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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5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첨지중추원사 이변이 주문사로 북경에 가다

주문사(奏聞使)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변(李邊)북경(北京)에 갔다. 그 주본(奏本)에 이르기를,

"의정부의 장계(狀啓)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이세형(李世衡)과 본도(本道)의 회령진 절제사(會寧鎭節制使)인 홍사석(洪師錫)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였사온데, 이에 이르기를, ‘정통(正統) 7년(1442) 4월 18일에 목리(木里)에 안주(安住)하고 있는 오량합(吾良哈) 소중가(所衆哥)가 고하기를, 「달달(達達)독토올왕(篤吐兀王) 등 4명과 홀라온(忽剌溫) 파이질한(波伊叱閒) 등 12명이 이달 16일에 아적랑이(阿赤郞耳) 지면(地面)에 먼저 와서 말하기를, '몽고 황제(蒙古皇帝)가 즉위(卽位)한 지가 지금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우리가 칙위(勑委)를 가지고 왔으니 고려(高麗)에 알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그날로 야인(野人)들의 군마(軍馬)를 모아서 영접하게 한 뒤에, 나로 하여금 와서 본뜻을 알리게 하라고 하였다.」 하므로, 이 말을 듣고서 곧 고령 파절권관(高嶺把截權官) 배숭례(裵崇禮)오도리(吾都里) 마고인팔(馬古因八) 등을 보내어 앞서 본인(本人)들의 하처(下處)에 가서 근각(根脚)을 묻게 하였는데, 만일 소중가(所衆哥)의 고(告)한 바가 사실이라면, 네가 매양 본인(本人)들을 대하여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日]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는데, 지금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천하를 통일했으니, 네가 어찌 이와 같은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할 수 있는가. 반드시 너를 대우해 줄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게 하니, 고인팔(古因八) 등이 이 말을 듣고 본인(本人)들에 대하여 내력(來歷)을 자세히 물으니, 독토올왕(篤吐兀王)은 말하기를, 「나는 해서(海西) 서북(西北) 타안위(朶顔衛)달달인(達達人)이라.」 하고, 파이질한(波伊叱閒)벌어절(伐於節) 등은 말하기를, 「우리는 모두 홀라온(忽剌溫)에 속한 사람이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우리 몽고 황제(蒙古皇帝)가 현재 조올족소(照兀足所) 지면(地面)에 거주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황제가 홀라온(忽剌溫) 두목(頭目) 6인 등에게 유시(諭示)하는 칙서(勅書)와 고려(高麗)에 유시(諭示)하는 칙서를 고토조왕(高吐照王)에게 주어서 홀라온의 지면(地面)에 내보냈으나 고려의 길을 알지 못하여 돌아왔는데, 내가 매양 본인(本人)을 따라다녔으며, 지난해 12월 중에 황제를 장막(帳幕) 안에서 진현(進見)하니 연회를 베풀고 말[馬]을 내려 주었으며, 금년 2월 초5일에 독토올(篤吐兀)을 봉(封)하여 왕(王)으로 삼고, 파이질한(波伊叱閒)에게는 두마두(豆麻豆)를 주고, 벌어절(伐於節)에게는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주고는, 이내 칙서를 가지고 밤[星夜]을 가리지 않고서 내보내었다.」 하므로 고인팔(古因八) 등이 비직(卑職)의 상항(上項) 지시사인(指示詞因)에 의거하여 의리(義理)를 들어 개설(開說)하니, 본인(本人)들이 대답하기를, 「고인팔(古因八)도 역시 호종(胡種)인데 이와 같이 멸시(蔑視)하니 도리상 옳지 못하다. 후일에 너에게 몽고의 직사(職事)를 주어 선명(宣命)을 가지고 오게 한다면, 네가 마음대로 받지 않겠는가.」 하니, 고인팔(古因八)이 대답해 말하기를, 「나는 조정(朝廷)022) 의 지휘 직사(指揮職事)를 받아 금대(金帶)를 띠었으니 이미 만족하다.」 하므로, 본인(本人)들이 이 말을 듣고 몽고자(蒙古字)의 칙서(勅書)를 펴 보이니, 고인팔(古因八)이 대략 기억하여 말하되, 「태조(太祖) 성길사 황제(成吉思皇帝)가 팔방(八方)을 통어(統馭)했으며, 조(祖) 설선 황제(薛禪皇帝)023) 가 즉위(卽位)할 때에는 천하가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그 중에 고려국은 교의(交誼)가 좋기를 다른 나라보다 배(倍)나 되고, 친근함이 형제와 같았는데, 세상이 쇠퇴(衰頹)하여 난리를 만나서 도성(都城)을 버리고 북방에 의탁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지금 내가 조종(祖宗)의 운수를 계승하여 즉위(卽位)한 지가 지금 벌써 10년이나 되었으니, 만약 사람을 시켜 서로 통호(通好)하지 않는다면, 이는 조종(祖宗)의 신의(信意)를 잊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만약 해동청(海東靑)과 하표(賀表)를 보낸다면, 짐(朕)이 후하게 상(賞)주고 후하게 대우할 것이다.」 하였는데, 맨 뒤의 연호(年號)는 이해(理解)할 수가 없었으며, 연월일(年月日)은 10년 2월 초5일이고, 종이는 황색 박지(薄紙)이며, 인신(印信)은 대인(大印)이 아니고, 그 형상은 주척(周尺) 5분(分) 정도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으로 말하기를, 「내가 본디 몽고의 글자 모양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본인(本人)들이 대답해 말하기를, 「우리에게 매양 입경(入境)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인력(人力)을 사용하여 성(城)을 쌓고 즉위(卽位)했는데, 대명 황제(大明皇帝)는 귀순(歸順)하므로 옥인(玉印)을 내려 주었으나 몽고 황제(蒙古皇帝)는 멸시(蔑視)하니, 후일(後日)에 옥인(玉印) 칙서(勅書)를 하나는 대도(大都)에 보내고 하나는 고려에 보내고서, 만 명의 수효로 떼를 지어 나올 때에, 네가 또한 막아낼 수 있겠는가. 비록 큰 눈[大雪]이 산더미 같고 큰 바람이 나무를 뽑더라도, 그대의 변장(邊將)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또 우리 황제가 홀라온(忽剌溫) 지면(地面)에서 나와서 도읍을 세우고 한번 천하를 평정할 것이니, 만약 나온다면 길은 더욱 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매양 몽고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나오는데, 이미 친히 왕의 나라에 나아가게 하지도 않고, 또한 변장(邊將)의 명문(明文)을 받지 않고 돌아간다면, 진실로 견책(譴責)을 당할까 두려워 눈물을 머금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하여, 이에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으므로, 신(臣)이 이에 의거하여 참고해 살펴보니, 상항(上項)의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비록 믿을 수가 없지마는, 관계(關係)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신은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 자세히 갖추 주달(奏達)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96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09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22]
    조정(朝廷) : 명나라.
  • [註 023]
    설선 황제(薛禪皇帝) : 원(元) 나라 세조(世祖).

○戊辰/奏聞使僉知中樞院事李邊京師。 其奏本曰: "議政府狀啓據咸吉道都節制使李世衡備本道會寧鎭節制使洪師錫呈: "該正統七年四月十八日, 木里安住人吾良哈 所衆哥告稱: ‘達達 篤吐兀王等四名及忽剌溫 波伊叱間等十二名, 於本月十六日, 前來阿赤郞耳地面, 說道: 「蒙古皇帝卽位, 今已累年。 俺每齎勑委來, 報知高麗。」 卽日野人等軍馬聚會迎接後, 使我來告本意。’ 聽此。 隨差高嶺把截權管裵崇禮吾都里 馬古因八等, 前去本人等下處, 取問根脚, 假如所衆哥所告是實, 爾每對本人等說道: ‘天無二日, 民無二王。 如今大明皇帝統一天下, 汝何發如此不道之言乎? 必無待汝之理。’ 古因八等聽此, 與本人等盤問來歷, 篤吐兀王言: ‘我是海西西北朶顔衛 達達人。’ 波伊叱間伐於節等言: ‘俺每俱係忽剌溫人。’ 仍言: ‘我蒙古皇帝見住照兀足所地面。 前年時分, 皇帝哲諭忽剌溫頭目六人等勑書及諭高麗勑書, 授高吐照王出送忽剌溫地面。 緣未知高麗道路回還, 俺每隨同本人, 去年十二月內, 進見皇帝於帳募裏, 設宴賜馬。 至今年二月初五日, 封篤吐兀爲王, 授波伊叱間 豆麻豆, 授伐於節達魯花赤, 仍令齎勑, 不分星夜, 出送來了。’ 古因八等依卑職上項指示詞因, 擧義開說, 本人等答曰: ‘古因八亦是種, 如此蔑見, 於理未便。 後日授汝蒙古職事, 宣命齎來, 則汝擅自不受歟?’ 古因八答說: ‘我受朝廷指揮職事, 帶金已足。’ 本人等聽此, 開示蒙古字勑書, 古因八略記回說: ‘「太祖 成吉思皇帝統馭八方, 祖薛禪皇帝卽位時分, 天下莫不順命。 內中高麗國交好, 倍於他國, 親若兄弟, 世衰遭亂, 棄城依北, 已累年矣。 今我承祖宗之運, 卽位今已十年。 若不使人交通, 是忘祖宗之信意也。 今後若送海靑及賀表, 則朕厚賞厚待。」 季後年號則未得理會, 年月日則十年二月初五日, 紙則黃色薄紙, 印信則不是大印, 其方周尺五分許。 我默識陽言: 「俺本不識蒙古字樣。」 本人等答言: 「將俺每不許入境, 大不可也。 用人力築城卽位大明皇帝則歸順, 天賜玉印蒙古皇帝則蔑見。 如後日玉印勑書, 一送大都, 一送高麗, 萬數成群出來時, 汝亦阻當乎? 雖大雪如山, 大風拔樹, 爾邊將毋動待候。 又我皇帝於忽剌溫地面出來, 建都一定, 儻若出來, 道路尤爲不遠。 俺每今齎蒙古皇帝勑書出來, 旣不使親詣王國, 又不受邊將明文回去, 誠恐譴責。」 含淚回還去了。’" 得此具啓。 臣據此參詳, 上項不道之言, 雖不足信, 干係非輕, 臣心驚駭, 備開奏達。


  • 【태백산사고본】 31책 96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책 409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