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안숭선에게 임영 대군의 부인 남씨를 내어보낼 것에 관해 전교하다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권진·우의정 최윤덕 등을 부르고,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비밀히 안숭선에게 전교하기를,
"기유년에 동궁빈(東宮嬪)을 폐하였는데, 그 사람됨이 행실이 박하니 어찌 장차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리오. 공자가 아내를 내어쫓고, 백어(伯魚)102) 가 아내를 내어쫓고, 자사(子思)가 아내를 내어쫓았으니, 참으로 부부는 인륜(人倫)의 근본으로서 금슬(琴瑟)과 같이 화합한 뒤에 가도(家道)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아내 남(南)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안정(眼精)이 바르지 못하여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 있기에, 병이 있는 줄 의심하였으나,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있은 지가 달포나 되었다. 근일에 자세히 보니 인중(人中)에 뜬[灸] 흔적이 있고, 또 머리와 이마 위에도 뜸 자국이 있기에, 의원 노중례로 하여금 비밀히 남씨 집에 출입하는 의원 김사지(金四知)에게 묻게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어릴 때에 미친 병이 생겨 화엄종(華嚴宗)의 중 을유(乙乳)가 치료하였다.’ 하고, 의산군(宜山君) 집의 여종으로 효령 대군 집에 출입하는 자가 있는데, 말하기를, ‘남씨는 본디 미친 병이 있는데 다행이 운수가 좋아서 대군의 배필이 되었다.’ 하고, 정충경(鄭忠卿)의 집에 드나드는 무당이 남씨의 집에도 드나드는데 말하기를, ‘남씨가 아이 때에 미친 병이 생겨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백방으로 치료하여 오늘까지 연명하였다. ’고 했다. 내가 듣고 오히려 믿지 못하여 날마다 눈 앞에서 두고 보았더니, 행동이 방자하여 떳떳함이 없으므로 좌우에서 웃었으나 조금도 괴이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과연 소문과 같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악한 병이 있으면 버리고, 부모에게 불순하면 버린다. ’고 하였으나, 동궁이 아내를 버렸는데 또 임영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대개 여자는 서른 살부터 쇠하기 시작한다. 광무(光武)가 투기하는 이유로 황후를 폐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어찌 투기한다고 해서 버리겠습니까. 임금은 위에서 표준이 되어 일언 일동(一言一動)을 백성이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로서 아내를 내어쫓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하게 다스려서 방지하는 것인데, 아랫사람을 책하기에는 밝고 자기의 잘못에 어두우면 사람들이 반드시 웃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중궁이 말하기를, ‘어진 아내를 얻어 살면 되지 하필 버릴 것이냐. ’고 하니, 이 말이 또한 그럴 듯한데 어떻게 할까. 잘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부부는 일생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이와 같은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을 어찌 대군의 배필로 삼겠습니까. 그 아비 남지가 애초에 계달하지 아니하였으니, 죄가 작지 아니하오나 추론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조부 경문(景文)이 미친 병이 있었고, 남지의 장인 이문알(李文斡)의 친족에도 이 병이 있었으니, 속히 내어보내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내가 다시 생각하겠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사직(司直) 한곡(韓穀)이 상언하기를, ‘신이 최윤덕을 따라 출정하였는데, 국가에서 신을 1등으로 삼아 충의 사직(忠毅司直)을 제수하시니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러나 신의 아비 우(祐)가 정포 만호(井浦萬戶)로 있을 때 장죄(贓罪)를 범하여 직첩을 거두었는데, 이제까지 성은을 입지 못하였으니, 비옵건대, 신의 벼슬은 거두고 아비의 직첩을 도로 주옵소서.’ 하였으니, 어떻게 처리할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그 아비의 장죄는 가볍게 용서할 수 없고, 또 다른 예(例)도 없으니, 직첩을 도로 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둘째로 의논하기를,
"오용권(吳用權)의 아내가 상언하기를, ‘남편이 이방간(李芳幹)을 따라 태종께 득죄하여 고성(固城)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정미년에 연좌된 다른 사람은 모두 원면(原免)되었으나 남편만이 원면되지 못하였으니, 만일 방면(放免)하지 못하거든 경기 양근(楊根)·적성(積城)·유후사(留後司) 중으로 이배하기를 청한다. ’고 하였다. 나는 석방시키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용권은 중한 죄를 지었으니 가볍게 용서할 수 없고, 또 경기 고을에도 옮겨 둘 수 없사오나, 나이 이미 늙었으니 자원대로 외방에 옮기는 것은 괜찮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함길도에 사는 태조·태종의 유복 지친(有服之親)이 시골에 묻혀서 마침내 세상에 쓰임을 얻지 못하여 빈곤한 자도 많이 있으니, 내가 하번 갑사(下番甲士)의 벼슬을 주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재주가 있는 자에게는 다른 예에 의하여 벼슬을 주고, 재주가 없는 자는 하번 갑사나 토관직(土官職)을 주게 하소서."
하였다. 또 논의하기를,
"함길도에 땅이 넓은 주·군(州郡)을 분할하여 수령을 두는 것이 어떤가. 함흥 임내(任內)의 홍원(洪原)에다 나라에서 수령을 두려고 하였는데,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함흥의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부왕(父王)께 아뢰어 드디어 수령을 두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일시적 사사로운 의견으로 국가의 공론을 폐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며, 또 저때와 이때는 시대가 다르다. 내가 다시 생각하니 수령을 두는 것이 좋은데, 경 등은 절충하여 아뢰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다른 곳은 사람과 물건이 적어서 수령을 둘 수 없으나, 홍원은 사람과 물건이 번성하고 또 함흥과의 거리가 90리 가량이나 되니 수령을 두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황희와 권진이 아뢰기를,
"전라도 진도(珍島)는 왜인이 오는 첫 지면(地面)이므로 방어하는 일을 갖추지 아니할 수 없으니, 경상도 거제(巨濟)의 예에 의하여 수령을 두어 변경을 굳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0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8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
- [註 102]백어(伯魚) : 공자 아들.
○召領議政黃喜、左議政孟思誠、右議政致仕權軫、右議政崔閏德等, 上御思政殿, 密敎安崇善曰: "歲在己酉, 廢東宮嬪, 其爲人薄行, 豈將爲母儀一國哉? 孔子出妻, 伯魚出妻, 子思出妻, 誠以夫婦人倫之本, 好合如鼓瑟琴, 然後庶成家道。 臨瀛大君之妻南氏年過十二, 尙遺失便旋, 眼精不正, 舌根甚短, 行止似有驚狂之狀, 疑其有疾, 然不敢發言, 已有月矣。 近日細看人中有灸痕, 又頭頂上有灸處, 使醫盧重禮密問於出入南氏家醫員金四知, 若曰: ‘幼時發狂疾, 華嚴宗僧乙乳醫治之。’ 宜山君家有一婢子, 出入孝寧大君家, 云: ‘南氏本有顚狂之疾, 幸有命, 乃爲大君之配。’ 鄭忠卿家出入之巫, 又出入於南氏家, 云: ‘南氏兒時, 發顚狂之病, 幾入死地, 多方療治, 尙延今日。’ 予聞之猶未信, 使日侍目前, 肆氣無常, 左右笑之, 恬不爲怪, 果合所聞。 古人云: ‘惡疾去, 不順父母去。’ 東宮出妻, 又臨瀛出妻, 深以爲愧。 大抵女色三十始衰, 光武以妬廢皇后, 大臣等言曰: ‘豈以妬去之? 人君標準於上, 一言一動, 人所取則。 是以在臣下出妻者, 必窮治而防禁之。 明於責下, 暗於自己, 人必笑之。’ 中宮曰: ‘得良妻以居可矣, 何必去之?’ 此言亦似矣, 熟議去就以啓。" 黃喜等啓曰: "夫婦, 百年偕老者也。 以如此惡疾之人, 豈可爲大君配乎? 其父南智初不啓達, 罪亦不細, 然不可追論。 其祖景文有狂疾, 南智妻父(李文斡)〔李文幹〕 之族, 亦有此疾, 宜速出之。" 上曰: "予更思之。"
又議曰: "司直韓穀上言: ‘臣從崔閏德赴征, 國家以臣爲一等, 授臣忠毅司直, 聖恩至矣。 然臣父祐, 井浦萬戶時, 論以犯贓, 收其職牒, 迨今未蒙聖恩。 乞收臣職, 還給父職牒。’ 何以處之?" 僉曰: "其父贓罪, 不可輕宥, 況無他例, 不宜還給。" 其二曰: "吳用權妻上言: ‘夫從(芳斡)〔芳幹〕 , 得罪太宗, 流于固城。 歲在丁未, 緣坐各人, 竝皆原免, 夫獨不原, 如不放宥, 請移於京畿、楊根、積城、留後司中。’ 予欲放之, 何如?" 僉曰: "用權犯重罪, 不可輕宥, 又不可移置京邑。 年已老矣, 於外方, 從願量移爲便。" 又議曰: "咸吉道住太祖、太宗有服之親, 沈滯鄕曲, 終不見用於世, 以至貧窮者, 頗多有之。 予欲除下番甲士之職, 何如?" 僉曰: "其有才者, 依他例授職, 無才者, 除下番甲士與土官職。" 又議曰: "咸吉道地廣, 州郡割置守令何如? 且咸興任內洪原, 國家欲置守, 予在潛邸, 掌咸興之事, 啓于父王, 遂不置守, 然以一時私意, 廢國家公論不可, 且彼此之時不同。 予更思之, 宜置守令, 卿等折中以啓。" 僉曰: "他處則人物爲難, 不可置守, 洪原則人物繁盛, 且距咸興幾九十里, 置守甚便。" 黃喜、權軫啓: "全羅道 珍島, 倭入初面, 防守之事, 不可不備, 依慶尙道 巨濟例置守, 以固邊鄙。" 上皆從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60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83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고사(故事) /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