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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7월 17일 신축 1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문소전 서북에 불당을 설치할 것을 명하자 이사철·이의홉 등이 불가함을 아뢰다

승정원(承政院)에 글을 내리었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도(道)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은 예전 사람이 많이 말하였고, 지금 사람도 많이 말하여, 삼척동자라도 모두 익히 들은 것이니, 무얼 반드시 다시 의논하랴. 세상의 모든 일이 취(取)와 사(捨)에 불과하니, 남김없이 사태(沙汰)한다면 사(捨)라고 이르는 것이 가할 것이고, 사태(沙汰)하지 못한다면 취(取)라고 이르는 것이 가할 것이다. 기신(忌晨)에 재(齋)를 베푸는 것과, 대상(大喪)에 추천(追薦)하는 것과, 여러 절의 조(租)를 먹는 밭과, 도첩(度牒)에 돈을 바치는 영갑이 모두 사(捨)하지 못하고 취한 것이다. 처음에 문소전(文昭殿)창덕궁(昌德宮) 중장(重墻) 밖에 있고, 문소전 담 동쪽에 한 불당(佛堂)이 있어 일곱 중이 지키었으니, 개경(開慶)·연경(衍慶)·숭효(崇孝)와 동일한 뜻이다. 계축년에 옮겨 봉안할 때에 인하여 파괴하고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였다. 국가에서 이미 불씨를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이 한 불당이 더욱 먼저 하여야 할 것인데, 폐하여 걷어치우고 돌아보지 않으니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인인(仁人) 효자가 시험삼아 마음으로 헤아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소전(文昭殿) 서북 빈 땅에 한 불당을 짓고 일곱 중으로 지키려고 하는데, 그 제도는 정당(正堂)이 한 간이고, 동서의 낭사(廊舍)가 각각 세 간이며, 부엌이 세 간이어서, 이것에만 그칠 뿐이다. 근일에 이 뜻으로 두 의정(議政)에게 말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며, 궁성(宮城) 안에 있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하였다. 그러나 옛터가 창덕궁 중장(重墻) 밖에 있었고, 이것도 역시 중성(重城) 밖에 있으니, 멀고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면, 저것은 가깝고 이것은 머니, 불가한 것을 보지 못하겠다. 흥천(興天)·흥덕(興德)·개경(開慶) 등 절이 혹 비가 새거나, 혹 기울어져 위태하여, 형세가 장차 퇴락하게 되면, 국가에서 반드시 공장을 시켜서 수즙(修葺)하는 것은 선왕이 세운 것이어서, 의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퇴락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 중수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차마 할른지, 나는 차마 못하겠다. 지금 이 불당이 다른 절에 비하면, 그 뜻이 더욱 친절한데, 폐철(廢撤)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음에 부끄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수리하지 않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폐철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내 뜻은 여기에 그치고 다시 다른 말을 하지 않겠으니, 정부에 이르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우승지(右承旨) 이의흡(李宜洽)·좌부승지(左副承旨) 안완경(安完慶)·우부승지(右副承旨) 이사순(李師純)·동부승지(同副承旨) 이계전(李季甸) 등이 말을 함께 하여 아뢰기를,

"금내(禁內)에 불당을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고, 또 문소전은 청재(淸齋)하는 곳인데, 승도(僧徒)로 하여금 그 옆에 처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 중을 ‘상문(桑門)’이라고 하는데, 상(桑)이란 말은 상(喪)이니, 길한 것과 흉한 것이 서로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대소의 제사와 향축(香祝)을 행하는 데에 반드시 중이 따르는 것을 금하는 것은, 상인(喪人)에 비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소전은 생(牲)과 악(樂)을 써서 길례(吉禮)로 받드는데, 흉하고 더러운 무리가 그 곁에 끼어 있으면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또 그 출입하는 것이 반드시 효선문(孝先門)으로 통하옵는데,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효선문으로 말미암아 금중(禁中)에 출입하게 되니, 보고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이 일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만일 하나하나 대답하면 인군(人君)이 말이 많은 데에 이르게 되니, 가하겠는가."

하였다. 이사철 등이 재차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12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5책 80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왕실-의식(儀式)

○辛丑/下書承政院。 其書曰:

佛氏之道是非善惡, 古人多言之, 今人多言之, 三尺童子, 皆習聞之, 何必更論! 世之凡事, 不過取與捨而已。 沙汰無遺, 則謂之捨可也, 不能沙汰, 則謂之取可也。 (忌晨)〔忌辰〕 之設齋、大喪之追薦、諸寺食租之田、度牒納錢之令, 皆所以不能捨而取之也。 初, 文昭殿昌德宮重墻之外, 殿之墻東有一佛堂, 七僧守之, 與開慶衍慶崇孝同一義也。 癸丑年移安之時, 因而破壞, 至今未復。 國家旣不棄絶佛氏, 則此一堂, 尤其所先者也, 而廢撤不顧, 於心安乎? 仁人孝子試以心度之, 則可知矣。 今欲於文昭殿西北空地, 營構一堂, 七僧守之。 其制度正堂一間, 東西廊各三間, 門三間, 廚三間, 止此而已。 近日以此意語兩議政, 皆曰: "不可。", 而在宮城之內, 尤以爲不可。 然古基在昌德宮重墻之外, 此亦在重城之外, 以遠近言之, 彼近而此遠, 未見其不可也。 興天興德開慶等寺, 或雨漏, 或傾危, 勢將頹落, 則國家必使工匠修葺之者, 以先王之所建, 義不得不然也。 若以坐視頹落不修爲是, 則他人忍之乎? 我不忍也。 今此佛堂, 比之他寺, 其義尤爲親切, 而廢撤累年, 於心有所愧恥, 孰甚於此! 不修且不可, 況廢之乎!

仍敎曰: "予意止此, 更不他言, 亦諭於政府。" 都承旨李思哲、右承旨李宜洽、左副承旨安完慶、右副承旨李師純、同副承旨李季甸等同辭以啓曰: "禁內設佛堂, 固不可也, 且文昭殿淸齋之所, 使僧徒處於其傍, 尤爲不可。 號僧爲桑門, 桑之爲言, 喪也。 吉凶不可相干, 故大小之祭, 香祝之行, 必禁僧從, 比喪人也。 今文昭殿用牲與樂, 奉以吉禮, 而凶穢之徒, 間於其側, 豈安於心乎! 且其出入, 必由孝先門, 異服之人, 由孝先門出入禁中, 於觀聽何如? 願停此擧。"

上曰: "予何言哉! 若一一答之, 則人君至於多言, 可乎?" 思哲等請至再, 不允。


  • 【태백산사고본】 38책 12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5책 80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