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관찰사 장윤화와 수군 도절제사 박초가 벽골제와 눌제의 수축에 대해 아뢰다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가 계하기를,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와 고부군(古阜郡) 눌제(訥堤)가 무너져 터졌으므로, 일찍이 풍년을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령하셨사오나, 신이 이제 순시하여 이해(利害)를 물어보니, 방죽 언덕은 비록 무너졌으나, 물이 오히려 고여 있어 둑 안의 좋은 전지 수만(數萬) 두락(斗落)이 침수되어 있사오며, 또한 농사철을 당하여 크게 무너지면 둑 아래의 농사꾼들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될 것이오니, 청컨대 둑방을 더욱 열어 백성들에게 경작할 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윤화(允和)의 의견을 옳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려 하였더니, 김제군 사람 박초(朴礎)가, 그 때에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로 있었는데, 상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김제군의 벽골제는 신라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실로 우리 동방의 큰 못이온데,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바르게 하시려 하시와, 무릇 백성의 이 됨과 해 됨은 반드시 이룩하고 제거하시는지라, 지난해인 을미년에 지군사(知郡事) 김방(金倣)에게 명령하시어 감독하여 수축하게 하였던바, 사역된 인부가 겨우 2만 명으로 20여일만에 공사가 완성되어, 방죽 아래의 땅이 모두 다 옥토가 되어서, 공전(公田)의 수확이 매년 천 석이 넘었으므로, 군민(軍民)의 식량이 또한 풍족하였사오니, 방죽이 공사(公私)에 모두 유리한 것은 분명하옵는바, 근자에 일을 맡은 관원이 어엿한 방죽을 가지고, 혹시나 터져 무너지면 그로 인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 하고 수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허망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인부 4만 명을 동원하고 목책(木柵)을 다섯 겹으로 둘러야 방죽이 완고하다.’ 하였으므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수축할 것을 명하시었던 것인데, 교지가 겨우 내리자, 집사자(執事者)가 국가의 정책이 이 일은 시급을 요하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그 고을의 군수를 시켜서 백성에게 파괴해 없앨 것의 가부를 물으니, 백성은 겁이 나서 관가의 뜻에 아부하여 가만히 서로 말하기를, ‘무너뜨리자는 말을 좇지 아니하였다가는 우리 고을만 부역하는 고통을 혼자 당할 것이다. ’라 하여, 비록 그 수리의 혜택을 받는 자라도 모두 그 말을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비가 오면 도랑을 내어 물을 빼고, 가물면 막아서, 저수하는데에 물을 빼고 저수하는 방법만 얻는 다면, 물이 넘어 무너져 터진다든가, 말라 타서 농사가 낭패될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방죽의 완고함이라든가 물의 이해는 진실로 감수(監守)하는 자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수축하려 할 당초에 방죽 위아래의 토지의 비옥하고 메마른 것과 토지 면적의 다소(多少)를 조사하여 민심이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살핀 후에 갖추 아뢰어 교지를 물어 완성시켰고, 돌을 세워 사적을 기록한 것은 성대(聖代)에 농사를 힘쓰고 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천고(千古)에 밝히 보인 바이었사온데, 겨우 한 해의 우기를 지나 급작히 파기하여 버리려 하오니,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무엇이며, 파기하여 백성에게 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방죽의 형상이 위가 좁아서 둘려 있는 길 같고, 아래는 넓어서 구릉(丘陵) 같아서, 물이 위로 넘지 아니하면, 반드시 언덕을 무너뜨릴 염려가 없사온데, 무슨 까닭으로 보축(補築)하기에 급급한지요. 또 고부군의 눌제는 무술년 가을에 겨우 만 명을 사역하여 한 달만에 완성하였고, 옛적 정전법(井田法)025) 에 의거하여 11의 법026) 으로 구획하여 경계를 삼고, 사전(私田) 1결을 받은 자 아홉이 공동으로 공전(公田) 1결을 경작하여 바치는데, 그 토지가 비옥하여 공사(公私)의 수확하는 바가 모두 풍족하므로, 그 이익됨이 큰 것이라야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한 것이 역시 벽골제와 맞먹는 것이온데, 이제 불행하게도 장마를 만나 무너졌으니, 방죽의 둑이 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자가 물을 잘 소통시키지 않은 소치였사오니,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겠거늘, 집사자가 도리어 제방의 위치가 마땅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힘을 덜 들이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는 것이 편한 줄을 생각하지 않고 망녕된 생각을 내어, 수만 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예전 둑 아래의 넓은 들로 내려다가 쌓아서 보안현(保安縣) 남교(南郊)까지 편입시켜 산과 들을 파서 도랑을 내어 서쪽으로 검포(黔浦) 바다까지 통하였으나, 그것으로 무너져 터질 근심을 면할런지 감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만약 전대로 막아 저수한다면 7, 8백 명의 인부를 써서 불과 20일 동안 일할 것뿐입니다. 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올 때에, 길이 두 방죽 언덕으로 지났는데, 눌제에 터진 것을 보축하고 벽골제를 헐어버리는 것을 금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급무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방죽 위 아래의 좋은 토지가 모두 소용없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 채택하여 주시면 다행이겠나이다."
고 하였다. 정부와 여러 조(曹)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이조 판서 허지가 박초(朴礎)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하매, 영의정 유정현 등이 모두 말하기를,
"초(礎)와 윤화(允和)의 소견(所見)이 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조관(朝官)을 보내어 두 사람과 함께 살펴보고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선지(宣旨)하기를,
"전에 부평(富平)에 방죽 막는 것도 호조와 사헌부 관원을 보내어 함께 살펴보게 하고서 수축하였어도 그래도 터져 무너졌는데, 이제 조관을 보내어 살펴본다 하여도, 가고 오고하는 동안에 반드시 농사철이 닥쳐 올 것이니, 마땅히 풍년을 기다려 다시 수축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21면
- 【분류】농업-수리(水利)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全羅道觀察使張允和啓: "金堤郡 碧骨堤、古阜郡 訥堤潰決, 曾命待豐年修築。 臣今巡視, 訪問利害, 堤岸雖決, 而水猶淤塞, 堤內良田沈水者鉅萬, 且當農月, 若致大決, 則堤下農夫, 盡爲漂沒。 請加開決, 聽民耕種。" 命議政府、諸曹議之, 多是允和議, 上從之。
金堤郡人朴礎, 時爲全羅道水軍都節制使, 上書于上王曰:
金堤郡 碧骨堤, 自新羅已築之, 實東方巨澤。 聖上勵精圖治, 凡民之利害, 必欲興除。 歲在乙未, 命知郡事金倣, 監督修治, 役民纔二萬, 僅二十有餘日, 而事功告成, 堤下之地, 皆爲沃壤, 公田之穫, 歲計千斛, 而軍民之食, 亦且足矣。 然則堤之有利於公私審矣。 近有執事者以堂堂之堤, 恐獲潰決之罪, 妄度修補之難, 以爲: "必動民四萬餘人, 設木柵五重, 然後堤乃完固。" 乃命待豐年修築。 敎命纔下, 執事者以爲, 國論必不急於斯, 使其郡守問民以破決之可否, 民亦怯惑阿意, 竊議相告曰: "不從破決之問, 則當有獨役之苦。" 雖蒙其水利者, 靡然曲從。 若令雨則開渠以泄之, 旱則防塞以貯之, 得其通塞之方, 又何慮乎汎濫激岸, 乾燥防農之患哉? 堤之完固、水之利害, 固在監守者之賢不賢如何耳。 其在修築之初, 究覈堤之上下、土壤膏塉、田數多少, 察其民心之好惡, 然後具奏取旨而成之。 其立石紀績, 所以著聖代務農字民之政, 昭示千古者也。 纔値一年之雨, 遽欲棄之, 仍而害民者何, 毁而利民者何? 臣未敢知也。 堤之形, 上窄如周道, 下廣如丘陵, 水不溢於上, 則必無潰岸之害, 何汲汲乎補築哉? 且古阜之訥堤, 歲戊戌秋, 僅役萬人, 閱月而成。 依古者井田什一之法, 畫爲經界, 受私田九結者, 同養公田一結。 其地沃饒, 公私所獲, 俱爲贍足。 其利之博, 立石紀績, 亦與碧骨相侔, 今不幸値雨潰決, 非堤不固, 乃監守者不能疏通之致也。 責有所歸, 而執事者反以堤防之處有所不宜, 不計省力補決之爲便, 輒生妄度。 設以輕動數萬之衆, 移築舊堤之下廣蕩之坪, 幷入保安縣南郊, 堀山野爲渠, 西通黔浦之海, 以免潰決之患, 亦未敢知也。 若欲防塞, 則可用七八百之民, 不過二十日役。 臣受命南來, 道過二堤之岸, 補決訥堤, 禁毁碧骨, 誠今日之急務也。 不然則臣恐堤之上下良田, 皆棄於無用也。 伏望殿下, 採而納之, 幸甚。
命政府、諸曹議之。 吏曹判書許遲請從礎議, 領議政柳廷顯等皆曰: "礎與允和所見不同, 宜遣朝官, 與二人同審以聞。" 宣旨: "昔富平堤堰, 遣戶曹、憲府官, 同審後修築, 尙且決毁。 今遣朝臣, 審視往復之間, 必屆農時, 宜待豐年更築之。"
- 【태백산사고본】 4책 1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21면
- 【분류】농업-수리(水利)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