 인달암(因達巖) 【현의 남쪽 성거산(聖居山) 북쪽 탑동(塔洞)에 있다. 둘레가 1천여 척이며, 높이가 4백여 척인데, 중[僧]이 이르기를, ‘사신암(捨身岩)’이라 한다.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혁파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56책 15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73면

牛峯縣: 本高句麗 牛岑郡, 【一云牛嶺, 一云首知衣。】 新羅改今名。 顯宗戊午, 屬平州任內, 文宗十六年壬寅, 直隷開城府, 【宋 仁宗 嘉祐七年。】 睿宗丙戌, 始置監務。 本朝太祖乙亥, 改爲縣令官, 別號三州九龍山 【在縣南, 高麗國祖聖骨將軍虎景大王之祠在焉, 故號聖居山。 或曰新羅時, 有得道僧義相者居之, 山之名以此。 虎景與獵者九人入山中擊獸, 會日黑, 就岩竇宿, 有虎至當竇口大吼, 九人相謂: "虎必欲啗我, 我輩中一人, 必有當之者, 請各投笠虎前, 虎所噬, 卽其人也。" 於是皆投之, 虎乃噬虎景笠, 虎景卽出, 欲與虎鬪, 虎不見而竇崩, 九人皆壓死而虎景獨生, 故名九龍。 今令所在官春秋行祭。】 源中浦 【在縣西二十五里。】 四境, 東距兔山 非羅川二十五里, 西距平山二十五里, 南距松林六十五里, 北距新恩原積川五十五里。 戶七百七十八, 口二千一百八十。 軍丁, 侍衛軍一百十七, 營鎭軍四十五, 船軍一百十三。 土姓一, ; 亡姓三, ; 續姓二, 【今爲鄕吏。】 厥土塉山高, 俗墾山田, 務蠶桑, 墾田六千八百二十結。 【水田止五十五結。】 土宜, 黍、稷、菽、麥、粟、唐黍、小豆、蕎麥、紅花、胡麻、麻。 土貢, 獐鹿狸皮、蜂蜜、黃蠟、紙、漆、芝草、眞茸、弓榦木。 藥材, 當歸、皂休、安息香、白朮、 【最良。】 續斷、棗、白莢。 石鐵産縣西十里仇時山及十三里觀音岾 【鍊正鐵以貢。】 靑色礪石。 【産縣北二十五里別兒鴨峴。】 站一, 興義 【古名延波, 顯宗十年己未, 元帥姜邯賛等敗走丹兵, 凱還, 王幸是驛, 設綵棚陳百戲, 以迎之, 改賜今名。】 靈異, 朴淵 【李奎報云: "昔有朴進士者吹笛於淵上, 龍女感之, 殺其夫, 引之爲壻, 故號朴淵。" 有上下淵, 深皆不測, 與開城之大井、臨津之德津, 號三所龍王。 旱則禱雨有應。 今令所在官春秋行祭, 上淵中有盤石, 好事者或梯而登覽。 高麗 文宗嘗登其上, 忽風雨暴作, 石震動, 文宗驚怖。 潭陽人李靈幹扈從, 作勑書投之淵, 數龍之罪, 龍卽感悟出其脊, 乃杖之, 淵水爲之盡赤云。 有瀑布飛流下淵, 人謂勝於廬山。 李齊賢 《朴淵詞》云: "削白練飛千尺, 靑銅澈萬尋。 人言玉輦昔登臨, 盤石在潭心。" 卽指此也。】 因達巖 【在縣南聖居山北塔洞, 周回一千餘尺, 高四百餘尺。 僧謂之捨身岩, 高麗時, 行國祭, 今革。】


  • 【태백산사고본】 56책 15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