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4일 을묘 3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좌의정 맹사성 졸기

좌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한 맹사성(孟思誠)이 죽었다. 사성의 자(字)는 자명(自明)이며 신창(新昌) 사람이었다. 병인년에 을과(乙科) 첫째로 발탁되어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에 보직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전의 승(典儀丞)·기거 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이 되고, 나아가서는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되고 옮겨서는 면천 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가 부름을 받아 내사 사인(內史舍人)이 되었고, 예조 의랑(禮曹議郞)·사헌 시사 중승(司憲侍史中丞)·간의 우산기 상시(諫議右散騎常侍)가 되었다가, 나가서 공주 목사(公州牧使)가 되고, 불려서 사간(司諫)을 제수하였다가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문 제학(藝文提學), 한성부 윤(漢城府尹),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인녕부 윤(仁寧府尹), 예·호·공·이(禮戶工吏) 4조 판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가 정미년에 의정(議政)에 임명하였는데, 을묘년에 면직되기를 청하므로 이에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정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문의(問議)하였다. 이에 죽으니 나이는 79세이었다. 부음(訃音)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官)에서 장사를 보아주게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待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한다. 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뵈이고저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꾸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매양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石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또 음률(音律)에 능하여 혹은 손수 악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무릇 조정의 큰 일이나 거관 처사(居官處事)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 외아들 귀미(歸美)는 먼저 죽고, 손자가 둘이 있으니 효증(孝曾)계증(季曾)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66면
  • 【분류】
    인물(人物)

○左議政仍令致仕孟思誠卒。 思誠自明, 新昌人。 丙寅, 擢乙科第一人, 選補春秋檢閱, 累遷典儀丞、起居舍人、右獻納, 出爲水原判官, 移知沔川。 尋召爲內史舍人, 歷禮曹議郞、司憲侍史中(承)〔丞〕 、諫議、右散騎常侍, 出爲公州牧使。 召除司諫, 擢代言, 累遷吏曹參議、藝文提學、漢城府尹、司憲府大司憲、仁寧府尹、禮戶工吏四曹判書、議政府贊成事、判右軍都摠制府事。 丁未, 拜議政, 乙卯, 請免, 乃爲仍令致仕。 然國有大政, 必就問之。 卒年七十九。 訃聞, 上慟悼, 率百官擧哀, 停朝, 官庀葬事。 諡文貞, 忠信接禮文, 淸白守節貞。 思誠爲人, 恬靜簡易, 禮士出於天性, 朝士雖秩卑者謁見, 必具冠帶出大門外, 邀致上坐, 及退, 亦鞠躬拱手目送, 待客上馬, 然後還入門。 昌寧府院君 成石璘, 於思誠爲先進。 其第在思誠第下, 每往還必下馬過之, 終石璘之世。 又能審音律, 或自製樂器, 然稟性仁柔, 凡朝廷大議居官處事, 短於果決。 一子歸美先亡。 孫二: 孝曾季曾


  • 【태백산사고본】 26책 8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166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