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그윽이 듣건대, 요(堯)임금과 탕(湯)031) 임금의 세대에도 큰 물과 가뭄의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재앙에 대비하여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정국(鄭國)032) 이 경수(涇水)033) 를 파서 백성들이 그 이익을 얻었고, 문옹(文翁)034) 이 물 내려가는 구멍을 파서 사람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였으니, 역대에 수리(水利)를 일으켜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 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 지금 모두 고증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둡고 어리석은데도 성은(聖恩)을 잘못 입어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니 실로 분수에 넘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늙고 또 질병(疾病)에 걸려 비록 규곽(葵藿)035) 의 정성이 있으나, 돌아보면 조그마한 도움도 없었습니다. 삼가 관견(管見)을 조목별로 뒤에 열거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상재(上裁)하여 시행하소서.
1. 신(臣)이 근래 전라도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를 보니, 사방 둘레가 2식(息)이 넘는데 수문(水門)이 다섯이 있어 큰 내[大川]와 같아서 1만여 경(頃)을 관개(灌漑)할 수 있었습니다. 옛사람이 처음으로 제언(堤堰)을 쌓아서 수리(水利)를 일으켜, 그 공(功)이 심히 컸습니다. 갑오년(甲午年)에 수축(修築)한 이후 둑[堤] 아래 넓은 들에는 화곡(禾穀)이 무르익어 이를 바라보면 구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몇 군데는 통(筒)036) 을 잇대어 견실(堅實)하지 못하여, 전지 70여 경(頃)이 아직도 다 개간(開墾)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한스럽습니다. 원컨대, 일찍이 축조(築造)에 경험이 있는 사람인 전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파견하여 그 고을 수령(守令)과 함께 통(筒)을 잇댄 곳과 수구(水口)가 무너진 곳을 단단하게 쌓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신이 고부(古阜)의 땅 눌제(訥堤)를 보니, 옛날에는 3대 수문(水門)을 설치하였는데, 그 동쪽 수문(水門)은 부령현(扶寧縣) 동쪽 방면으로 1식(息)여 리 흘러 들어가고, 가운데 수문은 부령현 서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 수문은 보안현(保安縣) 남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서, 관개(灌漑)의 이익이 1만여 경(頃)이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익은 많고 손해는 적은 것을 가히 알 수 있고, 또 도랑[溝洫]의 옛 터를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혹자(或者)가 이에 말하기를, ‘둑 안에 있는 전지는 수침(水浸)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또 둑 언덕은 낮은데 전야(田野)는 높아서 비록 개간(開墾)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쓸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나, 그러나 비 온 뒤에 수침(水浸)의 해는 며칠에 지나지 않았고 즉시 아래로 흘러내려 가서 곡식에 손해된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부안 병마사(扶安兵馬使) 한계흥(韓繼興)과 그 현(縣)에 사는 전 호군(護軍) 김당(金堂)과 이민(吏民) 등이 개축(改築)하기를 매우 바라니, 전 현감(縣監) 곽휴(郭休)를 보내어 고쳐 수축하여 권농(勸農)하도록 명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1. 벽골제(碧骨堤) 아래 진지(陳地)가 거의 6천여 결(結)이고, 눌제(訥堤) 아래 진지(陳地)가 1만여 결(結)인데, 다만 그곳의 거민(居民)을 가지고서는 능히 다 경작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땅이 협착하여 그 경작할 땅이 없으니, 혁거(革去)한 사사 노자(寺社奴子) 7,8백 명을 뽑아서 옮겨 살게 하고, 각 고을의 묵은 곡식과 소[牛隻] 2백여 마리를 무역하여 주어서 국농소(國農所)037) 를 더 설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눈이 녹은 물[雪水]은 오곡(五穀)의 정기(精氣)이니, 매년 9월에 얼음이 얼기 전에 보(洑)나 제언(堤堰)을 더 쌓아서 얼음이나 눈의 물을 저장하였다가, 다음해 이른 봄에 흡족하게 관개(灌漑)하소서.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는 양책(良策)은 칠사(七事)038) 의 조획(條畫)인데, 그 안에, 다만 ‘권과농상(勸課農桑)039) ’ 이라고만 일컫기 때문에 수령(守令)들이 농사(農事)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가을·겨울철이 바뀌는 때에 마음을 써서 축조(築造)를 더하지 않다가 혹은 죄(罪)를 얻는 자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수령(守令)이 체대(遞代)할 때 해유 문자(解由文字)040) 안에 ‘어느 수령은 어느 해 어느 철에 옛 터에 축조를 더 한 것이 몇 군데이고, 새로운 터에 축조한 것이 몇 군데이고, 물을 저장한 것이 몇 척(尺)이고, 관개(灌漑)한 땅이 몇 결(結)이라.’는 것을 일일이 갖추어 써서 시행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척간(擲奸)041) 하여서 출척(黜陟)에 빙고하게 하소서."
임금이 읽어 보고 박습(朴習)에게 물었다.
"벽골제(碧骨堤)는 경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쌓은 것인데, 그 이익이 얼마쯤 되던가?"
박습이 대답하기를,
"둑 위에 있는 땅은 침몰된 것이 비록 많지만, 둑 아래에서는 이익이 거의 3배나 되었습니다. 근처의 백성들이 모두 금을 그어서 푯말을 세웠으나 아직도 다 개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탄복하고,
"이처럼 넓은 땅을 여러 해 동안 개간하지 않다가, 지금에야 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백성들의 운(運)이었다."
하였다. 박습이,
"신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차견(差遣)하여 그 역사를 감독시킨다면,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쓸 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묻기를,
"나이가 얼마인가?"
하였다. 박습이 대답하기를,
"중년의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어느 고을 사람인가?"
하매, 박습이 대답하기를,
"광주(光州) 사람입니다. 김제 군수(金堤郡守)가 되었을 때 관찰사 권진(權軫)이 작은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파직(罷職)시켰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출신(出身)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좌대언(左代言) 이명덕(李明德)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가 듣건대, 윤전(尹琠)의 아들 윤흥의(尹興義)도 가히 쓸 만한 사람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뒤에 서용(敍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서 이명덕 등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이은(李殷)은 노인(老人)이지만 공사(公事)를 꺼리지 않으니, 경상도에 이문(移文)하여 노인으로 하여금 올라오지 말게 하고, 도내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또 경기에 이문(移文)하여 우희열(禹希烈)로 하여금 경기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하고, 또 명하였다.
"각도의 수령(守令)이 양반(兩班)과 인리(人吏)의 말을 듣고 제언(堤堰)을 파괴하여 고기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강이 없고 잔열(殘劣)한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진실로 이러한 수령이 있으면 조율(照律)하여 논죄하라."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00면
- 【분류】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31]탕(湯) : 은(殷)나라의 시조.
- [註 032]
정국(鄭國) : 중국 춘추(春秋)시대의 수리 기술자 이름.- [註 033]
경수(涇水) :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 경양현(涇陽縣) 남쪽 7리에 있는 강.- [註 034]
문옹(文翁) : 중국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촉(蜀)의 군수(郡守).- [註 035]
규곽(葵藿) : 해바라기처럼 임금을 바라보는 것.- [註 036]
통(筒) : 물을 잇대는 수로.- [註 037]
국농소(國農所) : 나라에서 경영하던 농장(農場). 노예(奴隷)를 집단으로 사역(使役)시키고 곡식 종자(種子)와 소[牛]를 지급하여 경작시켰음.- [註 038]
칠사(七事) : 수령이 지켜야 할 일곱 가지 조목. 즉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姦猾息).- [註 039]
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업과 잠상(蠶桑)을 권하여 일으킴.- [註 040]
해유 문자(解由文字)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중(在職中)의 회계·물품 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 받던 증명서.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를 발급하였음.- [註 041]
척간(擲奸) : 부정이 있나 없나를 캐어 살핌.○判廣州牧事禹希烈上書, 略曰:
臣竊聞, 以堯、湯之世, 未免水旱之災, 然民不飢寒者, 由備災有素也。 且鄭國鑿涇水, 而民獲其利; 文翁穿溲口, 而人懷其惠。 歷代興水利, 而厚民生者, 載諸史冊, 今皆可考。 臣以昏愚, 謬蒙聖恩, 位至宰相, 實踰涯分, 而桑楡已晩, 且嬰疾病, 雖有葵藿之誠, 顧乏涓埃之補, 謹以管見, 條列于後, 伏望上裁施行。
一, 臣近見全羅道 金堤郡 碧骨堤, 四方周回, 二息有奇, 水門有五如大川, 可灌萬餘頃。 古人始築堤堰, 以興水利, 其功甚大。 甲午年修築以後, 堤下廣野, 登場禾穀, 望之如雲, 然數處連筒, 不得堅實, 田七十餘頃, 尙未盡墾, 誠可恨也。 願遣曾經造築者, 前知金堤郡事金倣, 與其官守令, 連筒及水口決毁處, 堅築何如?
一, 臣見古阜之地訥堤, 古置三大水門。 其東水門則流注扶寧縣東面一息餘里, 中門則流注扶寧縣西面, 西門則流注保安縣南面, 灌漑之利, 幾乎萬餘頃。 以此觀之, 利多害小可知矣。 且其(講洫)〔溝洫〕 古基, 分明可考。 或者乃曰: "堤內之田, 水浸不用。 又堤岸卑而田野高, 雖欲開墾, 將無所用。" 然雨後水浸之害, 不過數日, 隨卽流下, 無所損穀。 今扶安兵馬使韓繼興、其縣接前護軍金堂及吏民等, 顒望改築, 命遣前縣監郭休, 改修築勸農何如?
一, 碧骨堤下陳地, 幾乎六千餘結; 訥堤下陳地, 萬餘結, 但以其處居民, 未能盡耕。 慶尙道人稠地窄, 其無所耕, 革去寺社奴子七八百名, 抄出移置, 以各官陳穀, 牛隻二百餘首貿易給之, 加置國農所何如?
一, 雪水, 五穀之精。 每年九月氷凍前, 洑堤堰加築, 貯氷雪水, 翼年早春, 周足灌漑。 厚民之良策, 七事條畫內, 徒稱勸課農桑, 故守令不知農事之本, 於秋冬之交, 不爲用心加築, 或有得罪者。 自今守令遞代之際, 解由文字內, 某守令某年某節, 舊基加築幾處、新基造築幾處、貯水幾尺、灌漑幾結, 開具施行, 以報監司, 監司擲奸, 以憑黜陟。
上覽之, 問於朴習曰: "碧骨堤, 卿爲觀察使時所築也。 所利幾許?" 習對曰: "堤上之田, 所沒雖多, 堤下所利, 幾至三倍。 近處之民皆畫標, 而今猶未盡墾也。" 上嘆曰: "如此廣地, 累年不墾, 今而得墾, 民之命也。" 習曰: "臣當是時, 差知金堤郡事金倣, 監督其役, 不勞民力, 而能成其事, 此可用人也。" 上問曰: "行年幾何?" 習對曰: "中年人也。" 曰: "何鄕人也?" 習對曰: "光州人也。 爲金堤郡守時, 觀察使權軫以犯小罪罷職。" 上又問: "從何出身?" 左代言李明德對曰: "曾爲生員進士矣。" 上曰: "予聞, 尹琠之子興義亦可用人也。 書此二人之名, 後當敍用。" 仍敎李明德等曰: "李殷, 老人也, 而不憚公事。 移文慶尙道, 毋令老人上來, 而巡察道內堤堰。 又移文於京畿, 使禹希烈巡察京畿堤堰。" 又命曰: "各道守令聽兩班、人吏之言, 破堤堰而捉魚者頗多, 此無紀綱殘劣之人也。 自今以後, 苟有如此守令, 照律論罪。"
-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00면
- 【분류】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32]