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기를 성절사로 삼고,김하를 보내 세자의 면복을 청하게 하였다
판한성부사 이견기(李堅基)를 보내어 북경(北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게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하(金何)를 보내어 세자(世子)의 면복(冕服)을 청하게 하였다. 그 표문(表文)에,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말을 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고,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진실로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통달하도록 하는 것이 천하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소국(小國)이 기자의 봉함을 받은 이래로 성교(聲敎)를 삼가 준수하여, 비록 오랑캐 나라의 모퉁이에 있더라도 관대(冠帶)의 풍속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에 이르러 삼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제왕의 운수를 건설한 시기를 만나서 맨 먼저 내부(內附)하여 구류 면복(九旒冕服)을 받게 되었으며, 아래로 배신(陪臣)에 이르기까지 또한 관복을 내리시매, 중국의 신하 9등에 견주어 차례로 2등을 내리게 되니, 배신이 무릇 7등인데 1등의 관질(官秩)은 중국의 제3등에 견주어 오량 관복(五梁冠服)을 내리고, 2등의 관질은 중국의 제4등에 견주어 사량 관복(四梁官服)을 내리고, 3등 이하의 관질(官秩)에게도 차례대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신(臣)의 조부인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 【휘(諱).】 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후대하신 은혜를 입어 이미 왕작(王爵)을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를 내리셨으며, 신의 아버지 선신(先臣) 공정왕(恭定王) 【휘(諱). 】 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매,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구류 면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때 조정(朝廷)116) 의 의논은 곤면 구장(袞冕九章)은 친왕(親王)의 복장(服章)이니 마땅히 민옥(珉玉)을 사용하여 규(圭)로 하고 약옥(藥玉)을 사용하여 패옥(佩玉)으로 하기를 주청하였으나, 특별히 황제의 조칙을 내리셔 이미 구 장 면복(九章冕服)을 내리시고 규(圭)와 패옥(佩玉)도 모두 옥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곡진히 베푸신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영락(永樂) 6년 무렵에 신의 형 제(禔)가 세자로써 북경에 가서 조현(朝見)하매 오량 관복(五梁冠服)을 내리셨으며, 신의 몸에 이르러서는 선덕(宣德) 3년 10월 일에 선종 장황제(宣宗章皇帝)께서 신(臣) 세자(世子) 【휘(諱). 】 에게 육량관(六梁冠)을 내리시고, 5년 정월 일에는 신(臣) 세자(世子) 【휘(諱). 】 에게 조복(朝服)·옥대(玉帶)·옥패(玉佩)를 내리셨으며, 이 해 5월 일에는 신(臣)에게 친히 착용(着用)하던 조환(條環)과 보대(寶帶)를 내리시고, 정통(正統) 3년 8월 일에는 또 폐하께서 신에게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옥규(玉圭)를 내리시고, 9년 2월 일에는 또 신에는 구류 면복·옥규(玉圭)와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옥대(玉帶)를 내리셨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고황제 이래로 외국(外國)의 비루한 것으로써 대우하지 않으시고 중국과 같이 대우하시어, 번왕(藩王)의 소원(疎遠)한 것으로써 대우하지 않으시고 관질을 친왕과 비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의 조부로부터 모두 역대 황제의 총명(寵命)을 입어서 미신(微臣)에 이르기까지 내려 주신 물건이 많으셨으며 아울러 신의 자식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그 무수(撫綏)하신 은혜가 지극하였습니다. 신이 이 나라를 계승하여 지킨 지도 거의 30년이 되었으니, 비록 은혜를 갚고자 하는 정성은 간절하지마는, 조그마한 도움도 있지 못하였으니, 다시 어찌 황제의 들으심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이 고려로부터 인효왕(仁孝王) 왕휘(王徽)의 세자(世子) 왕훈(王勳)과 명효왕(明孝王) 왕옹(王顒)의 세자(世子) 왕오(王俁)가 모두 곤면(袞冕)의 복장을 요(遼)나라에서 받아 이를 대대로 전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중국에서 내리심을 받은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나라 사람들의 귀와 눈에는 이를 보고 듣는 것이 이미 익숙했던 것입니다. 지금 신의 세자(世子) 【휘(諱). 】 도 특별히 황제의 은혜를 입어 나라의 세자가 되어 이미 감국 무군(監國撫軍)의 권한을 맡았는데, 배신이 진실로 신하될 도리가 있는데도 관복의 제도는 서로 같게 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민망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이 사정을 황제에게 아뢰기를 원하옵니다.
삼가 성조(聖朝)의 제사 직장(諸司職掌)의 글을 상고해 보니, 거기에 친왕(親王) 세자(世子)의 칠류 면복(七旒冕服)의 제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이 비록 요황(要荒)117) 의 땅에 있지마는, 존비(尊卑)를 밝히고자 하는 생각이 항상 마음속에 간절하여 황제의 귀에 들리려고 하였으나, 감히 스스로 친왕에게 견줄 수가 없어서 말을 머뭇거리며 주저한 것이 지금 몇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인덕은 미루어 차별이 없이 사랑하고, 교화는 융성하여 외국(外國)에까지 미쳐져서 여러 번 친왕의 복장을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와 덕택은 비록 천지의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의 자식을 보호하는 정성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이 이때에 있어 다만 중국과 외국의 구분만으로써 열등 의식(劣等意識)을 가지고 사정을 진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천지와 부모로써 폐하를 우러러보지 않고서 스스로 차별이 없는 인덕(仁德)과 외국(外國)에까지 미치는 교화에 소외(疎外)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신의 연치(年齒)가 이미 늙었는데도 오히려 잠잠히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진술할 날이 시기가 없을 것이오니, 이것이 신이 황제의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진술하면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신의 그만둘 수 없는 청을 용서하시고 신의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는 정성을 살펴서, 특별히 윤허하시는 조칙을 내리시고 특별한 은택을 입게 하시어, 마침내 궁벽하고 누추한 지역으로 하여금 의례의 차등이 또한 환하게 차례가 있게 된다면, 어찌 다만 미신(微臣)이 한때에만 감동하여 기쁠 뿐이겠습니까. 신의 자자손손(子子孫孫)도 또한 총광(寵光)을 영원한 세대(世代)에까지 입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가엾이 여겨 살피소서."
하였다. 처음에 임금께서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이계전(李季甸) 등에게 표문을 짓게 하고 이미 말하기를,
"요(遼)나라에서 고려의 세자에게 면복(冕服)을 내렸던 옛날의 일을 아울러 기재해야 되겠다."
하면서,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이 일을 상고하게 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윤회(尹淮)가 친히 나에게 이를 말하였으므로 지금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데, 윤회가 어찌 거짓말을 하였겠는가."
하였다. 다시 춘추관으로 하여금 이를 상고하게 했더니, 곧 《실록(實錄)》에 기재되어 있는데도 새로 찬술(撰述)한 역사에는 이 사실이 빠져 있었던 것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11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99면
- 【분류】외교-명(明) / 의생활-관복(官服)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壬戌/遣判漢城府事李堅基, 如京師賀聖節, 同知中樞院事金何, 請世子冕服。 表曰:
臣竊惟上之於下, 要使言而無隱; 下之於上, 苟有懷則必達, 此天下之通義也。 竊念小國爰自箕子受封以來, 謹遵聲敎, 雖在夷裔之陬, 得爲冠帶之俗。 逮至高麗 恭愍王 王顓, 欽遇太祖高皇帝, 誕開景運, 首先內附, 獲受九旒冕服, 下至陪臣, 亦賜冠服, 比中朝臣下九等, 遞降二等, 陪臣凡七等。 一等秩比中朝第三等, 賜以五梁冠服; 二等秩比中朝第四等, 四梁冠服; 三等以下, 以次遞降。 至于臣祖先臣康獻王 諱, 特荷高皇帝眷遇之厚, 旣許王爵, 仍賜國號, 至臣父先臣恭定王 諱 嗣世, 太宗文皇帝賜以九旒冕服。 時朝廷議奏: "袞冕九章, 親王之服。 宜用珉玉爲圭, 藥玉爲佩。" 特降聖旨, 旣賜九章冕服, 圭佩皆用玉, 其所以曲垂恩私者至矣。 永樂六年間, 臣兄禔以世子赴京朝見, 蒙賜五梁冠服, 及至臣身, 宣德三年十月日, 宣宗章皇帝賜 臣 世子 諱 六梁冠; 五年正月日, 賜臣世子 諱 朝服玉佩玉帶; 是年五月日, 賜臣以親御條環寶帶; 正統三年八月日, 又蒙陛下賜臣遠遊冠絳紗袍玉圭; 九年二月日, 又賜臣九旒冕服玉圭及翼善冠袞龍袍玉帶。 欽惟高皇帝以來, 不以外國之陋而視同中國, 不以藩王之踈而秩比親王, 故自祖父皆荷列聖之寵命, 至于微臣, 錫與便蕃, 幷及弱息, 其撫綏之恩盡矣。 臣之嗣守弊封, 殆將三紀, 雖切圖報之誠, 未効絲毫之補, 復有何望, 仰煩天聽乎? 但惟小邦自高麗 仁孝王 王徽世子勳、明孝王 王顒世子俁, 俱受袞冕之服於遼, 用以世傳, 彼雖非受賜於中國, 然國人之耳目, 聞見已熟。 今臣世子 諱 特蒙皇恩, 爲國儲貳, 旣任監撫之權。 陪臣固有臣道, 而冠服之制相同, 一國臣民, 罔不悶然, 咸願敷奏。 謹稽聖朝諸司職掌之書, 乃載親王世子七旒冕服之制, 臣雖在要荒之地, 欲昭尊卑之念, 常切于中, 思達冕旒, 而不敢自擬親王, 囁嚅遲回者, 有年于玆矣。 今遇皇帝陛下仁推一視, 化隆無外, 累賜親王之服, 殊恩異澤, 雖天地之愛物、父母之保子, 無以踰焉。 臣於此時, 徒以華夷之分而引嫌不陳, 則是不以天地父母望陛下, 而自外於一視之仁、無外之化也。 況臣年齒已衰, 而猶且含默, 則攄抱之日無期矣, 此臣所以冒昧敢陳而不能自已者也。 伏望皇帝陞下恕臣無已之請, 諒臣由衷之懇, 特降兪音, 澳霈殊尤之澤, 遂令僻陋之區儀文等威, 亦得粲然有序, 則豈惟微臣歡欣感悅於一時而已哉? 臣之子子孫孫, 亦被寵光於永世矣。 伏惟皇帝陛下矜察焉。
初, 上命集賢殿直提學李季甸等撰表, 仍曰: "遼賜高麗世子冕服古事, 幷載之。" 令春秋館考之, 不得。 上曰: "昔尹淮親爲予言之, 今尙不忘, 淮豈妄言乎?" 更令考之, 乃載在實錄, 而於新撰史逸之也。
- 【태백산사고본】 36책 11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99면
- 【분류】외교-명(明) / 의생활-관복(官服)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