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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2월 24일 을묘 6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황희·맹사성 등과 의논하다

황희·맹사성·권진·허조·신상·정초 등을 불러서 일을 의논하게 했는데, 그 첫째는,

"우리 태종때에는, 원일에 일식이 있으면 망궐례를 정지하게 했는데, 그러나 근래에는 사신이 모두 내관인 까닭으로 비록 원일을 만나더라도 망궐례를 행하지 않으며, 만약 조관이 오면 원일에 비록 일식을 하더라도 반드시 망궐례를 행하는데, 본국에서는 일식이 있는 까닭으로써 홀로 망궐례를 정지하게 되니, 형세가 불편하였다. 또 원일을 만나면 신자가 군부를 향하여 그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악부는 진설하여 두고 연주하지 않으며 다만 하례만 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정초가 아뢰기를,

"조관이 비록 혹시 나오더라도, 위에 천변이 있는데 보통 때와 같이 예를 행하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또한 악부를 진설하여 두고 잡히지 않는 것은 옛날에는 그런 예가 없었으니, 마땅히 망궐례를 정지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신상은 아뢰기를,

"황제께서도 또한 하늘을 이고 계시니, 하늘에 변고가 있는데 사람이 그 예를 행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하였다. 허조는 아뢰기를,

"하늘은 황제보다 위에 있는 높은 것이니, 하늘에 일식의 변고가 있는데 공공연히 하례를 행함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권진은 아뢰기를,

"일식은 황제보다 높은 하늘의 변고인데, 태종 때에도 또한 하례를 정지했으니 마땅히 전례에 따를 것입니다."

하였다. 황희는 아뢰기를,

"마땅히 하례를 행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맹사성은 아뢰기를,

"악부는 진설하여 두고 연주히지 않으며 다만 하례를 행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맹사성의 의논에 따랐다. 그 둘째는,

"종부시에서 아뢰기를, ‘입학한 종친은 부모의 기일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복제의 식가(式暇)176) 에는 모두 입학해서 글을 읽도록 할 것입니다.’ 하는데, 내 생각에는 서울과 지방의 학생들은 모두 복제의 식가를 얻는데 종친의 입학하는 사람만이 홀로 복제의 식가를 제외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 없겠는가."

하니, 정초·신상·허조·권진 등이 아뢰기를,

"비록 부모의 상일지라도 《악기(樂記)》를 제외하고는 강독(講讀)을 금하지 않는데, 부귀한 종친과 외척은 복제의 식가로 인하여 여러 날 동안 학업을 폐지한다면 입에서 반드시 가시가 돋칠 것이며, 게으른 마음이 싹트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땅히 복제의 식가를 없애고 학무을 강하여 그치지 않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맹사성은 아뢰기를,

"다른 학생의 예를 따라서 마땅히 복제의 식가를 주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황희는 아뢰기를,

"복제의 식가는 제도에 의거하여 말미를 주는 것을 종부시로 하여금 조사해서 계달하도록 하여 입학하게 함이 편리할 것이니, 곧 종부시에 명하여 규정에 의거하여 말미를 주도록 하고, 복제는 비록 다하지 않더라도 입학하는 기일로써 계달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셋째는,

"원묘의 제도는 마침내 폐지할 수가 없다면 그 세대의 수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정초는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종묘는 향사하는 시기가 있으니 번거롭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자(臣子)의 마음은 음식물을 얻으면 곧 제사드리고자 하여 특별히 원묘를 설치하여 제사지내는 것이다. 원묘는 비록 이것이 옛날 사람이 그르게 여긴 것이지마는 금지할 수가 없다. ’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비록 법을 마련하여 금지시키더라도 대를 계승하는 임금이 마땅히 다시 대대로 세우게 될 것이니 형세가 금지시킬 수 없습니다. 마땅히 고려 시대의 고사에 의거하여 특별히 경령전을 대궐 안에 설치하여 같은 당에 실로 넷으로 하여, 제 1실에는 태조의 신주를 모시고, 제 2실에는 태종의 신주를 모시고, 제 3실에는 조고의 신주를 모시고, 제 4실에는 아버지의 신주를 모실 것입니다. 대를 계승하는 임금이 이어 왕위에 오르면, 문소전광효전 중에 별도로 전 한 채를 지어서 3년 안에는 그 아버지를 모시어 제사지내다가, 대묘에 부제한 후에는 경령전에 모셨던 증조(曾祖)의 신위를 옮기고, 조고의 신위를 제 3실에 차례로 옮기고, 또 아버지의 신위를 제 4실에 옮기고, 그 태조·태종의 아버지의 묘는 뜻대로 향사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도 모두 이와 같았다. 안숭선이 아뢰기를,

"만약 그렇다면, 친아버지의 묘는 멀리 대궐 밖에 있게 되고, 조고의 묘는 가까이 대궐 안에 있게 되니, 처음에 원묘를 설치한 의도는 가까이 있어 편하게 하여 일정한 시기가 없이 제사지내려던 것인데, 옳지 않음이 없겠습니까. 또 한 전의 안에서 아버지 묘만 버리고 홀로 3실에만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불편합니다."

하였다. 허조는 아뢰기를,

"친아버지의 신주를 3년 후에는 대궐 안에 옮겨 들이게 되니, 무엇이 먼 것을 혐의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조목은 경이 그것을 맡아서 다시 《황명초백(皇明抄白)》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 네째는,

"새해에 종족을 합하여 연회를 같이 함은 옛날의 예절인 것이다. 지금 이담이 죽었는데, 종친의 상복이 새해를 당하여 비록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도 상복을 벗고 연회에 모이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정초는 아뢰기를,

"혹은 공사로 부득이해서 복제를 벗게 한 사람은 있지마는, 종친의 상복이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을 모두 상복을 벗고 연회에 나오도록 함은 옳지 못한 듯하오니, 그 복제의 기일이 다 마침을 기다려 정월 안에 연회에 모이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상은 아뢰기를,

"이담은 친히 스스로 대의를 범했으므로 다른 종친과는 비교할 수가 없사오니, 상복을 벗고 연회에 나오게 함이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허조·권진·맹사성·황희 등이 아뢰기를,

"왕세자와 세 대군은 상복 기일이 이미 다 마쳐졌으니 연회에 나오도록 하고, 그 나머지 소공의 친족은 연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 복제의 기일이 다 마치기를 기다려 연회에 모이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랐다. 그 다섯째는,

"사신이 해마다 왕래하게 되어 지금 이미 관례를 이루었는데, 그 접대하는 물건을 다시 민호에게 더 배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매양 사신이 올 때에 조달(調達)이 넉넉하지 못하면, ‘인납(引納)’이라 명칭하여 백성에게 갑자기 징수하게 되니, 그 폐단이 심한 편이다. 그 접대하는 물건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접대하는 물건을 다시 백성들에게 더 배정하지 않고 다만 공급할 물건을 계산하여 미리 준비할 것이온데, 묵은 쌀·콩으로써 민간의 물건을 사들여 뜻하지 않은 수요(需要)에 대비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상은 아뢰기를,

"모자라는 각종 물건은 민호에 더 배정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물건은 임시에 와서 공문을 보내어 기일에 미쳐 상납하게 한 까닭으로 백성들에게 폐해가 생기니, 그 부득이하여 준비해야 될 각종 물건은 미리 마감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 여섯째는,

"외조고비(外祖考妣)의 제문 안에, ‘아무 일에 치제한다. ’고 한 것을 전일에 경 등이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으나, 정초가 아뢰기를, ‘옛날에 한나라 문제주아부(周亞父)에게 말하기를, 「삼가 장군에게 묻는다.」라고 하였으니 대신에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거늘, 더군다나 외조이겠습니까. 마땅히 외조고비에게는 「삼가 치제한다」고 해야 될 것이며, 또 일월에는 인을 찍어야 합니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황희 등이 모두 아뢰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즉시 예조에 명하여 제문의 격식(格式)을 갖추어 아뢰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64면
  • 【분류】
    과학-천기(天氣) /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역사-고사(故事) / 풍속-예속(禮俗) / 재정-공물(貢物)

○召黃喜孟思誠權軫許稠申商鄭招等議事。 其一曰: "我太宗朝元日日食, 停向闕禮, 然近來使臣皆是內官, 故雖値元日, 不行向闕禮, 若朝官來, 元日雖日食, 必行向闕禮。 本國以日食之故, 獨停向闕禮, 勢似未便, 且當元日, 臣子向君父, 不可不行其禮也。 樂部陳而不作, 只行賀禮何如?" 曰: "朝官雖或出來, 上有天變, 循常行禮, 甚爲未便。 且樂部陳而不作, 古無其例, 宜停向闕禮。" 曰: "皇帝亦以天爲戴, 天有變, 人行其禮, 未便。" 曰: "天者, 皇帝以上之尊也。 天有日食之變, 公行賀禮, 不可忍爲。" 曰: "日食, 皇帝以上之變也。 太宗朝亦停賀禮, 宜從前例。" 曰: "宜勿行賀禮。" 思誠曰: "樂部陳而不作, 只行賀禮爲便。" 上從思誠議。 其二曰: "宗簿寺啓: ‘入學宗親, 除父母忌日外, 其餘服制式暇, 皆令入學讀書。’ 予意以爲京外學生, 皆告服制式暇, 宗親入學者, 獨除服制式暇, 無乃不可乎?" 等以爲: "雖父母之喪, 除《樂記》外, 不禁講讀。 膏梁宗戚, 因服制式暇, 曠日廢學, 則口必生荊, 怠心萌矣。 宜除服制式暇, 講學不輟。" 思誠以爲: "從他學生例, 宜給服制式暇。" 以爲: "服制式暇, 則依制給暇, 令宗簿尋自啓達, 使之入學爲便。" 卽命宗簿, 依式給暇, 服制雖未盡, 以入學日期啓達。 其三曰: "原廟之制, 終不可廢, 則其世數, 更議以啓。" 以爲: "朱子曰: ‘宗廟享祀有時, 不可煩黷, 臣子之心, 欲其隨獲隨薦, 特設原廟以祀之。 原廟雖是古人之所非, 不可禁遏。’ 殿下今雖立法以禁, 繼世之君, 當復世立, 勢不可禁。 宜依前朝古事, 特設景靈殿於禁內, 同堂四室, 第一室安太祖之神, 第二室安太宗之神, 第三室安祖考之神, 第四室安其禰神。 繼世之君嗣立, 則於文昭廣孝殿中, 別作一殿, 三年之內, 則安其禰而祭之, 及祔太廟之後, 遷景靈殿所安曾祖神位, 遞移祖考於第三室, 又移禰神於第四室。 其太祖太宗、禰廟, 則隨意享祀爲便。" 等議皆同。 安崇善曰: "若然則親禰之廟, 遠在禁外, 祖考之廟, 近在禁內。 初設原廟之意, 取其近便, 而無時享薦也, 無乃不可乎? 且一殿內, 捨其禰廟, 而獨祭三室, 又爲未便。" 曰: "親禰之神, 三年之後, 則移入禁內, 何嫌於遠乎?" 上曰: "此條, 卿其掌之, 更考《皇明抄白》以啓。" 其四曰: "歲時合族同宴, 古之禮也。 今李湛死, 宗親之服, 當歲時雖有未盡者, 欲令除服會宴, 何如?" 曰: "或以公事, 不得已而除服制者有之。 宗親之服未盡者, 竝令除服赴宴, 似爲未可。 待其制盡, 於正月內合宴爲便。" 曰: "親自犯義, 不可與他宗親比, 除服赴宴無妨。" 思誠等以爲: "王世子及三大君服已盡, 可令赴宴, 其餘小功之親, 不可赴宴, 待其制盡合宴爲便。" 上從僉議。 其五曰: "使臣連年往來, 今已成例。 其支待物件, 更不加定民戶, 欲其安也。 每當使臣之來, 調度不充, 則名曰引納, 而暴斂於民, 其弊爲甚, 支待物件預辦何如?" 等曰: "支待物件, 更不加定於民, 但計供預備, 以陳米豆, 購求民間, 以備不虞爲便。" 曰: "不足物色, 加定民戶爲便。" 傳旨戶曹曰:

使臣支待物色, 臨時行移, 及期上納, 故弊生於民。 其不得已備辦物色, 預先磨勘以啓。

其六曰: "外祖考妣祭文內, 稱致祭于某事, 前日卿等已議定。 然鄭招曰: ‘昔 文帝周亞父曰: 「敬問將軍。」 於大臣尙爾, 況外祖乎? 宜稱敬祭于外祖考妣, 又於日月用印。’ 何如?" 等皆以爲可, 卽命禮曹, 具祭文規式以啓。


  •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64면
  • 【분류】
    과학-천기(天氣) /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역사-고사(故事) / 풍속-예속(禮俗) / 재정-공물(貢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