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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8월 11일 계축 3번째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역사를 기록하는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나라우나라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서(隋書)》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 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 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리기를, ‘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봉(賵)045) 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짐(朕)을 여(予)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褚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

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7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註 045]
    봉(賵) : 성풍(成風)은 노나라 희공(僖公)의 어머니인데, 정실(正室)이 아니었다. 그러나 희공이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정사를 잘하였다 하여 정실(正室)의 예장(禮葬)인 봉(賵)으로 한 것은 종주국인 주나라 임금의 잘못이므로, 주나라의 임금을 천왕(天王)이라고 쓰지 아니하고 다만 왕이라 써서, 은근히 그의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進《讎校高麗史》, 其序文曰:

史法古矣, 自已然, 稽諸書, 可見也。 列國史官各記時事, 後之纂述者, 得有考焉。 若夫漢祖, 使蕭何籍; 唐宗卽祚, 命魏徵《隋書》, 鑑前世廢興之故, 爲後王善惡之師, 所謂國可滅, 而史不可滅者, 詎不信夫?

恭惟我太祖開國之初, 卽命奉化伯 鄭道傳西原君 鄭摠, 修《高麗國史》。 於是採摭各朝實錄及檢校侍中文仁公 閔漬 《綱目》、侍中文忠公 李齊賢 《史略》、侍中文靖公 李穡 《金鏡錄》, 彙而輯之, 倣左氏編年之體, 三年而成, 爲卷三十有七。 顧其書, 頗有舛誤, 至於凡例, 以元宗以上事多僭擬, 往往有所追改者。 我主上殿下聰明好學, 留心典籍, 乃命右議政臣柳觀、藝文館大提學臣卞季良及臣等, 重加讎校, 正其訛謬。

永樂二十一年十一月二十八日, 臣上言: "前朝自太祖而下皆稱宗, 僭也。 然惠宗定宗皆廟號, 今新史改稱惠王定王, 以廟號爲諡號, 似失其眞。 乞依實錄太祖神聖王, 惠宗義恭王, 定宗以下皆書本諡, 庶幾不誣事實。" 是日, 臣入侍經筵, 面奉玉音, 若曰: "孔子《春秋》, 則托南面之權, 成一王之法, 故僭王, 貶而書子; 賵葬成風, 王不稱天, 筆削與奪, 裁自聖心。 及左氏作傳, 則, 於, 一從其自稱而書王, 未嘗有改。 若朱子《通鑑綱目》, 雖曰本《春秋》書法, 而其分註則僭僞之邦盜竊名號, 亦皆因其實而錄之, 豈記事之例, 不容不爾也。 今之秉筆者, 旣不能窺聖人筆削之旨, 則但當據事直書, 褒貶自見, 足以傳信於後, 不必爲前代之君, 欲掩其實, 輕有追改, 以喪其眞也。 其改宗稱王, 可從實錄廟號諡號, 不沒其實, 凡例所改, 以此爲準。" 臣等恭承明命, 遂將元宗以上實錄, 比較新史, 如改宗爲王、節日爲生日、詔爲敎、朕爲予、赦爲宥、太后曰太妃、太子曰世子之類, 復從當時實錄舊文, 編摩旣訖, 事跡粗完, 開卷瞭然, 勸懲斯在。

臣竊惟, 司馬子長負邁世之氣, 紬石室之文, 作《史記》百三十篇, 抑揚去取, 自成一家, 然必有褚少孫附其闕, 司馬貞救其訛, 而後其書乃備。 子長尙爾, 況其下者, 烏得無待於刊正糾謬者歟? 作史之難也, 讎校之不可已也如此, 殿下之慮深矣。 至於面命之辭, 出于宸衷之獨斷, 明白正大, 非尋常淺見, 所能測其涯涘者。 謹拜手稽首, 筆之於書, 冠諸卷端, 以告後之君子, 覽者宜致詳焉。

同知春秋館事尹淮所撰也。


  •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7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