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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5월 8일 갑신 9번째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곡산 부원군 연사종의 졸기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이 졸(卒)하였다. 사종(嗣宗)의 자(字)는 불비(不非)요, 황해도 곡산(谷山) 사람으로서 함흥부로 옮겨 산 지가 삼대가 되었다. 무진년에 고려 우왕(禑王)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칠 때, 태조(太祖)는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고, 사종(嗣宗)은 장군 진무(掌軍鎭撫)로서 따라갔다. 태조가 즉위하매 원종 공신(元從功臣)의 문권(文券)을 내려 주고, 또 회군 공신(回軍功臣)의 문권도 하사하였다. 신사년 봄에는 태종이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여러 번 천전(遷轉)하여 상장군(上將軍)·호조 전서(戶曹典書)를 거쳐 곡성군(谷城君)에 봉하였고, 승진하여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경인년에 길주도 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 겸 병마 절제사(兵馬節制使)로 나가게 되고, 인하여 길주목(吉州牧)을 다스렸다. 신묘년 12월에 부상(父喪)을 당하였고, 임진년 정월에는 기복(起復)하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 절제사·영흥 부윤(永興府尹)이 되어, 이화영(李和英) 등의 소관민(所管民)을 감하기를 청하여, 정돈하여 편호(編戶)함이 매우 많았다. 계사년에 소환(召還)되고, 이해 겨울에 사종(嗣宗)이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갑오년 2월에 또 어머니 봉양으로써 재삼 말미를 청하니, 그 사연(辭緣)이 매우 간절하고 측은한지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광연루(廣延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여 보내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종(嗣宗)이 일찍이 아비 죽는 날 임종(臨終)에 미쳐 오지 못한 것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늘 눈물을 흘렸삽고, 이제 또 그의 어미가 늙고 병들음을 민망히 여겨, 몸이 고향에 돌아가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보살피고, 또 탕제(湯劑)를 갖추기를 바랐사오니, 가위(可謂) 그 효도를 다하였나이다. 대체로 성명(聖明)을 만나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되, 능히 이같이 효도를 극진히 한 자는 적사오니, 바라옵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을 권장케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사종(嗣宗)이 비록 외방에 있었으나, 녹(祿)을 전과 같이 내려 주었으니, 그 공을 중히 여기고, 그 효도를 아름답게 여기었음이다. 을미년에 모상(母喪)을 당하였고, 병신년에 소환되어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에 임명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거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고, 병신년 4월에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을 봉하였다. 사종은 관화(寬和)하고 공검(恭儉)하였다. 일찍이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초래(草萊)의 천박한 재질(材質)로써 과분히 임금의 알아주심을 입어 가장 높은직위에 이르렀으되, 항상 조심하여 혹 남의 헐뜯음을 당할까 걱정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라."

하였다. 응견(鷹犬)이나 성색(聲色)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멀리 하였다. 죽음에 미쳐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弔問)하고 전(奠)을 드리었다. 관에서 장사(葬事)를 다스리고 시호(諡號)를 정후(靖厚)라 하니, 너그럽게 즐거워하며 잘 죽음이 정(靖)이요, 사려가 틀림 없는 것이 후(厚)이다. 세 아들이 있으니, 연경(延慶)·연비(延庇)·연음(延廕)이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6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64면
  • 【분류】
    인물(人物)

谷山府院君 延嗣宗卒。 嗣宗不非, 黃海道 谷山人, 徙居咸興府三世矣。 戊辰, 辛禑起兵攻, 太祖爲右軍都統使, 嗣宗以掌軍鎭撫從行, 及太祖卽位, 賜元從功臣之券, 又賜回軍功臣之券。 辛巳春, 太宗賜佐命功臣之號, 累遷上將軍戶曹典書, 封谷城君, 陞判漢城。 庚寅, 出爲吉州道都按撫察理使、兼兵馬節制使, 仍領吉州牧。 辛卯十二月, 丁父憂, 壬辰正月, 起復爲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兵馬節制使、永興府尹。 請減李和英等所官民, 刷爲編戶甚多。 癸巳, 召還。 是年冬, 嗣宗請歸養母, 上不許。 甲午二月, 又以養母再三請暇, 辭甚懇惻, 上許之, 設宴廣延樓慰遣之。 禮曹啓: "嗣宗嘗以喪父之日, 未及永訣, 不勝慟悼, 每垂泣涕, 今又憫其母老且病, 乞身還鄕, 常在左右, 晨昏調膳, 且備湯劑奉養, 可謂盡其孝矣。 夫遭遇聖明, 位至將相, 而能如此盡孝者鮮矣, 乞依古制, 旌表門閭, 以勸後人。" 上從之。 時嗣宗雖在外, 頒祿如故, 蓋重其功而嘉其孝也。 乙未, 丁母憂, 丙申, 召還, 命爲三軍都鎭撫, 歷議政府參贊、中軍都摠制, 丙申四月, 封谷山府院君嗣宗寬和恭儉, 嘗戒子孫曰: "吾以草萊譾材, 謬爲主知, 以至極品, 夙夜兢惶, 或遭譏謗, 爾等戒之哉!" 至若鷹犬聲色, 一切遠之。 及卒, 停朝三日, 致弔致奠, 官庀葬事。 諡靖厚, 寬樂令終靖, 思慮不爽厚。 有三子: 曰, 曰, 曰


  • 【태백산사고본】 20책 6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64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