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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11권, 세종 28년 2월 29일 정묘 2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가난한 이들을 진휼하기 위한 의창의 취지가 살려지도록 할 것을 의정부에서 아뢰다

이달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육전(六典)》에 이르기를,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디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賑恤)하기 위한 것인데, 경외(京外)의 환상(還上) 미두(未豆)를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가난한 평민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고, 대소(大小) 양반(兩班) 중에서 혹은 상장(喪葬)의 일을 만났거나, 혹은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만난 사람과 한 마을에서 모두 아는 가난한 사람을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로 분간하여 나누어 준다. ’고 하였사오니, 이것은 의창의 설치가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년 이후로 각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상항(上項)의 성법(成法)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백성의 가난하고 부유한 것도 조사하지도 아니하고서 한결같이 권농(勸農)·정장(正長)의 도목장(都目狀)의 숫자에 따라 인구를 계산하여 지급하게 되니, 이런 까닭으로, 비록 부자일지라도 또한 환상은 장리(長利)의 이식(利息)을 내는 비교가 아니라 생각하여, 자기 집 곡식은 묻기도 하고 옮기기도 하여, 척간(擲簡)할 때에 양식이 떨어진 사람처럼 하여 속여서 환상을 받게되고, 심한 사람은 장사할 밑천을 만들기고 하고, 또 술과 음식을 만들어 향도(鄕徒)와 음사(淫祀)에 제공할 비용으로도 만듭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 곡식을 함부로 소비하고, 가난한 사람은 지탱할 곡식도 없게 되면 또 타도의 곡식을 옮겨 와서 이를 잇게 하니, 지난 을축년에 경기의 인민 2만 5천여 호(戶)에 의창 곡식 63만 7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경상도의 4만 2천여 호에 37만 2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전라도의 2만 9천여 호에 43만 4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충청도의 2만 5천여 호에 80만 5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황해도의 2만 5천여 호에 21만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강원도의 1만 3천 여 호에 11만 5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함길도의 1만 4천여 호에 4만 4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평안도의 4만 4천여 호에 12만 5척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니, 함께 21만 7천여 호에 나누어 준 수량이 2백 73만 8천여 석이고, 남아 있는 미곡(米穀)이 무려 5백 91만 2천여 석이나 됩니다. 지금 병인년에 각도에 나누어 준 미곡이 많기가 1백 15만 3백여 석에 이르게 되는데도, 의창을 열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 끊이지 않으니, 장래의 일이 염려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각 고을의 수령들은 그 경내(境內) 민호(民戶)의 빈부(貧富)와 전지(田地)의 다소(多少)의 저축[宿績]의 유무(有無)를 자세히 핵실(覈實)하여 3등으로 나누어 명백히 장부에 기록해 두되, 그 전지도 없고, 재산도 없이 가난한 사람은 별도로 장부에 기재해 두고서, 풍년에는 비록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혹은 자신이 고용(雇傭)살이를 하거나, 혹은 걸식(乞食)하면 생계(生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중년(中年)에는 가난한 사람은 우선 그 하등(下等) 각 호의 인구와 실전(實田)의 수를 상고하여, 의창이 미두를 존절(撙節)히 나누어 주고, 흉년에 이르러서는 가난한 사람은 진제(賑濟)하고, 중호와 하호는 환상을 주되, 그 중에서 혹은 재해로 인하던지, 혹은 질병·수재·화재·도적등의 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아는 굶주리고 피곤한 사람은 수령이 친히 살펴서 핵실하여, 그 호의 등급과 연사의 풍년·흉년을 헤아리지 말고 모두 적당히 나누어 주게 하며, 매 월말(月末)에 가난한 사람이 몇 명에 환상을 나누어 준 쌀·콩이 몇 섬이며, 진제를 나누어 준 것이 몇 섬, 아무 등급의 사람 몇 명에 나누어 준 것이 몇 섬인가를 상세히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면, 감사가 계문(啓聞)하게 하여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7면
  • 【분류】
    재정-창고(倉庫)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구휼(救恤)

○是月, 議政府啓: "《六典》, 節該: ‘義倉之設, 本爲賑恤窮乏。 京外還上米豆, 鰥寡孤獨及貧乏平民, 爲先分給。 大小兩班內, 或遭喪葬之事, 或罹水火之災及一里共知貧乏人, 大中小戶, 分揀分給。’ 是則義倉之設, 專爲賑窮賙乏也。 近年以來, 各官守令不審上項成法, 不覈民之貧富, 每當還上分給時, 一依勸農正長都目狀之數, 計口支給, 故雖富者亦以爲還上非長利出息之比, 其家穀食, 或埋或移, 擲簡之時, 使若絶食者然, 冒受還上, 甚者, 至爲販鬻之資。 又有爲酒食, 以共鄕徒及淫祀之費。 富者橫費其穀, 貧者無穀可支, 則又移他道之粟以繼之。 去乙丑年京畿人民二萬五千餘戶, 分給義倉穀六十三萬七千餘石; 慶尙道四萬二千餘戶, 分給三十七萬二千餘石; 全羅道二萬九千餘戶, 分給四十三萬四千餘石; 忠淸道二萬五千餘戶, 分給八十萬一千餘石; 黃海道二萬五千餘戶, 分給二十一萬餘石; 江原道一萬三千餘戶, 分給十一萬五千餘石; 咸吉道一萬四千餘戶, 分給四萬四千餘石; 平安道四萬四千餘戶, 分給十二萬五千餘石。 摠計二十一萬七千餘戶分給之數, 二百七十三萬八千餘石, 餘在米穀, 無慮五百九十一萬二千餘石。 今丙寅年各道分給米穀, 多至一百十五萬三百餘石, 而請發義倉者, 相繼不絶, 將來可慮。 今後各官守令將境內民戶貧富田地多少、宿積有無, 備細覈實, 分爲三等, 明白置簿, 其無田地無財産貧乏人, 別爲置簿。 豐年則雖貧乏者, 或傭身或丐乞, 可以資生, 中年則貧乏人, 爲先考其下等各戶人口實田之數, 義倉米豆, 撙節分給, 至於儉年, 貧乏人則賑濟, 中下戶則給還上。 其中或因災傷, 或因疾病水火盜賊等事, 衆所共知飢困之人, 守令親審覈實, 不計其戶等第、年分豐(斂)〔歉〕 , 竝皆量宜分給。 每月季, 貧乏人幾口, 還上分給米豆幾石、賑濟分給幾石; 某等人幾口分給幾石, 具報監司, 監司啓聞, 以爲恒式。" 從之。


  •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657면
  • 【분류】
    재정-창고(倉庫)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