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하 주서 길재의 졸기
고려 문하 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부의로 백미·콩 15석과 종이 1백 권을 보내고, 따라서 매장할 인부를 마련해 주게 하였다. 길재의 자는 재부(再夫)요, 호는 야은(冶隱)인데, 혹은 금오산인(金鰲山人)이라고도 하였다. 선산부(善山府)에 소속된 해평현(海平縣) 사람이다. 길재는 어릴 적부터 청수하고 영리하였다.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길재는 어머니 김씨를 따라서 시골에 있었다. 원진이 보성(寶城) 고을 원이 되자, 어머니도 같이 가는데, 봉급이 워낙 박하여, 길재를 외가에 남겨 두니, 그 때 나이 8세였다. 하루는 혼자서 남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가재 한 마리를 잡아 들고 노래 부르기를,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는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가 어미를 잃은 것이 나와 같기로 너를 놓아 준다."
하고 물에 던지며, 너무도 슬피 부르짖으니, 이웃집 할멈이 보고 흐느껴 울었고, 온 고을 사람이 듣고 눈물을 아니 흘리는 자 없었다. 뒤에 원진은 서울로 가고,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진이 또 노(盧)씨에게 장가들고 어머니를 박대하여, 어머니가 원망하니, 길재는 어머니께 말하기를,
"아내가 남편에게나, 자식이 어버이에게는 비록 불의(不義)의 일이 있을지라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조금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에 괴변은 옛날 성인도 면하지 못했으니, 다만 바르게 처사하여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하니, 어머니는 감동하여, 마침내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길재는 나이 18세에 상주 사록(尙州司錄) 박비(朴賁)를 찾아가서 공부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말도 종도 없는데, 하루는 어머니에게 하직하며 하는 말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니,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하고, 곧 박비를 따라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섬기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노씨가 사랑하지 아니하나, 길재는 공경과 효도를 다하니, 노씨는 감화되어, 자기가 난 자식과 같이 대접하여,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하였다. 드디어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국학에 입학하여 생원·진사에 합격하였다.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입학하여 글을 읽으니, 길재는 한 마을에 사는 관계로 상종하여 학을 연구하며, 정의가 매우 단란하였다. 신우(辛禑)의 병인년에 과거에 올랐다. 신우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자, 길재는 시를 짓되,
"몸은 비록 특별난 것 없지마는, 백이·숙제 수양산에 굶어 죽는 뜻을 가졌다."
라고 하였다. 기사년에 문하 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 경오년 봄에 나라가 장차 위태함을 알고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이색에게 들러 하직을 고하니, 이색은 시를 지어 주되,
"구름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 기러기 아득아득 공중으로 날아가네."
하였다. 길재는 드디어 선산(善山)의 옛집에 돌아와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신우의 흉보를 듣게 되자, 3년 복을 입고 채과 해장(菜果醢漿)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올렸다.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흔연하여 조금도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학도(學徒)를 가르치되 효제 충신(孝悌忠信) 예의 염치(禮義廉恥)를 먼저 하였다. 상왕이 세자가 되자 불러들여 봉상 박사(奉常博士)의 직을 제수하니, 길재는 전문(箋文)을 올려 진정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신은 초래(草萊)의 태생으로 위조(僞朝)에 신하되어 벼슬까지 받았으니, 다시 또 거룩한 조정에 출사하여, 풍교에 누(累)를 끼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상왕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후한 예로 대접해 보내고 그 집안에 대해 복호(復戶)해 주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게 되자, 상장 제사(喪葬祭祀)를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하고, 불가의 화장법을 쓰지 아니하였다. 처부(妻父) 신면(申勉)이 일찍이 10여 명의 종이 있었는데, 도피하여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자손과 약속하기를,
"찾은 자에게 넘겨 주라."
하니, 길재가 마침 찾아내었다. 그래서 신면은 약속과 같이 하려 하니, 길재는 굳이 사양하므로, 신면이 몰래 약속한 바와 같이 증서를 만들어 주었다. 길재는 얼마 뒤에 문서를 뒤지다 그것을 보고 또 굳이 사양하니, 신면은 성내어 하는 말이,
"벼슬도 사양하고 노복도 사양하니, 사람의 처사는 아니다."
하였다. 길재는 이르기를,
"자손은 조상의 유체(遺體)인데 후박(厚薄)을 두어서는 되겠습니까. 적자(嫡子)가 이미 죽고 없으니, 비록 서자라도 마땅히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것인즉, 소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나누어 반 이상을 주었다. 권근의 사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사람은 군(君)·사(師)·부(父) 세 분으로 사는 이상, 섬기는 것도 한결같아야 한다."
하고, 3년을 심상(心喪)하였으며, 박비가 죽어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외종형인 중 설당(雪幢)이 법손(法孫)의 노복을 그 아들 길사순(吉師舜)에게 주니, 길재는 말하기를,
"이미 법손이라 칭할진대, 어찌 족친에게 줄 수 있는가."
하고, 사순을 시켜 곧 돌려보내게 하였다. 사순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가게 되어, 길재는 훈계하기를,
"임금이 먼저 신하를 불러 보는 것은 3대 이후의 드문 일이니,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에 쏠리는 그 마음을 본받아 네 조선의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고 하였다. 길재는 마냥 제삿날을 당하면, 나물밥으로 재(齋)하고 슬피 울기를 초상 때와 같이하며, 늘 남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언행이 낮에 착오되는 것은 밤에 주의를 아니하기 때문이라."
고 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고요히 앉았다가 밤중에야 잠들며, 혹은 옷깃을 여미고 날을 새기도 하며, 닭이 처음 울면 의관을 갖추고 사당 및 선성(先聖)께 절하고, 자제와 더불어 경서를 강론하며, 비록 병이 들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병이 위급하게 되자, 초상 장사를 주문공의 《가례》에 의하도록 부탁하고, 그 말을 마치자 졸하였으니 67세였다. 권근은 일찍이 길재의 시에 서문을 짓기를,
"고려 5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한 효과가 선생의 한몸에서 수확되었고, 조선 억만년에 강상(綱常)을 부식하여 신하된 절개를 밝히는 근본이 선생의 한 몸에서 터를 닦았으니, 명교(名敎)에 유공(有功)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
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11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어문학-문학(文學)
○高麗門下注書吉再卒。 上命戶曹, 致賻米豆十五石、紙百卷, 仍給埋葬丁夫。 再字再夫, 號冶隱, 或稱金鰲山人, 善山府屬縣海平人也。 再爲孩淸(廋)〔瘦〕 穎悟, 父元進仕于京, 再隨母金氏在鄕, 及元進守寶城, 母赴之, 以俸薄, 留再外家, 時年八歲。 一日獨遊南溪, 得石鼈爲之歌曰: "鼈乎鼈乎! 汝亦失母乎? 吾知其烹汝食之也, 汝之失母猶我也。 是以放汝也。" 因投于水, 號泣甚哀, 隣嫗見之感泣, 鄕里聞者, 莫不垂涕。 後元進還京, 母歸于鄕, 元進又娶盧氏, 疎其母, 母怨之。 再語母曰: "婦之於夫, 子之於父, 雖有不義, 不可少有非之之心。 人倫之變, 古昔聖賢亦有不免, 但處之以正, 以待天定而已。" 母感之, 終不出怨言。 再年十八, 就尙州司錄朴賁受學, 貧無騎從。 一日辭于母曰: "有父不覲, 非人子也。" 卽隨賁赴京, 事父至孝。 盧氏不慈, 再起敬起孝, 盧感之, 待之如己出, 隣里稱之。 遂從李穡、鄭夢周、權近等學焉, 入國學, 中生員進士試。 上王在潛邸, 入學讀書, 再以同里閈, 相從講學, 情意甚款。 辛禑丙寅登第。 當禑攻遼東, 再作詩有曰: "身雖從衆無奇特, 志則夷、齊餓首陽。" 己巳, 拜門下注書, 庚午春, 知國之將危, 棄官而歸, 就李穡告別, 穡贈詩有曰: "軒冕儻來非所急, 飛鴻一箇在冥冥。" 再遂還善山舊廬, 累辟不起。 及聞辛禑凶聞, 方喪三年, 不食菜果醯醬。 奉母惟謹, 定省不廢, 必具甘旨, 居室屢空, 亦怡然不以爲意。 敎授學徒, 以孝悌、忠信、禮義、廉恥爲先。 上王爲儲副, 嘗召之, 授奉常博士, 再上箋自陳曰: "忠臣不事二君。 臣以草萊, 委質僞朝, 至受爵命, 不宜復仕盛朝, 以累名敎。" 上王嘉其節義, 優禮遣之, 許復其家。 母卒, 喪葬祭祀, 一遵《文公家禮》, 不用浮屠法。 妻父申勉嘗有蒼赤十餘口, 逃躱有年, 約子孫得者, 卽以與之。 再適得之, 勉欲如約, 再固辭, 勉密爲書如約。 再後閱文書得之, 又固辭, 勉怒曰: "辭爵祿、辭奴婢, 不宜處人類也。" 再云: "子孫卽祖考遺體, 安可厚薄? 嫡子已沒, 存養雖孼生, 義當主祀, 不可不重。" 遂分與太半。 聞權近卒, 垂泣曰: "民生於三, 事之如一。" 乃行心喪三年。 朴賁沒, 亦如之。 表兄釋雪幢以法孫奴婢, 與其子師舜, 再曰: "旣云法孫, 何傳於族?" 命師舜還之。 及師舜被召赴京, 再啓之曰: "君先乎臣, 三代以後, 蓋罕聞也。 汝當効我向高麗之心, 事汝朝鮮之主。" 再每遇忌日, 齊蔬悲泣, 一如初喪。 常語人曰: "人之言行, 錯於晝者, 以夜不存心耳。" 夜必靜坐, 中夜而寢, 或擁襟達曉, 鷄初鳴, 具冠帶謁祠堂及先聖。 與子弟講論經書, 雖有疾病, 手不釋卷。 疾革, 命喪葬一依《文公家禮》, 言訖而卒, 年六十七。 權近嘗序贈再詩曰: "有高麗五百年培養敎化, 以勵士風之效, 萃先生之一身而收之; 有朝鮮億萬年扶植綱常, 以明臣節之本, 自先生之一身而基之, 其有功於名敎也大矣。"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11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