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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2월 7일 경진 1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윤번·민의생·김돈 등이 양녕, 왜인, 호패법에 관한 일을 아뢰다

정사를 보았다. 대사헌(大司憲) 윤번(尹璠)과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황수신(黃守身)이 아뢰기를,

"신 등이 각기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서울에 집을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함을 두세 번 진청(陳請)하였사오나, 윤허하심을 얻지 못하와 감분(憾憤)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잠잠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경 등이 이를 말한 지가 오래다. 양녕이 이미 서울에 왕래하는데, 서울에다 집을 짓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몸[身]이 근본이고 집[家]은 끝이다. 어찌하여 끝에다 마음을 써서 굳이 말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

하매, 번(璠) 등이 아뢰기를,

"이제 집을 크게 지으면 양녕이 항상 서울에 있게 될 것이오니, 비단 신 등만이 실망할 뿐 아니오라, 그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에 어찌하겠나이까. 또 살 집이 없사오면 비록 혹시 서울에 들어올 때라도 감히 오랫동안 유(留)하지 못한다는 뜻이 그래도 있지마는, 이제 만약 그러하오면 다른 종친(宗親)과 분별이 없사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녕이 가거나 올 때에는 모두 나에게 승낙을 받으니, 다른 종친과 같지 못한 것이 많다. 예로부터 성인(聖人)의 말씀도 혹 까닭이 있어서 한 것도 있으니, 태종의 유교도 역시 한때의 까닭으로 하신 말씀이다. 양녕은 큰 죄악이 없고 다만 광패(狂悖)함으로써 득죄(得罪)하였을 뿐이므로, 내가 집을 짓게 하여 서울에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여, 등이 다시 그 불가함을 진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의 말이 비록 이와 같으나, 나의 생각도 풀기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민의생(閔義生)이 아뢰기를,

"경상도 부산포(富山浦)에 항거(恒居)하는 왜인(倭人)이 60여 호(戶)인데, 지금 와서 장사하는 왜인이 또한 무려 6천여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영(營)에 소속된 선군(船軍)인즉 본래가 8백여 명이오나, 그 정군(正軍)은 불과 4, 5백 명이오니, 만일 사변(事變)이 있사오면 그 수백 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청하옵건대, 진(鎭)의 군사를 더하여 군세(軍勢)를 장(壯)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도왜(島倭)들이 경상도에서 번상(番上)한 군사를 점고(點考)한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올라가서 은피(隱避)한 것이 두어 달이나 되었었다. 이제 갑자기 군(軍)의 수효를 더한다면 또 놀라지 아니하겠는가."

하매, 의생이 대답하기를,

"비록 한 포(浦)에 군수(軍數)를 증설하는데 어찌 놀라기에 이르겠습니까."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하연(河演)이 아뢰기를,

"우리 국가의 동서(東西) 양계(兩界)는 장수(將帥)와 수령(守令)을 모두 무예(武藝)가 있는 사람으로써 선택하지만, 남방(南方)은 그렇지 아니하오니 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대체로 북방 군졸은 병진(兵陣)을 연습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무용(武勇)하지만, 남방은 오랫동안 변경(邊警)이 없으므로 병비(兵備)를 익히지 않았으니, 만일 사변이 있으면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물(人物)이 본디 사납고 억세니, 진실로 무예를 익히면 가히 대적할 자 없을 것이다. 편안하여도 위태한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예전의 명훈(明訓)이 있으니, 나도 역시 남방의 일에 유의하겠다. 또 성을 쌓고 순찰하라는 명령이 겨우 내렸는데, 헌의(獻議)하여 이를 막는 자가 말하기를, ‘민력(民力)을 수고롭게 한다. ’고 한다. 그러나 백성의 이(利)를 일으키는 자가 어찌 목전(目前)의 폐해를 계산하고 만세(萬世)의 이익을 폐(廢)하겠는가. 경 등이 이제 만약 남방의 일을 조치(措置)하려면 민폐(民弊)를 구애하지 말고 마땅히 심사 원려(深思遠慮)하여, 한번의 수고로써 영원히 편케 하는 것이 역시 가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김돈(金墩)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이 날로 번성하는데도 군액(軍額)이 증가되지 아니하오니, 청하옵건대,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가 태평한 지 오래 되어 백성의 늘어남이 옛날의 배나 되는 것은, 그 노비(奴婢)의 번식된 것과 나누어 주는 전지(田地)의 부족됨을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다. 이 법이 태종조(太宗朝) 때에 거의 실행되었는데, 한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하여 이를 막았고, 백성들도 역시 모두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드디어 정지하였다. 이제 만약 다시 이 법을 시행하면 반드시 숨어 빠지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범법(犯法)하는 자가 많을까 염려된다. 정치하는 데는 마땅히 그 대체(大體)만을 거행할 것이요, 그같이 샅샅이 살필 것은 아니다. 시험하여 조신(朝臣)과 의논하라."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 초창(草創)한 처음에 모든 예제(禮制)에 있어서 많이 고려(高麗)를 따랐기 때문에, 고제(古制)에 어긋남이 많았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하기에 미쳐 허조(許稠)정초(鄭招)로 하여금 다시 그 따르고 개혁할 것을 정하여 다 개원례(開元禮)를 모방하게 하였는데, 조(稠)는 학문이 이미 박흡(博洽)하지도 못하고 성질이 또한 고집이 있어 잘못된 일이 꽤 많았다. 왕비나 세자를 책봉하는 것 같은 유(類)는 예서(禮書)의 문의(文義)를 알지도 못하고 대개 억측으로 찬정(撰定)하였으므로, 그 뒤에 그 잘못된 것을 알게 되어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이제 문신(文臣) 한두 사람을 택하여 종묘(宗廟)·조회(朝會)의 예악(禮樂)과 왕비·세자의 의장(儀仗)을 정하게 하라."

하니, 돈(墩)이 소윤(少尹) 이효지(李孝之)를 천거하매,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67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人事) / 외교-왜(倭) / 호구(戶口) / 정론-정론(政論)

    ○庚辰/視事。 大司憲尹璠、知司諫院事黃守身啓: "臣等各以讓寧大君 不宜起第京都, 再三陳請, 未蒙兪允, 不勝憾憤。" 上默然良久曰: "卿等言此久矣。 讓寧旣往來于京, 起第京都, 何爲不可? 身者, 本也。 家者, 末也。 何致意於末而敢言若是乎?" 等啓曰: "今大治第舍, 使讓寧恒居于京, 非惟臣等之缺望, 其於太宗遺敎何? 且無居第, 則雖或有入京之時, 不敢久留之意猶有存焉, 今若此, 則與他宗親無別矣。" 上曰: "讓寧或往或來, 皆稟予命, 則不如他宗親者多矣。 自古聖人之言, 或有爲而發, 太宗遺敎, 亦一時有爲而言也。 讓寧無大惡, 但以狂悖得罪耳, 予欲使築第而居于京也。" 等再陳其不可, 上曰: "卿等之言雖若此, 予之惑亦難解也。" 禮曹判書閔義生啓曰: "慶尙道 富山浦恒居倭人六十餘戶, 今來商, 又無慮六千餘人, 而營屬船軍則本八百餘人, 其正軍不過四五百人, 倘有事變, 乃以數百人, 何能爲乎? 請加鎭軍, 以壯軍勢。" 上曰: "昔島慶尙道點番上軍士, 登山隱避者數月。 今遽增軍數, 則亦無乃驚駭乎?" (義山)〔義生〕 對曰: "雖於一浦, 增設軍數, 何至驚駭乎?" 左參贊河演啓曰: "我國家東西兩界則將帥守令, 皆選武藝之士, 南方不然, 實爲未便。" 上曰: "卿言是也。 大抵北方軍卒, 鍊習兵陣, 故人皆武勇。 南方久無邊警, 不習兵備, 脫若有變, 則誠可畏矣。 然人物本自鷙悍, 苟能習武, 可以無敵矣。 安不忘危, 古有明訓, 予亦留意南方之事。 且築城巡察之命纔下, 而有獻議沮之者曰: ‘恐勞民力也。’ 然興民之利者, 何計目前之弊, 而廢萬世之利乎? 卿等今若措置南方之事, 則不拘民弊, 當深思遠慮, 使之一勞永逸, 不亦可乎?" 都承旨金墩啓曰: "今生齒日繁, 而軍額不增, 請行號牌之法。" 上曰: "國家昇平日久, 生齒之繁, 倍於往昔。 觀其奴婢之繁息、分田之不敷, 則可知矣。 此法在太宗朝, 庶幾行之, 而有一大臣獻議沮之, 民亦皆不欲, 故遂停之。 今若復行此法, 則必無隱漏者矣。 然慮犯法者多也。 爲治當擧其大體, 不可如是其察察也, 試與朝臣議之。" 上曰: "我祖宗草創之初, 凡干禮制, 多襲高麗, 有違古制者多矣。 逮予嗣位, 令許稠鄭招更定其沿革, 悉倣《開元禮》, 然之學問, 旣不博洽, 性又固執, 頗有訛謬之事。 如冊封王妃世子之類, 不能通曉禮書文義, 率以臆意撰定, 厥後始知其非, 遂爲一時之笑。 今欲擇文臣一二人, 定宗廟朝會禮樂及王妃世子儀仗。" 乃薦少尹李孝之,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67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人事) / 외교-왜(倭) / 호구(戶口)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