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92권, 세종 23년 2월 7일 갑술 3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흥양진을 설치하다
고흥현(高興縣)을 봉황암(鳳凰巖)의 서쪽으로 옮기고, 또 보성(寶城)의 임내(任內)029) 남양(南陽)·태강(泰江)을 떼어 붙여 이름을 흥양(興陽)이라 고치고, 동시에 진(鎭)을 설치하니, 호구(戶口)가 7백 30인이요, 전토(田土)가 4천 1백 46결(結)이었다. 이 앞서 도순찰사 이맹진(李孟畛)은 고흥을 저천(苧川)으로 옮기려 하였고, 정흠지(鄭欽之)는 오이동(吾伊洞)으로 옮기려 하였으며, 조말생(趙末生)은 포두(浦頭)로 옮기자고 하여 소견(所見)들이 같지 아니하였는데, 뒤에 정연(鄭淵)이 다시 살펴보고 말하기를, ‘저천은 백성이 사는 곳과 동떨어지게 멀어서 구원이 서로 미치지 못하겠고, 오이동은 지세가 몹시 좁아 진(鎭)을 설치하는 데 적당하지 못하며, 포두에 이르러서는 큰 산이 가까이 누르고 있어 시석(矢石)이 서로 미치겠고, 또 수재(水災)가 있겠다. ’고 한 까닭으로, 드디어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또 고양(高陽)의 조양(兆陽)을 분할하여 보성(寶城)에 소속시키고, 각사(各司)에 바치는 공물(貢物)도 모두 옮겨서 정했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9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책 334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휼병(恤兵) / 사법-법제(法制) / 신분(身分)
- [註 029]임내(任內) : 호장(戶長)이 다스리던 지방 행정구획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