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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4월 26일 무오 4번째기사 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예조 판서 허조가 공정 대왕을 종묘에 부사할 때의 제도에 대해 아뢰다

예조 판서 허조 등이 계하기를,

"공정 대왕을 종묘(宗廟)에 부사(祔祀)할 시기가 곧 다가오는데, 5실(室) 안에서 조천(祧遷)057) 하는 제도와 신주를 간직하는 장소를 역대 사실에서 조사한즉, 제도가 각각 달라서 정말 의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삼가 조목을 나열하여 올리오니, 2품 이상 〈대신〉과 시종(侍從)·대간에 명하여 합의하여 실시하게 하소서.

1. 송(宋)나라 신종(神宗)희조(僖祖)가 왕업의 기초를 닦았다 하여, 다시 신주를 태묘(太廟)에 모시고, 순조(順祖)의 신주를 협실(夾室)에 옮겨서 간직하였는데, 정자(程子)주자(朱子)는 예(禮)에 합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목조(穆祖)를 시조로 삼아 그대로 제 1실에 모시고, 익조의 신주를 협실에 옮겨서 간직한다면, 목조는 왕업의 기초를 닦았으므로, 영원히 옮기지 아니하고, 익조(翼祖) 이하의 신주는 조천하여, 자손을 조묘(祖廟)에 붙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태조(太祖)세대가 끝나는[親盡]058) 날에 이르면, 태조는 왕업을 창시한 할아버지이므로, 옮기거나 헐어버릴 수 없고, 고조·증조·할아버지·아버지는 세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또한 옮기거나 헐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6묘(廟)가 되어, 제후는 5묘를 세운다는 제도에 어긋납니다.

1. 당나라 덕종(德宗)헌조(獻祖)의조(懿祖)의 묘를 덕명묘(德明廟)와 흥성묘(興聖廟)에 옮겼고, 송나라 영종(寧宗)은 따로 사조(四祖)의 전(殿)을 태묘 대전(大殿)의 서쪽에 세워서, 희조(僖祖)·순조(順祖)·익조(翼祖)·선조(宣祖) 등 추존(追尊)한 임금의 신주를 조천하여 봉안하고, 첫 겨울 협제(祫祭)059) 를 지낼 때에 먼저 4조의 전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해마다 예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당나라 제도와 같이 한다면, 목조를 시조의 묘에 붙여야 하는데, 덕명묘와 같은 것이 없고, 만일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따로 태묘의 서쪽에 묘실을 세우고 조천된 할아버지의 제사를 받든다면, 옛적에 ‘궁묘(宮廟)의 대수가 멀어지면 헐어내는 일은 있어도 세울 수는 없다’는 뜻에 맞지 않고, 또 9묘(廟)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묘를 세우고 추존한 시조를 제사지낸다는 것은 곧 체제(禘祭)060) 로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에 이르기를, ‘예에 천자가 아니면 체제를 지내지 못한다. 천자는 그 할아버지를 나은 이에게 체제를 지내고 시조를 배향(配享)하는 것이며, 제후는 그 시조에만 한한다.’ 하였습니다.

1. 왕제(王制)061) 에 이르기를, ‘제후는 묘 다섯을 세우는데, 소(昭)062) 가 둘이며, 목(穆)이 둘인데, 태조의 묘와 함께 다섯이라.’ 하였습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元年)에 승상(丞相) 위현성(韋玄成) 등이 아뢰기를, ‘태상황(太上皇) 묘의 신주는 세대가 끝났사오니, 원(園)에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허락하였고,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10년에 중서령(中書令) 요원지(姚元之)와 이부 상서(吏部尙書) 송경(宋璟)이 말하기를, ‘의종(義宗)은 추존한 황제이므로 소목(昭穆)에 끼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며, 장사지낸 곳이 낙주(洛州)에 있으니, 별묘(別廟)를 동도(東都)064) 에 세워서 담당관이 철을 따라 제사를 올리고, 서울에 있는 묘의 신주는 협실(夾室)에 간직하게 하자.’ 하였고, 고려조에는 태조 이상은 조천된 신주를 간직한 곳이 없고, 다만 태조의 아버지만을 추존하여 세조(世祖)라 하고 능소(陵所)에서 제사를 지내고, 태조 이하의 조천된 신주는 모두 여러 능서(陵署)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만일 이상에서 든 제도에 의하여 임금으로 추봉한 시조를 능소에서 제사를 받든다면, 곧 요원지송경의 설에 합치되고, 종묘의 제도도 《왕제(王制)》에서 말한 ‘제후는 다섯 묘만을 세운다’는 제도에도 어긋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옛적의 제후는 모두 처음에 봉한 임금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은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조께서 처음 왕업을 창건하고 4대의 선조를 추존한 것이 이제 벌써 30년이 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세대가 끝났다 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오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그 의견을 조정 신하들에게 회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2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

  • [註 057]
    조천(祧遷) : 세대가 끝난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예절.
  • [註 058]
    세대가 끝나는[親盡] : 종묘 제사에 대수가 끝난 것. 왕은 5대가 되면 제사를 더 지낼 수 없으므로, 신주를 옮겨야 됨.
  • [註 059]
    협제(祫祭) : 종묘에서 조천(祧遷)된 신주까지 모두 합쳐서 지내는 큰 제사.
  • [註 060]
    체제(禘祭) : 여러 묘의 신주를 태묘에 합하여 지내는 제사.
  • [註 061]
    왕제(王制) : 《예기(禮記)》의 편명.
  • [註 062]
    소(昭) : 종묘에서 세대의 순위(順位)를 나타내는 명칭. 중앙이 태조, 2세·4세는 좌편으로 연하여 있는데, 소(昭)라 하며, 3세·5세는 우편으로 인하여 있는데, 이것을 목(穆)이라 함.
  • [註 064]
    동도(東都) : 중국 낙양(洛陽)의 별칭.

○禮曹判書許稠等啓: "恭靖大王祔祭之期將至, 而五室內祧遷之制、藏主之所, 稽諸歷代, 制度各異, 誠有可疑。 謹條列以聞, 請令二品以上及侍從、臺諫集議施行。 一, 神宗僖祖王跡所基, 復奉神主于太廟, 遷順祖藏夾室, 程子朱子以爲得禮。 今以穆祖爲始祖, 而仍居第一室, 遷翼祖藏夾室, 則穆祖以王跡所基, 萬世不遷, 而翼祖以下祧遷之主, 以子孫附於祖廟, 大順也。 然當太祖親盡之日, 太祖創業之祖, 不可遷毁, 高曾祖禰親未盡, 亦不可以遷毁。 是則爲六廟, 有違於諸侯五廟之制矣。 一, 德宗二祖于聖廟; 寧宗別建四祖殿於太廟大殿之西, 以奉祧遷追尊之主, 孟冬祫享, 先詣四祖殿行禮, 歲令禮官薦獻。 若依制, 則穆祖可祔於始祖之廟, 無有如者。 若依制, 別建廟室於太廟之西, 奉祀遷祖, 則非古者宮廟卽遠, 有毁無立之意也, 且疑於九廟矣。 又立廟而祭追崇之始祖, 則疑於禘矣。 《儀禮經傳通解續》云: ‘禮, 不王不禘。 王者, 禘其祖之所自出, 以始祖配之。 諸侯及其太祖。’

一, 《王制》曰: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五。’ 元帝 建昭元年, 丞相韋玄成等奏: ‘太上皇廟主親盡, 宜瘞園。’ 奏可。 玄宗 開元十年, 中書令姚元之、吏部尙書宋璟以爲: ‘義宗追崇之帝, 不宜列昭穆, 而其葬在洛州, 請又別廟于東都, 而有司時享, 其京廟主, 藏於夾室。’ 前朝太祖以上, 無遷主所藏處, 唯太祖之禰, 追尊爲世祖, 祭於陵所, 太祖以下遷主, 皆奉祀於諸陵署。 若依上項之制, 追王之祖, 奉祀於陵所, 則有合於之說, 而宗廟之制, 無違於《王制》諸侯五廟之制矣。 又《朱子》曰: ‘古者諸侯皆得祭始封之君, 以上則不敢祭。’ 然太祖創業之初, 追崇四代, 今三十年矣。 一朝親盡而其神主瘞之, 誠有所不忍, 又無可藏之處。"

上, 下其議於廷臣。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29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