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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6일 을유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문귀·최한이 한경에서 돌아와 양녕의 일을 아뢰다

문귀(文貴)·최한(崔閑)이 한경(漢京)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임금이 문귀를 보낼적에 문귀에게 이르기를,

"경은 종실(宗室)에 인척(姻戚) 관계가 있으니, 세자가 경을 본다면 반드시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경을 보내려는 것은 군신(群臣)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하다.’고 하여서이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이야기하라."

하고, 인하여 통곡(痛哭)하면서 목이 메었었다. 이어서 하교(下敎)하였었다.

"너는 비록 광패(狂悖)하였으나 너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고 개전(改悛)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백관(百官)들이 지금 너의 죄를 가지고 폐(廢)하기를 청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화(禍)를 자취(自取)하였으니, 나와 너는 부자(父子)이지만 군신(君臣)의 도리가 있다. 내가 백관(百官)의 청(請)을 보고 나의 몸도 또한 상연(爽然)382) 히 떨렸다. 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자리를 사양하고 시위(侍衛)하고 싶습니다.’고 하였는데, 내가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이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고명(高明)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百官)의 청으로 세자(世子)를 삼았다. 너는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내가 충녕(忠寧)을 사랑하기를, 매우 돈독(敦篤)히 하여 비록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더불어 같이 먹고자 생각합니다.」하였으니, 이제 충녕(忠寧)으로써 너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너를 대접하는 생각이 두터울 것이다. 회안군이 병인(兵刃)을 가지고 나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내가 두텁게 대접하여 평안히 평생을 보존하였는데, 하물며 네가 충녕(忠寧)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일생(一生)을 평안히 누릴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군신(群臣)이 모두 너를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도록 청하였으나, 중궁(中宮)이 울면서 나에게 청하기를, 「이제(李禔)가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먼 지방으로 간다면 안부(安否)를 통하지 못할 것이니, 빌건대, 가까운 곳에 두소서.」하고, 나도 또한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무심(無心)하겠는가? 이에 군신(群臣)에게 청하니, 군신(群臣)들도 잠정적으로 또 따랐으므로 너를 광주(廣州)에 안치(安置)하는 것이다. 네가 백관(百官)의 장(狀)을 보면 너의 죄를 알고, 또 나의 부득이한 정을 알 것이다. 비자(婢子)는 13구(口)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잡물(雜物)을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방해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옛날에 이러한 예(例)가 없었으니, 너의 탄궁(彈弓)은 지니고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전(殿)에 두라. 오로지 너의 생활의 자량(資糧)은 내가 그것을 도모하여 부족(不足)함이 없게 하겠다. 비록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는가마는, 그러나, 지금 부모(父母)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좋은 이름이 들리면 좋겠다.’하라 그 세자의 인신(印信)·관교(官敎)·복용(服用)383) 의 모든 물건은 모두 맡은 바 관원(官員)으로 하여금 수령(收領)하게 하는 것이 가(可)하다. 경(卿)이 세자에게 전교(傳敎)하고, 최한숙빈(淑嬪)에게 전교하라."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상교(上敎)384) 를 세자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백관(百官)의 장(狀)을 보이니, 세자가 이를 보고 읽다가 ‘분노(憤怒)’란 두 글자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것은 내 마음에 가졌던 것이 아니다. 옛날에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다가 금일에 죄를 얻은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자식으로서 신하가 되어서 나와 같은 자는 세상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문귀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신으로 하여금 백관(百官)의 장(狀)을 가지고 첫머리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백관(百官)들의 이름을 쓴 곳을 모두 펴 보이게 하였으니, 청컨대, 마땅히 다시 이를 보소서.’하니, 답하기를, ‘대체(大體)를 이미 알았다. 다시 펴 볼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문귀가 또 말하기를 ‘주상께서 이미 회안(懷安)385) 을 평안히 보존한 연고와, 전일에 사양하기를, 청한 말을 가지고 후일에 평안히 생(生)을 누리리라는 일을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나와 같은 사람에게 세상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십니까?’ 하니, 제(禔)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리를 사양하겠다는 청(請)과 충녕(忠寧)을 두터이 사랑한다는 말은 신이 아뢴 것이다.’ 하였습니다. 최한으로 하여금 전(殿) 안에서 떠들거나 우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다음날 밝지도 않아서 숙빈(淑嬪)과 함께 광주(廣州)로 갔는데, 문귀가 전(殿) 안의 잡물(雜物)을 각사(各司)에 붙이고, 종비(從婢) 13구(口) 외에 4비자(婢子)가 있으므로 그 근원을 물으니 모두 시녀(侍女)였습니다. 그러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여 우선 전(殿) 안에 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禔)가 비탄(悲嘆)하던가?"

하니, 문귀가 대답하기를,

"선교(宣敎)할 때에 신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하였으나, 양녕(讓寧)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비탄(悲嘆)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그러하였는지를 물으니, 문귀가 대답하기를,

"신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와 같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었다. 어찌 허물을 뉘우치겠는가? 4비자(婢子)도 내가 장차 제(禔)가 있는 곳에 보내겠고, 어리(於里)로 하여금 또한 따라서 광주(廣州)에 가게 하겠다."

하고, 이에 내신(內臣) 홍득경(洪得敬)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4비자(婢子)를 광주(廣州)로 보내게 하였다. 원윤(元胤)이 돌아와 아뢰기를,

"양녕(讓寧)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신에게 묻기를, ‘경은 무슨 일로 오는가?’하므로, 대답하기를, ‘호송(護送)입니다.’하였습니다. 양녕이 또 말하기를, ‘이 땅을 다시 볼 길이 없을 것이다. 아아!’하고, 또 광나루[廣津]에 이르러 배를 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작별할 때에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질이 본래 거칠고 사나와 보통 때에 나아가 뵈올 적에 말이 반드시 불공(不恭)하였다. 이제 이에 다시 상서(上書)한 글을 보니, 불공(不恭)하기가 이와 같았다. 죄가 심하였으나 죽지 않은 것은 주상의 덕택이니, 어떻게 보답하고 사례하겠는가? 내 성질이 겁약(㤼弱)하기 때문에 짐작(斟酌)을 잘못하여 자주 불효(不孝)를 범하였으니, 어찌 성상을 보기를 기약하겠는가?’하였습니다. 그 시비(侍婢) 13인은 나라에서 정한 숫자인데, 소아(小兒)로서 더 따라가는 자가 2인이었으므로, 신이 사계(四季) 등 2인을 빼앗아 한경(漢京)으로 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2인은 모두 그 첩인데, 경이 빼앗은 것은 잘못이다."

하고, 즉시 명하여 광주(廣州)로 보내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33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文貴崔閑回自漢京。 初上之遣文貴也, 謂曰: "卿戚連宗室, 世子見卿, 則必不驚駭。 予欲遣卿, 群臣皆曰以爲宜, 卿往以予言, 說與世子。" 因痛哭失聲, 乃敎曰:

汝雖狂悖, 予欲使汝期於自新, 豈圖不悔不悛, 以至於此? 百官今以汝罪請廢, 故不得已而從之, 汝其知之, 汝自取禍耳。 予與汝父子也, 然有君臣之道焉。 予見百官之請, 予身亦爽寒矣。 汝昔告予曰: "我欲辭位以侍衛。" 予對以不可也。 今汝之辭位, 汝之素願也。 孝寧大君質弱, 忠寧大君高明, 故予以百官之請, 定爲世子。 汝昔告予曰: "我愛忠寧甚篤, 雖小物, 思欲與同喫。" 今忠寧代汝位, 必厚待汝。 懷安持兵刃而欲害予, 然予厚待, 安保平生, 況汝於忠寧有何罪? 安享一生, 可知也。 群臣皆欲置汝於遐方, 中宮泣請於予曰: "率稚兒輩, 歸於遐方, 則安否不通, 乞置近處。" 予亦非石木, 豈無心乎? 肆請於群臣, 群臣姑且從之, 故置汝于廣州。 汝見百官狀, 則知汝之罪, 且知予之不得已也。 婢子率十三口, 汝所愛者, 皆率居, 奴子將量宜更送。 殿內雜物, 悉皆持去不妨, 然古無此例, 持汝彈弓, 其餘皆置於殿。 惟汝生資, 我其圖之, 無使不足也。 雖悔何及? 然迨今父母生時, 以善譽聞則可矣。 其世子印信、官敎、服用凡物, 皆令所掌官收領可也。

卿傳敎世子, 崔閑傳敎淑嬪

至是回啓曰: "臣等以上敎宣諭世子, 又示百官狀, 世子見之, 讀至憤怒二字曰: ‘是非我心所有也。 昔日請辭不獲, 今日得罪矣。’ 又曰: ‘古今天下, 爲子有臣而如我者, 未有生存於世也。’ 曰: ‘上使臣將百官狀, 自首至尾百官着名處, 皆披見, 請宜更見之。’ 答曰: ‘大體已知矣。’ 更不披見。 又曰: ‘上旣敎以懷安安保之故與前日請辭之言, 後日安享之事, 何以說如我者未有生存於世也?’ 曰: ‘昔辭位之請、厚愛忠寧之言, 臣所啓聞也。’ 使崔閑禁殿內喧泣, 翼日未明, 與淑嬪廣州, 以殿內雜物付各司, 從婢十三之外, 有四婢, 問其根源, 皆侍女也。 故不使出外, 姑置殿內。"

上曰: "悲嘆乎?" 對曰: "宣敎之時, 臣不忍墮淚, 讓寧非惟不墮淚, 略無悲嘆之容。" 上更問: "然乎?" 對曰: "如臣所啓。" 上曰: "如彼故如彼, 焉得悔過? 四婢, 予將送於所, 使於里亦隨至廣州。" 乃遣內臣洪得敬於漢京, 送四婢於廣州元胤回啓曰: "讓寧至於東大門, 問臣曰: ‘卿爲何事來?’ 對曰: ‘護送也。’ 讓寧又曰: ‘此地復見無由, 嗟乎!’ 又到廣津, 乘舟墮淚, 又於辭別時, 語臣曰: ‘我性本麤暴, 常時進見, 言必不恭。 今乃再見上書之辭, 不恭如此, 罪甚不死, 上德也。 何以報謝? 我性怯, 故誤失斟酌, 頻犯不孝, 安有見上之期乎?’ 其侍婢十三, 國家之定數, 而小兒加隨者二人, 故臣奪四季等二人, 送于漢京。" 上曰: "二人皆其妾也, 卿奪之誤矣。" 卽命送于廣州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69장 B면【국편영인본】 2책 233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