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하윤·이원 등 고금인물의 옳고 그름을 평론하고,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안숭선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황희가 교하(交河) 수령 박도(朴禱)에게 토지를 청하고, 도의 아들을 행수(行首)로 들여 붙였으며, 또 태석균(太石鈞)의 고신에 서경하기를 청하였으니 진실로 의롭지 못하였으매, 간원이 청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미 의정 대신(議政大臣)이며, 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신하인데, 어찌 이런 일로써 영영 끊으리오. 임인년에 태종께서 소환(召還)하시던 날에 내게 이르시기를, ‘양녕이 세자로 있을 적에, 구종수(具宗秀)의 무리들이 의탁하고 아부하며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여, 양녕으로 하여금 길을 그릇 들게 하였다.’ 하시고, 희에게 의논하며 ‘어떻게 처치할까.’ 하고 물었더니, 희가 아뢰기를, ‘세자께서 연세가 적어서 매나 개를 가지고 노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므로, 당시에 말들하기를, ‘희는 중립(中立)하여 일이 되어 가는 꼴을 보고만 있다. ’고 하여 밖에 내쳤는데, 이제 생각하면 희는 실로 죄가 없었다. 태종께서 또 한(漢) 원제(元帝) 때의 사단(史丹)124) 의 사실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고 인하여 눈물을 흘려 우셨으니, 그 희의 재주를 사랑하시고 아끼시기를 지극히 하셨으니, 내가 어찌 신진(新進)한 간신(諫臣)의 말에 따라 갑자기 끊을 수 있으랴. 경은 이런 뜻을 간원(諫員)에게 갖추 말하라."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교하와 석균(石鈞)의 일은 진실로 희의 과실이옵니다. 그러나, 정사를 의논하는데 있어 깊이 계교하고 멀리 생각하는 데는 희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지금의 대신으로는 희와 같은 이가 많지 아니하다. 전에 지나간 대신들을 말하자면, 하윤·박은·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윤(崙)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이고, 은(訔)은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신하이며, 원(原)은 이(利)만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였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참으로 하교(下敎)와 같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말하기를, ‘윤이 본래부터 아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주머니 속에 간직하였다가 정방(政房)에 들어가서 뽑아 쓰되, 과궐(窠闕)125) 이 혹 적으면 도로 집어 넣었다가 뒷날에 또 이와 같이 하며, 혹 집에 있을 적에는 쪽지에 써서 보내어 태종께 올리면, 태종께서는 마음에 자못 즐겨하지 않으시나 그래도 마지못하여 좇으셨다. ’고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대로 그러하였다. 태종께서 희를 지신사로 삼고자 하여 윤(崙)에게 의논하시니, 윤이 말하기를, ‘희는 간사한 소인(小人)이오니 신용할 수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제수하셨는데, 이로부터 윤과 희는 서로 사이가 나빠서 매양 단점(短點)을 말하였다. 조말생은 윤의 편인데, 윤이 집정(執政)하자 말생에게 집의(執義)를 제수하매, 그때 희가 대사헌으로 있어서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아니하니, 윤이 두 번이나 희의 집에 가서 청하였으나, 희가 듣지 아니하였다. 윤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태종께서 희를 지신사로 삼기를 의논하시기에 내가 헐어 말하였더니, 희가 이 말을 듣고 짐짓 내 말을 이처럼 듣지 않는다. ’고 하였다. 또 희의 과실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하였다. 임금이 고금 인물의 옳고 그름을 평론하고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숭선에게 이르기를,
"양홍달(楊弘達)은 의술(醫術)로 국가에 공로가 있었고, 또 아들 양제남(楊濟南)은 태종께서 보호하기를 오래 하셨으며, 양회남(楊淮南)은 나를 잠저(潛邸) 때부터 따랐으니, 비록 천인에 속하였으나 이미 천인을 면하고 양인(良人)이 되었으므로, 내가 제남을 3품으로 올리고자 하며, 유한(柳漢)은 공주를 양육(養育)한 은혜가 있어 갚고자 하여도 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 그 고신을 도로 주고자 하나 국론(國論)이 두려워 감히 못한다. 한(漢)은 경에게도 친척이 된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한은 그 형 유기(柳沂) 때문에 연좌되어 죄를 입었사오나, 한이 기와 더불어 평일에 심히 불화하여 은혜도 없고 또 죄도 없사오니 진실로 가엾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신을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연좌의 죄에 어찌 형제간 화목하고 불화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형제가 같이 살아야만 연좌죄를 당하게 되옵는데, 본국에서는 형제간이면 으레 연좌하게 되오니, 정리(情理)에 합당치 못한 듯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윤향(尹向)과 윤목(尹穆)에게도 연좌하지 아니하고 가볍게 논하였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하교가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빈(懿嬪)이 박신(朴信)을 소환(召還)하라고 청한 것이 하루만이 아니었으나,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 신(信)의 죄인즉, 무술년에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통사 허초(許楚)가 의금부에서 심온(沈溫)을 잡아 온 일을 누설하였는데 신(信)이 듣고도 그 사실을 아뢰지 아니한 것인데, 매우 교활하였으나 태종께서 그대로 두시고 묻지 않았더니, 뒤에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윤인(尹麟)과 더불어 싸우자 태종께서 신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다가 무술년의 일을 추론(追論)하게 되어 죄를 문책하고 내쳤던 것이다. 이제 소환하고자 하니, 경은 위의 세 가지 일을 세 의정과 비밀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매, 숭선이 아뢰기를,
"신이 무오년 대옥 초록(大獄抄綠)을 보온즉, 심온의 말에, ‘신이 무반(武班)이기 때문에 병권(兵權)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이 말은 아마 온의 참뜻이 아닐 것이옵고, 형벌을 두려워하고 형세에 핍박되어 할 수 없이 납초(納招)126) 한 것이며, 또 대변(對辯)하지도 아니하였사오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태종께서 사제(賜祭)하시고 또 예장(禮葬)을 명하셨사오니, 국모(國母)의 친아버지를 죄안(罪案)에 기록하여 두게 함은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 때에 있었던 일이니 뒤에 고칠 수는 없다. 또 온의 말에, ‘강상인(姜尙仁)·이관(李灌)·박습(朴習) 등이 집에 와서, 군사 일은 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하니, 이 말로써 논하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매, 숭선이 아뢰기를,
"금지옥엽(金枝玉葉)127) 이 대대로 이어나가서 만세 후에도 오히려 죄인이라고 일컫게 함이 가하오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말하지 말라. 내가 기필코 듣지 않겠다."
하였다. 숭선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하(李賀)의 고신(告身)을 도로 주시기를 청하였더니 윤허함을 얻지 못하였사오나, 신의 뜻으로는, 하(賀)가 처음 그 아들 이숭지(李崇之)를 온의 집에 보낸 것은 진실로 죄가 있사오나, 그 아들이 이미 벼슬을 받았사온데 아비의 고신을 주지 아니함은 과하지 않사오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온과 더불어 혼인을 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작지 아니한 바에 어찌 도로 줄 수 있으리오.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숭선이 아뢰기를,
"신이 거듭 생각하오니, 국모(國母)의 아버지를 죄적(罪籍)에 이름을 기록한 것은 심히 불가하옵니다. 만약 태종 대왕께서 오늘날에 계시었으면 반드시 이와 같이는 아니하셨을 것이옵니다. 후세에서 전하를 융통성이 없다고 이를까 깊이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이 융통되지 않는단 말인가. 선군(先君)께 득죄한 사람을 내가 어찌 감히 가볍게 용서하리오."
하고, 또 말하기를,
"예전에 변계량이 내게 말하기를, ‘무술년에 의금부에서 큰 옥사(獄事)를 국문할 때에, 허지(許遲)가 형조 판서로 있으면서 압슬형(壓膝刑)을 가할 것을 먼저 발언하였는데, 지가 오래지 않아서 죽으니 신도(神道)가 과연 헛되지 않다. ’고 하더라."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이 같은 일은 예전에 많이 있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숭선이 물러나와 세 의정들과 비밀히 의논하니, 양제남(楊濟南)과 회남(淮南)에게 3품을 제수하는 일에 대하여 맹사성·권진 등은 가하다고 하고, 황희는 불가하다고 하며, 유한(柳漢)의 고신을 도로 주는 일에 대하여는 모두 가하다고 하고, 박신(朴信)을 소환하는 일은, 희와 사성은 가하다고 하고, 진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5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40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124]사단(史丹) : 한(漢) 나라 원제(元帝)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태자를 폐하고 공왕으로 후사를 삼고자 하므로, 시중(侍中) 사단(史丹)이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아니하였다.
- [註 125]
○上引見安崇善曰: "黃喜請田于交何守朴禱, 以禱之子入屬行首, 又請署太石鈞告身, 誠爲非義, 諫院之請是矣。 然旣是議政大臣, 且太宗信任之臣, 豈可以此而永絶之哉? 歲壬寅太宗召還之日, 謂予曰: ‘讓寧之爲世子也, 具宗秀之徒, 依阿多行不義, 使讓寧失道。 議問於喜曰: 「處之何如?」 喜曰: 「世子年少, 所行不過鷹犬之事。」 當時謂喜爲中立觀變, 黜之於外, 以今思之, 喜實無罪。’ 太宗又引漢 元帝時史丹之事解之, 因泣下, 其愛惜喜之才至矣。 予何從新進諫臣之言, 而遽絶之乎? 卿以此意, 具語諫員。" 崇善曰: "交河、石鈞之事, 誠喜之失也。 然圖議政事, 深謀遠慮, 無如喜焉。" 上曰: "卿言然矣。 今之大臣, 如喜者不多。 以已往大臣論之, 河崙、朴訔、李原, 皆得貪財之名。 崙則圖濟己欲之臣, 訔則逢迎主意之臣, 原則貪利忘義之臣。" 崇善曰: "誠如上敎。 當時士大夫言: ‘崙書素知人名, 藏之囊中, 入政房用之, 窠闕或少, 還藏之, 後日亦如之。 或在家書片簡, 遙達于太宗, 太宗意頗不肯, 然猶勉從。’" 上曰: "卿言然矣。 太宗欲以喜爲知申事, 議于崙, 崙曰: ‘喜姦詐小人, 不宜信用。’ 太宗不聽, 竟授之, 自此崙與喜有隙, 每短之。 趙末生, 崙之黨也。 崙執政, 拜末生爲執義。 喜時爲大司憲, 不(暑)〔署〕 告身, 崙再到喜家請之, 喜不聽。 崙常自言: ‘太宗議喜爲知申事, 予短之。 喜聞此言, 故不聽予言如此耳。’ 且喜之失, 載在史冊, 予已見之矣。" 上論及古今人物賢否, 從容久之, 謂崇善曰: "楊弘達之醫, 有功於國家, 且其子濟南, 太宗護之久矣。 淮南從我乎潛邸, 雖干賤口, 已免爲良, 予欲以濟南爲三品。 柳漢養育公主之恩, 欲報無由, 今欲還給告身, 然畏國論未敢耳。 漢於卿, 亦族也。" 崇善曰: "漢以兄沂之故, 緣坐被罪。 漢與沂平日甚不和, 無恩而無罪, 誠可恤也。 臣意宜給告身。" 上曰: "緣坐之罪, 豈可以兄弟之和不和言之乎?" 崇善曰: "中國之人, 兄弟同居, 故得緣坐, 本國則兄弟緣坐, 恐不合情理。" 上曰: "尹向與尹穆, 亦不緣坐, 而輕論之矣。" 崇善曰: "上敎是矣。" 上曰: "懿嬪請召還朴信者非一日, 然且不聽。 信之罪則歲戊戌赴京回還也, 通事許楚洩義禁府執沈溫以來之事, 信聞之不啓, 其凶狡甚矣。 然太宗置不問。 後爲繕工提調, 與尹麟相鬪, 太宗下信于義禁府鞫之, 追論戊戌之事, 數罪黜之。 今欲召還, 卿其密議上項三事于三議政以啓。" 崇善曰: "臣見戊戌年大獄抄錄, 沈溫言: ‘臣以武班, 故欲執兵權。’ 此言恐非溫之實意, 畏刑勢迫, 不獲已而納招。 且不對辨, 其罪可恕。 太宗賜祭, 又命禮葬, 以國母親父, 而籍名罪案, 臣以爲不可。" 上曰: "事在先君之時, 不可追改。 且溫之辭曰: ‘姜尙仁、李灌、朴習, 到家云: 「兵事歸一可矣。 答云: 「歸一可矣。」’ 以此辭論之, 罪不可赦也。" 崇善曰: "金枝玉葉, 繼繼繩繩, 萬世之後, 尙稱罪人, 其可乎?" 上曰: "勿復言, 予必不聽。" 崇善曰: "臣曾請還給李賀告身, 未得蒙允, 然臣意以爲賀初送其子崇之于溫家, 則誠有罪矣。 然子已受職, 而不給父告身, 無乃過乎?" 上曰: "不畏王法, 與溫爲婚, 罪誠不小, (何)〔可〕 不還給, 勿復言。" 崇善曰: "臣反覆思之, 國母之父, 錄名罪籍, 甚爲不可。 儻使太宗在於今日, 必不如此, 深恐後世謂殿下爲不通也。" 上曰: "何不通之有? 得罪先君之人, 予何敢輕赦?" 又曰: "昔卞季良語予曰: ‘戊戌年義禁府鞫大獄之時, 許遲爲刑曹判書, 先發壓膝之言, 遲果不久而死, 神道不虛。’" 崇善曰: "如此之事, 古多有之。" 上曰: "然。" 崇善退與三議政密議楊濟南ㆍ淮南除三品, 孟思誠、權軫等以爲可, 黃喜以爲不可。 柳漢告身還給, 僉曰: "可。" 朴信召還, 喜、思誠以爲可, 軫以爲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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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