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원사 이순몽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도록 상서하였다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순몽(李順蒙)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삼가 보옵건대, 국가의 성교(聲敎)가 먼 곳까지 퍼져서 변경(邊境)이 근심이 없으며, 인민이 번식(繁殖)하고 호구(戶口)가 많은데도 군액(軍額)이 증가되지 않는 것은, 그 백성이 안정된 뜻이 없어서 부역을 도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도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다른 도(道)로 도망해 옮겨 가서 스스로 양반(兩班)이라 속이고는 문벌이 있는 집에 혼인하여 자식을 낳은 뒤에 잡혀 와서 도로 천인(賤人)이 된 사람까지 있게 되니, 그것이 상도(常道)에 어긋남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고려 왕조의 말기에 왜구(倭寇)가 흥행(興行)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왜인(倭人)들은 〈10명에〉 1, 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본국(本國)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당(黨)을 만들어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도 또한 감계(鑑戒)되는 일입니다. 지금 신백정(新白丁)이 평민들과 더불어 섞여 살면서 서로 당(黨)을 만들어 도적이 되어, 소와 말을 도살하는 이익으로써 귀에 젖고 눈에 익어서 보통의 일로 여기고 있으며, 혹은 혐극(嫌隙)으로 인하여 남의 집에 고의로 불지르기도 하니, 장차 방지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 폐단을 구제하는 요령은 호패(號牌)보다 긴절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태종(太宗) 때에 호패(號牌)의 법을 시험해 시행한 지 수년(數年) 만에 유이(流移)하는 사람이 적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민간에 번거롭고 소란하게 한다고 비평하면서 이를 폐지시켰으나, 이 폐단은 적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도적과 유망(流亡)하는 무리들이 날로 성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나, 신은 원하옵건대 다시 호패의 법을 시행하여 놀고 있는 무리를 금하고 도적의 근원을 그치게 한다면,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이 저절로 구별되어 군액(軍額)이 날로 넉넉해지고, 옥송(獄訟)이 그치게 되어 백성의 생산과 사망이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니, 회보(回報)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공천(公賤)·사천(私賤)과 부역을 도피한 양민(良民)들이 저곳과 이곳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한정이 없었으므로, 순몽(順蒙)은 추솔(麤率)한 사람인데도 또한 그 폐단을 분개하여 이 소(疏)를 올렸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호구-이동(移動) / 호구-호적(戶籍) / 신분(身分)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壬戌/判中樞院事李順蒙上書曰:
臣伏覩國家聲敎遠被, 邊境無虞, 生齒之繁、戶口之夥, 而軍額不加者, 以其民無定志而逃避差役者多也。 其中公私賤口逃移他道, 自冒兩班, 婚姻有蔭之家, 至有生子之後, 見獲還賤者, 其爲反常甚多。 臣聞前朝之季, 倭寇興行, 民不聊生, 然其間倭人不過一二, 而本國之民, 假著倭服, 成黨作亂, 是亦鑑也。 今新白丁, 與平民間居, 相與作黨, 爲盜宰殺牛馬之利, 耳濡目染, 以爲常事, 或因嫌隙, 故燒人家, 將恐有難防之患。 救弊之要, 莫切於號牌。 昔在太宗朝, 號牌之法, 試行數年, 而流移鮮少, 或議煩擾民間而廢之。 此弊小矣, 當時盜賊流亡之徒日盛, 不可勝紀。 臣願復行號牌之法, 禁遊手之輩, 弭盜賊之源, 則良賤自別, 而軍額日敷; 獄訟弭, 而民之生産物故, 自明矣。
不報。 時公私賤口及逃役良人彼此流移者, 不知紀極。 順蒙, 麤人, 亦憤其弊, 乃上此疏。
- 【태백산사고본】 36책 11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호구-이동(移動) / 호구-호적(戶籍) / 신분(身分)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